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에서 헤어나기- 미로를 설계하기

나에게는 이런 기억이 있다. 사진 한 장처럼.

응급실 당직 중이었다. 한 여성이 손가락이 잘려 응급실로 급하게 들어왔다. 곧이어 몇몇 여성들이 허겁지겁 달려들어왔고 그녀들은 이내 삿대질을 하며 소리높여 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가 떡 벌어진 남성 두 명이 따라들어와 그녀들 뒤에 버티고 섰다.

병원이 있는 동네는 '유흥가'로 불리우는 곳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고 술에 만취한 여성들이나 새벽에 속이 쓰리다고 찾아오는 여성들을 보면 응급실의 간호사들은 '그런 데 나가는 여자네' 와 같은 말을 무심코 흘리곤 했다. 그래서 누가 콕 집어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어느새 그런 풍경에 익숙해져있었다. 풍경을 보며 넘겨짚는 오만함까지, 어느새 익숙해져있었다.



두 여성이 싸우다가 싸움이 격해지면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소독을 하며 들은 이야기들에 의하면 두 여성은 서로 다른 업소에 나가는 여성이고 아마 평소에는 언니, 동생 하면서 지내던 사이였던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서로 다른 '언니'와 '오빠/삼촌'을 두고 있었다.

잊혀지지 않는 '컷'은 바로 그 '오빠/삼촌'의 모습이었다. 대여섯 명의 여성들이 서로 어쩔 줄 몰라하며 울고 화내고 소리지르고 싸우는 동안, 그들은 그녀들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아주 의젓하게, 우아하게, 그래서 재수없게.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더이상 넘겨짚을 수는 없지만 그녀들이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 그들일 텐데, 정말 보호자나 되는 양 행세했던 것이 그들일 텐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그저 그런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고두고 '남성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의 구도가, 늘상 여성의 문제로만 실물화하는, 부당한 담론체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자세히 상황을 분석해보지 못했지만-나에게는 그럴 만한 정보가 없기도 했다- 그 느낌이 지워지지를 않는다.

 

이런 기억으로 글을 시작하기는 하지만 뭔가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될 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성매매가 노동이냐, 아니냐는 고민들이 오갔다. 오간다. 나 역시 고민을 했었고 '노동일 수 있다'는 정도로 입장을 정리한 셈이다. 하지만 고민을 시작할 때부터, 그리고 오가는 고민들을 들으면서 뭔가 중요한 부분이 빠진 것 같다는, 논의가 왜곡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성매매가 노동이냐, 아니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당연히 나를 포함해서- 성매매여성의 목소리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성노동자 운동이라 할 만한 흐름이 한국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이야기했던 성매매여성들의 자기조직화 말이다. 그런 현실에서 성매매가 노동일 수 있다/없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공에 뜬 논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성매매특별법과 관련된 고민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성매매특별법으로 인해 성매매여성들이 부딪치게 된 현실이 전혀 균질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적극적으로 지원, 자활대책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당분간) 성매매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아마 어느 쪽이 더 자신에게 유리하고 유익한 것인지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더욱 많은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성매매가 노동이냐, 아니냐는 고민이 이어졌던 것은 성매매특별법만으로 균질화할 수 없는 현실을 비집고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기대였다. 성매매가 노동임을 입증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성매매가 노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성매매여성들에게 '노동권'이 싸움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매매여성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그래서 성매매는 나쁜 것이고 사라져야 한다, 는 이야기가 되고 막상 성매매가 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혹은 성매매를 없애면서 성매매여성도 없애버린다. 그리고 현실에서 성매매를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도 없애버린다. 그녀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린다는 말이다.

성매매도 노동이라고 주장하는 성매매여성들이 있다면, 그리고 노동권을 주장하며 싸우는 여성들이 있다면 '그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런데 성매매가 노동이라는 주장은 엉뚱한 데서-나를 포함해서- 나오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가 폐절되면 성매매로부터 해방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성매매가 노동이라는 주장의 위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실은 이렇다.

 

그런데 이렇게 고민이 헛도는 데에는 내가 성매매여성의 목소리로 말할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담론 속에서 '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성구매자, 성매매업주, 국가 등.

성매매특별법이 진일보했다고 평가되는 부분은 성구매자나 성매매업주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놓칠 수 없는 부분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를 통해, 국가는 예의바른 신사의 모습으로 가장한다. 엊그제까지, 아니 지금도 성매매를 조장하는 놈이 말이다. 여성의 빈곤과 노동권의 박탈, 인권 침해에 대해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놈이 말이다.

국가는 시혜의 미소를 가장하고 자활대책을 제공하는 배우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죄'에 대해 '죄값'을 치루는 배역을 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성매매가 사라지는 세상을 바란다. 힘이 닿는 만큼 함께 싸워야 한다. 어떻게 싸워야 할까를 고민하다 구경꾼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성매매특별법을 통해 성매매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들과 적극 연대해야 한다. 감옥 같은 보호시설이 아니라 이 사회의 소중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자활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원과 자활의 조건으로 탈성매매를 내걸 이유는 없다. 그것은 남성/국가의 조건이지, 우리의 조건이 아니다. 생존권을, 노동권을 요구하는 성매매여성이 있다면 그 역시 연대해야 한다. 누구보다도 성매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절실함이 그녀들에게 있을 것임을 믿는다. 그녀들의 요구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섣부른 동정이지는 않을까. 나는 누군가를 구출해내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이 시대를 함께 겪어내고 싶은 사람일 뿐.

 

성매매의 비범죄화가 필요한 듯하다. 그러면서 성구매자를 처벌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포기해야 하더라도 일단 비범죄화해야 하지 않을까. 성매매업주들의 횡포와 폭력, 인권/노동권 침해에 대해서는 계속 싸워야 한다. 성매매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들에게는, 그녀들이 악의 소굴에서 탈출하려고 하니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들이 지금까지 성매매업주와 국가에 의해서 짓밟혀왔기 때문에 '보상(적절한 단어는 아닌 듯하지만...)'받아야 하고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야 하기 때문에, 국가가 지원하고 자활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는, 주장이라기보다는, 메모... 여전히 땅에 발딛지 못한 느낌... 씁쓸함...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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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07 18:04 2004/11/0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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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쓰기

    2004/11/08 14:06

    * 이 글은 미류님의 [미로에서 헤어나기- 미로를 설계하기] 에 대한 트랙백, 이라기보다는 글을 쓰고 나서... 글쓰기를 할 때는 '글'을 쓰고 싶다. 심지어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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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lt6mm 2004/11/07 18: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번에 '권력관계를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기'를 읽을 때도 그랬는데, 이번 글도 읽으니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논쟁들을 따라가며 어지럽다 못해 머리가 아팠는데, ... 어쩌면 저의 문제는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만, 논리로만 생각했던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미류님 글을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마구 부끄러워지네요.

    고맙습니다. ^^

  2. rmlist 2004/11/07 19:0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고맙습니다. 어쩐지 부끄러워져요.

  3. siwa 2004/11/08 01: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전 사실 성매매가 노동이라는 걸
    머리로 증명하려는 (특히 남성들의) 주장을 대면할 때
    확 치밀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발성'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성매매 피해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나'의 실체를 느끼지 못하고,
    잃어버린 '나'의 흔적조차 희미해져 가는 상태에서
    고통과 슬픔에 무감각해져가는 한 사람.

  4. dalgun 2004/11/08 02:0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끄덕 끄덕 하고 갑니다.
    저도 다른분들이 말씀하신것 처럼 부끄러워요 ㅠ ㅠ

  5. jineeya 2004/11/08 12:4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잘 읽었어여.^___^

  6. 미류 2004/11/08 13:1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alt6mm// 부끄러워진다고 하시면 제가 너무 부끄러워지죠~ 어제 alt6mm님 글 읽고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답니다. 님이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며 고민하시는 모습 보면서 많이 배운답니다.
    rmlist// 장애여성의 성에 대한 고민들 많이 궁금해요. 알엠님의 따뜻함을 저는 쫓아가지 못할 것 같아 제가 부끄러워질 때가 많아요. 고맙다는 말은, 우리 진보네에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서로 만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구... ^^

  7. 미류 2004/11/08 13:2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siwa// 나두... 확 치밀어오르는 무언가... 하지만 '노동'이 반드시 '자발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 걸까... 그럴 수밖에 없더라도 나는 '자발적'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녀를 옹호할,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것...
    안식월이라면서? 잘 쉬다와. '나'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이 되기를 바람. 씩씩한 그대 기다림! ^^

  8. 미류 2004/11/08 13: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dalgun// 고마워요 ^^ 저 눈치 빠르죠? ㅋㅋ 아니, 뭐 그냥, 외롭고 웃긴 가게에 들러주셔서 고맙다구요~ 쨌든 부끄러워하지 마세욧! ^^
    jineeya// 웃어주시니 저도 마음이 편해지네요. ^^ 근데, 티켓 가격은 따로 없는 건가요? 홈페이지 가봐도 가격이 없길래, 그냥 자발적인 후원인 건가요? 덧글 남기려다가 다들 아는 건데 나만 모르나 싶어서 머뭇거리다가...에구, 그냥 물어볼 껄. 이거야말로 부끄럽넹 ~ ㅡ.ㅡ

  9. 달군 2004/11/08 14:4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것 같아요. 모든 여성/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성매매 여성의 삶역시 하나로 묶어 설명할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것을 자꾸 잊어 버려요. '내'입장 자존심 대의 들 때문에. 우스운거죠.
    사실 잘 들을수 있게 이야기 해주면. 아 그렇군요하게될텐데..
    마음에 조금 시원한 바람이 불어요. 부끄럽다는 말대신 고맙다는 말을 할걸 그랬어요.이제는 제가 할수 있는 말이아니라 일을 찾아볼래요.

  10. 미류 2004/11/08 16:4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달군// 머쩌요. 난 아직도 헤매는 것 같은데... 혹시 저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꼭 불러주세요. ^^

  11. 욘용 2004/11/09 01:3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내 이야기'를 하려고
    남의 뇌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히고
    수많은 장애물을 다 지나더라도 결국 낮은 담 하나는 꼭 남는 거 같애요.

    그래서 나도 남을 이해하기 힘들고 더더욱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너무 조심스러워요.
    성매매 여성, 노동자, 이라크 민중..
    조금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득해지는 '문제'들이에요.

    문득 이상은 노래 외롭고 웃긴 가게를 들어봐야겠단 생각도 했구요.
    하하 역시 술먹고 쓴 글은 앞뒤가 사라져서;;

  12. siwa 2004/11/09 03:4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흠흠. 정말 생각해야 할 고민의 폭과 깊이가 가득한 주제같아요.
    글에서든 사람에게서든 현장에서든
    배워야 될 게 참 많다는 걸 다시금 실감.
    언제 함 얼굴보구 생각나누죠^^

  13. 미류 2004/11/09 15: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욘용// 하하 역시 술 잘 드시는군.ㅋㅋ ㅡ.ㅡ 조심스럽게라두, 이야기를 꺼내야 만날 수 있겠지? ^^; 해장도 잘 챙기셔!
    siwa// 그러게... 언제 얼굴보여줄 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