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한국전쟁과 젠더

이임하 지음

서해문집

 

오래동안 책을 읽지 못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시작하자고 고른 책인데 매우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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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전쟁의 역사에서 여성은 왜 삭제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 이유가 여성을 불완전한 존재로, 즉 남성의 보조자로 각인시켜 영원히 타자로 머물게 하는 성 권력의 배치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을 글의 목적으로 한다. 특히, 가족질서와 사회질서가 와해되고 새로운 종류의 노동 가능성이 주어졌을 때 이것은 여성들을 위한 가능성의 시간은 아니었을까 라는 질문이 이 책의 연구과제가 된다.



 단지 찰나의 순간에 생사가 결정되는 전장의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의 생존은 보다 긴 시간 속에서 결정되었을 뿐 이라고 말하며 전후 사회에서 여성들의 경험을 탐구해 들어간다. 살람과 하이셈의 서울지역 증언대회에서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여성들의 삶 혹은 피해가 어떻냐는 질문이 나왔다. 당시 살람(아마도)은 자신이 잘 모르겠기도 하거니와 직접 전장에서 죽고 다치는 남성들에 대해서 더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변을 했다. (다소 당혹스러운 답변이었다.) 인용한 저자의 문장은 남성과 여성이 전쟁을 동일하게 겪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동시에 전쟁에 대한 인식 자체에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스펙타클로서의 전쟁과 그에 기반한 피해인식을 여성주의를 통해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이미지의 과잉이나 속도의 강렬함이 없어도 전쟁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전쟁과 여성 관련 담론의 주류였다고 볼 수 있는 전쟁 피해자로서의 여성 연구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전쟁이 특히 여성에게 더욱 많은 피해-주로 성범죄를 부각하는-를 입힌다, 는 담론 말이다. 이 책은 애써 그것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전쟁 중과 전후의 경제, 사회, 문화상의 변화를 거치며 여성들에게 어떤 억압이 어떤 방식으로 가해졌는지를 보여준다.

 

미망인(남편은 죽었으나 '아직 죽지 않은 부인')들이 남성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전장의 격렬함 못지 않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일했으며, 전장에서의 고통 못지 않은 힘겨움을 겼었고,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노동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2장의 내용이다.

3장은 여성노동의 영역, 즉 '여성스러운' 노동영역-가사노동의 연장이 자리잡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전후 여성들이 생존을 위한 노동, 성매매 를 시작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매매의 대가가 생존에 충분할 수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4장은 간통쌍벌죄의 제정과 적용 과정을 서술하면서 정조관념이 법제정논의과정에서 다시금 여성들을 옭아매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쌍벌죄의 적용을 통해 여성들이 가부장제 사회에 반기를 들며 미약하나마 연대의식을 형성하게 되는 과정이 이후에 다루어진다.

축첩과 낙태 역시 한국전쟁 이후 법제정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적 의제가 되는데 당시 여성들의 경험을 볼 수 있다.

5장은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웠던 사회가 안정화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상화되는지를 전쟁미망인, 성매매여성, 계, 노동현장에서의 여성, 자유부인 등을 소재로 풀어낸다.

(아, 이렇게 책을 요약할 생각은 없었는데 ㅡ.ㅡ;; 제대로 된 요약도 아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성매매, 간통쌍벌죄, 낙태에 대해 다룬 부분이다. 워낙 궁금했던 부분이라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그간 접해볼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비슷한 내용을 다룬 책으로,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이 있다. 일본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라 아쉬움이 있었는데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사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이중성, 성구매 남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매매여성의 신체가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과정 등은 비슷한 내용이다. 그래도 일차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낙태가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동시에 금지되는 상황, 그래서 여성의 건강이 더욱 위협받는 상황 역시 비슷하다. 어떻게 낙태 찬반논쟁을 넘어설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간통쌍벌죄 제정과정은 가부장들의 난감함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여성들의 외도를 통제하기는 해야 하는데 여성에게만 간통죄를 적용하기가 민망한 남성들이 어쩔 수 없이 쌍벌조항을 두어서라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거의 문제시되지 않았던 축첩문화 역시 혼인신고를 통해서만 부부관계가 인정되는 법제정 과정을 거치며 문제시된다.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추진되는 법제정과정이 한편으로는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제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사건들이 법정에서 다루어질 때는 방청석에서 여성들의 응원이 재판 진행을 어렵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대개의 재판결과들은 여성에게 노골적으로 정조를 강요하고 보호받을 만한 정조와 그렇지 않은 정조를 구분하는 등 여성들의 바램과는 무관하게 내려진다.

그러나 당시 변화상의 단면을 조각조각 보여준 것에 가까워 여전한 아쉬움은 남는다. 누군가 이 책에서 꺼낸 이야기들을 주워올려 하나하나 천착해보기를 기다릴 일이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은 여성사 혹은 여성운동사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여성운동단체들 중심일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넘어 조직되지 않은 여성들의 경험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또한 매우 방대한 일차자료들을 검토한 연구라 각종 신문기사나 정부발간물에서 인용되는 내용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훨씬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정말이지,  주옥같다. ^^;

 

여성들을 위한 가능성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은 났지만 그 가능성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꺾이고 만나면서 지금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아쉽고 궁금한 부분이지만 이 책에 아쉬워할 일은 아닌 듯하다.

 

* 축첩반대 궐기대회의 구호가 "여인의 정조가 아름다우면 사나이도 지켜라."였다는데 "여인의 정조가 아름다우면 사나이가 가져가라." 이랬다면 더 멋있었을 텐데 하는 나의 바람은 생뚱맞은 것일까. 

* 역시... 정리하다보니 책을 잘~ 읽지는 못한 듯하다.

 

* 책에 인용된 자료들 중 동아일보 지면을 통한 상담 문답 사례는 정말이지, 주옥같아서 몇 개만 옮긴다. (이건 여기까지 포스트를 읽은 블로거들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 )

 

- 최초의 간통쌍벌죄 고소사건(현순원이라는 여성이 남편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이후 한 여성이 묻는다. 남편이 어떤 처녀와 결혼해서 살다가 실직 후 같이 집으로 들어와 자신을 구박하는데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느냐, 이혼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등.

--> 간통죄가 구성되고 이혼청구를 할 수는 있는데 당신의 양식에 의거하여 삼가심이 좋을 줄로 압니다.

 

- 24세의 청년이 직장에서 전쟁미망인인 연상의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려는데 늙은 어머니가 반대한다.

--> 결혼을 하면 안되는 건 아니지만 좀 자연스럽지가 않다. 20세 되나마나한 순처녀를 구해 보시구료.

 

- 교사인데 기관장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다. 만사를 조용하게 묵살하여야겠습니까. 복수를 하여야겠읍니까.

--> 어리광은 당신의 부모 앞에서나 부리십시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라 짜증이 나다가도 우스워서 피식거리고 말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덜 노골적일 뿐, 여전한 논리들이라 화가 난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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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5 16:30 2005/01/0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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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뎡야핑 2005/01/06 01: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서비스 읽고 기분 나빠짐-_-;;;
    그러고보니 옛날엔 여성에 대한 강간등의 범죄의 보호법익이 '정조권'이라고 남편에게만 속할, 실제로는 남편의 지배권(?)이란 얘기를 들었었어요. 미친...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나중에 다시 쓸께요~~

  2. 미류 2005/01/06 10:4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맞아요. 근데 그게 바뀐 것도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예요. 게다가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남아있는 모습들 -_- 이번 '밀양사건'에서 '밀양 망신 다 시킨다'는 류의 발언들이나, 전쟁에서 적에 의한 성폭력에 분노하면서도 가족 안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 등에는 무심한 모습들...
    서비스였는데 기분 나빠졌다니 지워야 할라나? 그냥 웃고 넘기셈~ ^^;

  3. kuffs 2005/01/06 11:1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난 서비스 읽고 오싹해짐- -;; 피해자로서만 여성을 규정하는 시각을 벗어난 책이라니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그런데 서구사회에서 전쟁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책은 그렇다고 한다지만 내 생각에)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한국전쟁후에 남한땅에서 진보세력이 초토화된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북한도 여성에 억압적인 체제인 것을 보면 문화적 특수성으로 해석해야 하나...... 하여간 좀 더 고민해보아야겠군요.

  4. 미류 2005/01/06 12: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네. 웃고 넘길 일은 분명히 아니예요. 다만 조금씩 달라지는 것들을 느끼면서 그래도 희망을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블로거, 특히 여성 블로거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인용이 아니길 바라는데 무리한 욕심이었나. 갈등때림. 지금 안 지우면 못 지우는데 ㅡ.ㅡ;
    전 이 책 읽으면서 갑자기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가 떠올랐어요. 가능성을 읽는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물론, 가능성까지지만.

  5. 미류 2005/01/06 12: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리고 전쟁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는 건 다층적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노동권의 신장이나 봉건적 습속의 약화 등이 제시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억압체계로의 전화라고도 볼 수 있는 듯하거든요. 특히, 모성과 노동의 대립이나 여성노동 영역의 구획화 같은 것들은 더 정교해진 듯도 하고. 예전에 읽어볼 만한 글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읽게 되면 뻐꾸기님 고민한 얘기 들려주세요. 궁금해요~ ^^;

  6. 미류 2005/01/06 12:5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안 지우기로 했다. 보지 않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대신,
    뎡야, 웃고 넘기셈~ 은 취소예요. 웃고 싸우셈~ !!! ^^)//

  7. dalgun 2005/01/06 14:5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 책 저도 읽고 싶었는데. 다른 블로그에서 봤는데, 그때도 미류님이 인용하신 부분과 많이 겹치는 인용이 있었어요. 지금 다시 보니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 드는구만요.

  8. 미류 2005/01/08 17:0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달군, 읽어보세요. 같이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토론하면서 읽기에도 괜찮은 책~ ^^

  9. 뎡야 2005/01/09 01: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보호법익이 '정조'-> 정조의 의미는 '성적 명예'-> 여성의 명예는 남편-> 그러므로 남편은 강간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거네요 정말 무식작작한 내용이 아니라고 도저히 할 수 없네요~

  10. 미류 2005/01/09 15: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죠? 무식작작. 무식이 철철~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