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0만원.

자살을 목적으로 농약을 먹은 환자가 응급처치를 거부하여 사망한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병원측이 유족에게 99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응급환자의 경우에는 의사의 의료행위 중지가 환자의 생사를 결정하므로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는 의사의 생명보호의 의무가 앞선다는 것이 이유다. 즉, 결박을 해서라도 위세척 등의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 달 간의 응급실 근무 동안 자살을 기도하여 내원한 사람들을 적지않게 봐왔지만 응급처치를 극렬히 거부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순순히 위세척에 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적극적인 거부에서부터 체념적인 거부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죽고 싶었던 마당에 목구멍으로 손가락만한 굵기의 관이 들어가 물을 부어대는 응급처치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점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정도로 강렬하게 응급처치를 거부하는 환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놀라운 것은 응급상황에서 환자의 거부의지를 따른 의사다.

 

쉬운 말은 아니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다운 삶을 향유할 권리뿐만 아니라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삶을 마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하는 편이고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요즘처럼 '사회적 자살'이 문제가 되는 시기에 모든 자살을 그런 권리의 실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자살을 부재 혹은 결핍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응급실이라는 공간에서 자살을 맞닥뜨렸던 경험을 돌아보면 나는 한번도 환자의 의지나 권리의 문제를 고민해보지 못했다. 자살을 시도한 방법에 따라서 다를 만도 하지만-굳이 응급처치를 하지 않아도 죽을 수 없는 방법에서부터 응급처치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방법까지- 일단 달려가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사실, 결박을 하고 위세척을 했던 적도 있다. -_-; 죽음이 멀리 있는 동안은 '우아한' 생각을 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이 눈 앞에 닥치면 생각이란 것은 냉동실에 있는지 없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5년 전에 다져놓은 마늘 같은 게 된다.

 

그 의사가 환자의 자기결정권이나 죽음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어 응급처치를 하지 않은 것인지, 사흘째 밤새고 눈 좀 붙이려는데 응급실에서 고함을 쳐대는 환자를 무시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환자가 먹은 농약의 특성상 응급처치가 무의미하다는 의학적 판단을 했을런지도 모른다.

 

다만,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그 결과에 있어서 환자를 대표하는 유족의 손을 들어준 외양을 취하지만 실제 의미에서는 의사, 정확히 말하면 병원의 손을 들어준 판결에 가깝다. 응급상황이라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천천히 죽어야만 죽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의사의 생명보호 의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고민이기는 하다. 선의와 범죄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결국 사회의 몫일 텐데 여전히 '우아한' 이 순간에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판결들을 기대하게 된다.

 

***

덧붙이자면, 이번 판결은 자기모순적인 측면이 있다. 현재 건강보험은 자살로 인한 사고에 대해서는 급여를 제공하지 않는다. 즉, 공적인 재정을 들여 치료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경우라고 판단하고 있다. 어쩌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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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6 22:41 2005/03/1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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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뜬금없지만,

    2005/03/17 14:04

    * 이 글은 미류님의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에 관련된 글입니다. 갑자기 생각나는 에피소드. 2000년 의사파업때, 난생처음 '반(反) 파업세력'이 되어 병원에 남아 이리구르고 저리구르

  2. 죽음을 선택할 권리?

    2005/03/19 13:02

    * 이 글은 미류님의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에 관련된 글입니다. http://news.media.daum.net/foreign/america/200501/25/khan/v8237332.html 안락사 논란 기사를 가져왔다. 개인적으로 죽을 권리를 인정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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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다소녀 2005/03/16 23:4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그 결과에 있어서 환자를 대표하는 유족의 손을 들어준 외양을 취하지만 실제 의미에서는 의사, 정확히 말하면 병원의 손을 들어준 판결에 가깝다.=> 조금 햇갈려요. ^^;;

  2. 슈아 2005/03/17 12:1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와 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생명에 대한 자유의지....근데요. 자꾸 "5년 전에 다져놓은 마늘"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가요...--;;

  3. 붉은사랑 2005/03/17 15:4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슈아, 컥 나도 그 대목에 마음이 갔지만, 뻘할것 같아서 말 안하려고 했는데...하필 왜 5년전 다져놓은?

  4. 미류 2005/03/17 16: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바다소녀, 저도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싶어요. 하지만 어쨌든 이번 판결은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 의사의 생명보호의무가 앞선다"는 것을 명시한 판결이거든요. 심지어 환자가 살고싶지만 경제적 이유 등의 문제로 치료를 포기한 것도 아니고 자살한 경우인데 말이죠. 의사의 생명보호의무에서 '생명'은 결국 환자에게 속한 것이잖아요. 상황에 따라서 판결을 달리할 수밖에 없겠지만 환자가 원하지 않는 치료행위를 얼마나 강요 혹은 강제할 수 있는지와 관련된 문제이니... 처음 기사를 읽었을 때는 의사의 권력을 강화하는 판결이라고

  5. 미류 2005/03/17 16:5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생각했어요. 그리고 의사 개인이라기보다는 의료가 서비스의 형태로 전달되는 공간인 병원이 궁극적인 책임주체라는 점은 권력의 궁극적인 주체도 병원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바다소녀가 보기에는 어떤지도 얘기해주세요~ ^^;;

    슈아, 붉은 사랑, 그런 걸 물어보면 제가 너무 난감하잖아요~ ^^;; 그냥 갑자기 그 생각이 났어요. 집에서 밥을 제대로 안해먹은지 꽤 돼서 그런 것들이 냉동실 어딘가에 있기는 있을 텐데 있기나 한지, 뭐 그런... -_-;

  6. 바다소녀 2005/03/18 11:4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 /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왜 병원의 손을 들어 줬다는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환자의 결정권을 존중해준 의사가 왜 문제 인거지?라고 봤기에 의사의 편을 들어 준건 아닌 줄 알았죠.. 같은 상황에 대해 다르게 받아들였군요. 그러고 보니 저는 환자의 입장으로 해석을 한건 아니로군요.

  7. 바다소녀 2005/03/18 11:4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전 이미 환자를 배재시키고 생각한 거지요.
    자주 느끼는 저의 한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