어제 평등행진에서 나는 행렬의 맨 뒤를 맡는 스탭이었다.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사전대회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쫓아가려던 참이었다. 깃발을 깃대에 고정시키느라 행렬을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대학의 성소수자 동아리 깃발이었다. 깃발이 깃대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이고 청테이프를 열심히 붙이는 두 사람. 서둘러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행진 대열을 쫓아가던 중 또 두 사람이 행진 대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깃발 하나씩, 두 명이 자꾸 흘러내리는 깃발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하나는 또다른 대학의 총여학생회 깃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소수자 동아리의 깃발이었다. 혼자서라도 그 깃발과 함께 행진하려는 간절한 모습에, 나는 더이상 깃발이 많은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여성혐오에 밀려 총여학생회가 무너지고 성소수자혐오로 현수막이 찢기고 모임 장소도 빌리기 어려운 대학을 다녀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깃발은, 우리가 잘못된 게 아니라 세상이 부정의하다고 항의하는 징표였을 것이다. 평등을 향해 함께 갈 동료들을 얻기 위해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깃발을 들고 평등행진에 나온 마음을 짐작하며 이 깃발들을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됐다.
한부모, 홈리스, 이주여성, 청소년, 장애인... 세상에 아직 얼굴로 등장하지 못하고 숫자로도 셈해지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 있다'고 외치며 걸었던 시간. 깃발이 너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깃발이 우리 모두의 깃발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 뿐이다.
마무리집회에서 모두가 함께 만든 무지개 물결은 모두에게 그런 약속이 되지 않았을까. 누구도 외로운 싸움에 지쳐가지 않도록 우리가 동료가 되겠다는 약속. 이 깃발들 아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겠다. 함께 외쳤던 것처럼, 평등이 대세다. 정말, 평등이 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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