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사용하기

아침부터 프린터가 말썽을 부렸다. 카트리지가 떨어졌다길래 새 카트리지로 바꿨다. 늘 하던 대로이지만 심호흡을 하고 설명서를 다시 확인한다. 거기 나와있는 대로 예의바르게 봉투를 뜯고 보호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딸깍' 소리가 나게 끼워넣었다. 시험인쇄를 하는데 인쇄가 잘 되지 않았다. 몇 번을 새로 시도해보고 인터넷 도움센터를 통해 뭐가 잘못됐는지 궁리해보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 해보라는 대로 이것저것을 해보고 결국 노즐이 막혔다는 결론에 이르러 인쇄를 할 수 있었다.



뚫어주고 구멍이 뚫려있으면 막아주고 부러져있으면 이어주고 붙어있으면 떼어주는 일은 그리 어려운 기술을 요하는 일이 아니다. 구멍난 양말을 꿰매거나 부러진 책상다리를 이어붙인다거나 하는 수준에서. 하지만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그런 '수준'을 넘어선다. 지금 두드리고 있는 키보드가 도대체 어떻게 화면에서 글자가 되어 나오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아무리 두드려도 글자가 나오지 않을 때 혹시 케이블이 빠져있는지 살피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씨~익 ^^ )

컴퓨터를 잘 다루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컴퓨터가 뭔가 말썽을 부리잖아? 제일 흔한 게 뭐때문인지 아냐? 여기저기 먼지가 쌓여서 그런 거야. 싹 닦아주면 금새 멀쩡해진다니까." 허무한 노릇이다. 복잡하고 심오해보이기만 하는 기계가 한낱 먼지 때문에 투정을 부리다니. 익숙하게 사용하던 기계가 갑자기 '생까기' 시작하면 그 난감함을 이루말할 수 없다.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게 될 것이면서 매번 이리저리 만지작거려보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지.

 

누군가, 인간에게 적정한 기술은 어떤 물건이 고장났을 때 스스로 그것을 수리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 있는 기술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녹색평론선집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분 동의하면서도 이미 그 범위를 벗어난 기술들에 너무나 익숙해져있는 나를 깨닫고 한숨만 내쉬었다. 적어도 자동차에는 손을 대지 말자는 생각에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있다. 그런 얘기를 인터넷에 주절주절 써대면서 말이다.

 

미국의 한 과학재단에서 과학,기술분야의 전문가들로 패널을 구성하여 지난 25년 동안 가장 혁신적인 기술적 발명 25개를 선정해보았다고 한다. 1위가 인터넷이다. 내 앞에 놓여있는 PC가 3위고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전화가 2위다. 아침마다 확인하는 이메일이 5위고 집에서 나올 때마다 집어드는 CD가 8위다.

원리의 반의 반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터넷이 안되면 넋놓고 기다릴 뿐이고 PC가 고장나면 울상을 짓고 휴대전화가 먹통이면 껐다켰다 하면서 달래본다. 보냈다는 이메일이 도착하지 않으면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며칠을 고민하고 CD가 읽히지 않으면 그냥 포기한다.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행복한 기술적 발명인 지는 모르겠다.

 

기술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가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오래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내던 친구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주소를 알게 되었다며 이메일을 보내올 때는 반갑고 울적할 때 듣는 Sosa의 노래는 까끌거리던 모래알들을 곱게 씻어내려준다. 빨래는 한참 밀려있고 집안 구석구석에 먼지가 앉기 시작할 때 가사노동을 알아서 척척 해줄 로봇을 상상하는 일은 마음을 들뜨게 한다. (벌써 beeper로 연락을 주고받던 '시대'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번거로운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아지는지. 청소기는 꼬박꼬박 필터를 갈아줘야 하고 컴퓨터는 오래 사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반가운 메일보다 스팸 메일이 훨씬 많이 날아오고 광고전화도 적지 않다. 자동차사고는 사망원인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지하철이 갑자기 멈추면 '문제가 있는데 안내방송으로 사과도 안한다'는 불평밖에는 던질 말이 없다.(물론 노동강도의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만 기술의 근본적 한계가 있으니)

 

기술문명이 고도화할수록 인간이 불행해질 것이라는 단선적인 예언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린다. 하지만 기술로부터 자유로울 수록 인간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기술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덜 사용하는 것뿐 아니라 잘 알고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알아야 할 게 너무 많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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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5 13:17 2005/03/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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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이 글은 미류님의 [잘 알고 사용하기] 에 관련된 글입니다. 기계를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보다도 쉽지 않다-_- (이 말에 나의 친구 과학소년은 코웃음을 치겠지.. 기계는 충분히

  2. 기계와 함께하는 삶.

    2005/03/16 00:59

    * 이 글은 미류님의 [잘 알고 사용하기] 에 관련된 글입니다. 읽고 공감했다.-_- 기계를 잘 알고 사용하는건 너무 어렵다.ㅠㅠ;; 그닥 기계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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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ivermi 2005/03/16 01: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새로운 기계만 나오면 열광하는 얼리어덥터나 IT메뚜기족들이 넘쳐나는 한국을 외국IT기업들이 주목하고 연구소도 짓는다는데...저는 휴대폰만드는 회사에서 2~3발 앞서는 기술땜에 가랭이 찢어졌었다는^^
    기술의 발전이 곧 인간의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건 확실한 거 같아요~솔직히 적응 안돼. 적응이..ㅠ_ㅠ

  2. 미류 2005/03/16 11:1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갱이 올려주는 글들 보면서 그런 생각 많이 들어요. 기술이 발전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게 하는 것들이 참 많다는... 그러니~ 적응하지 마세용~ ^^;;

  3. 붉은사랑 2005/03/16 17: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알아야 할게 많은게 싫엇! 나는야 게으른 사람^^

  4. 미류 2005/03/16 17: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두 ^^ 그래서 나는 되도록 안 쓰는 방향을~ ㅋㅋ

  5. jaya 2005/03/16 17: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난 잘 아는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야지

  6. 슈아 2005/03/17 12:0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게 정말 힘들어요. 새로운 카메라, 새로운 편집기술이 나오면 사실 전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문제가 없는 한 바꾸고 싶지 않은데...그래도 뭔가 새로워진 것들을 볼때는 갈등이 생기고.....정말 적응하기 힘들어요.

  7. 미류 2005/03/17 16:5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자야, 훌륭한 결론이야~ ^^;;

    슈아, 그래도 슈아는 감독이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