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고집

이전 홈페이지에 사소한 고집과 무거운 욕심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사소한 고집이라는 것이 지문날인을 하지 않고 주민증을 쓰지 않는 것이다. 주민등록증(고등학교 다닐 때 동사무소에서 엄지손가락 지문 꾸욱 눌러 찍어 만든)을 만든지 1년도 채 안돼 잃어버린 후 재발급도 받지 않고 지냈으니 주민증이라는 물건이 생소하기는 하다. 전자주민카드를 만든다 어쩐다 하면서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오고 집에 메모를 붙이고 급기야 고향집에까지 전화를 해서 주민증 만들러 오라고 부모님까지 동원하였으나 아직까지 만들지 않고 있다.



운전면허증은 자동차에 욕심이 생길까봐 아예 딸 생각을 안해봤고 여권은 외국을 가볼 기회가 없어서 만들어보지 못했다.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있었을 지는 불투명하지만.

 

그래서 투표를 하거나 은행거래를 할 때 들고다녔던 것이 의사면허증이다. 어렸을 적 받아본 개근상장처럼 생긴 면허증은 국가기관(보건복지부)에서 발급한 것이고 사진이 포함되어 있으며 주민등록번호가 기재되어 있어 사용가능한 증명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생긴 것도 그렇거니와 들고다니면서 내밀기가 머쓱하기는 하다. 생체정보에 대한 국가기관의 과도한 수집이나 주민등록번호를 모든 국민에게 부여하여 확인하려는 의도에 불만은 있지만 심각한, 혹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불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기에 사소한 고집이다.

 

그래서인지 의사면허증으로 금융거래를 요청하려고 하면 먼저 긴장부터 되는 것이 사실이다. 주민증이야 지문날인을 거부한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텐데 운전면허증이 없는 것까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낯선 신분증이니만큼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난감하기는 할텐데 당신이 수고스러워야 하는 이유까지를 납득시킬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지문날인을 해야 하거나 좀더 수고스러워야 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긴장하다보면 괜히 말을 하다가도 목소리가 뻣뻣해지기 십상이고 은행직원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강경한 어조로 말을 하게 된다. 뭔가 캥기는 데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별 탈없이 은행거래를 마치고 나오다보면 그렇게까지 경직되곤 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그건 내미는 신분증이 '의사'면허증이라는 점에서 증폭되기도 한다. 나로서는, 사용가능한 유일한 신분증이 그것이지만 스스로도 괜히 유세 떠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운 것이다. 그건 다른 상황에서도 느끼게 되곤 한다. 이를테면, 그럴 듯한 자리에 앉아있는 중년의 남성에게 굳이 공손하고 싶지 않아 통상적인 '예'를 갖추지 않을 때면 그게 위계에 대한 반항인지, 의사라고 시건방진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까 먼저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신고 다니지 말라는 색동양말이나 꽃무늬양말, 발목까지 높이 올라오는 단화 같은 것을 기어코 신고 다니면 공부 좀 한다고 제멋대로인 학생밖에 안되는 것 같아 난감했던 기억.

 

그래도 나름대로 금융거래를 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는데 지난달 자동이체 신청 등을 하려고 은행에 갔더니 작년에 새로 지침이 내려와서 못해주겠다 한다. 지침이라고 내려온 소책자를 달라고 해서 확인까지 했는데 분명히 이전에 있었던 조항들이 바뀌었다. 갑자기 막막해지면서 확 지문날인을 해버릴까 싶다가도 사소한 고집이라서 그런지 오기가 생겨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었다. 이전에 지문날인반대연대에서 민원을 넣은 적이 있어서 일단 해보기로 했다. 인터넷에 민원내용을 입력하는 순간까지도 괜히 혼자 뻣뻣해져서 어떻게 이 부당함을 강조할 수 있을 지 궁리하면서 써넣었다. 일주일, 아니 열흘쯤 걸려서 회신이 왔다. 그 며칠 전에 전화도 왔었다. 은행 본점으로 연락을 했으니 거래가 가능할 것이라는 통지.

 

주민증 없어요? 네, 지문날인을 거부해서 주민증을 안 만들었어요.

운전면허증이나 여권도 없어요? 네, 이것밖에 없어요.

 

이 말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이제 조금 편한 마음으로 말해보려고 한다. 운전면허증이나 여권이 누구에게나 있을 만한 신분증이라는 가정이 얼토당토 않은 것이니 말이다. 사소한 고집이지만 무시당할 만한 고집은 아니라는 것.

(그래도 대신할 만한 신분증이 의사면허증밖에 없는 이상, 불편함이 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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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4 09:50 2005/03/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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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i 2005/03/24 13:0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님, 이 글 이번주에 발송되는 지문날인 반대연대 소식지에 칼럼으로 실어도 될까요??? 꼭 답변 좀 주시길...

  2. 미류 2005/03/24 15:1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네... 그냥 쓴 글인데 칼럼으로 실을 만한 건지 모르겠네요. 혹시 원하시는 글의 방향이나 수정할 만한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다시 퇴고해서 드릴께요. 지문날인 반대연대 활동에 도움이 된다면 저야 반갑죠~ ^^
    근데 소식지는 메일로 발송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도 메일링에 넣어주세요.(이전에 메일링 리스트 신청했는데 메일이 안 온지 몇 년 된 것 같아요. -_-; ) 이거 보시면 덧글 남겨주세요. 메일 주소 지우려구요. ^^

  3. 붉은사랑 2005/03/24 21:1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크헉! 의사면허증이라..그거 참 여러모로 쓰이는구만. 큭! 색동양말 생각난다..지금 봐도 이쁜 것 같아. ^^

  4. NeoScrum 2005/03/24 22: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는 4년전쯤? 급하게 대출받을 일이 생겨서 급하게 주민등록증을 만들고는..... 그 다음부터 미안해서 지문날인 반대연대 회의에 못 나가기 시작했었지요. 흐.... 전 신분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쩝쩝..

  5. 슈아 2005/03/25 00:0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자기검열자기검열...미류도 만만치않군요. ^^

  6. 레니 2005/03/25 01: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런. 아무 생각없이 룰루랄라-_- 주민등록증 만들었던 기억이-_- 뭔가 부끄러워지는군요. :) 하지만 면허증과 여권은 저도 없답니다! (근데 이건 구차니즘 때문이기도 하고...)

  7. hi 2005/03/25 02:4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핫~! 감사합니다. 메일링리스트(idlaw)에 등록하도록 하겠습니다. 퇴고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워낙 깔끔한 글이라서요~~ *^^*

  8. 미류 2005/03/25 11: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붉은사랑, 그거 은행거래할 때밖에 안 써. 큭! 난 지금도 색동양말 좋아해~ ㅎㅎ

    네오, 저도 대신할 만한 신분증이 있어서 안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는 학생증, 졸업하고서는 면허증... 근데 회의 못 나갈 것까지야~ ^^;;

    슈아, 그렇게 보이죠? 저도 이 불편한 느낌이 반성이나 성찰이기보다는 소모적인 감정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어요. -_-;

    레니, 그냥 사소한 고집이라니까요~ 부끄러울 필요 없잖아요. ^^;

    행인, 소식지 잘 받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9. 자일리톨 2005/03/28 19: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크헉... 저도 고등학생때 룰루랄라 동사무소 가서 손가락 꾸욱 눌러찍고 주민등록증 만들고, 시간 날 때 따야 한다며 없는 돈 털어서 몇번 떨어진 끝에 운전면허증 만들고, 게다가 외국에 한번 나가볼 마음에 돈들여 여권까정 만들었으니...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요... -_-;;;

  10. 미류 2005/03/30 14:0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자일, 누가 죄송한 거예요? 못된 나라가 자일에게 미안해해야죠~ ^^

  11. 감비 2005/04/01 09:4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허걱...오랫동안 잘버텼는데, 네오의 경우처럼 대출 한건 해결하기 위해서 재작년에 소신을 저버린 감비, 서랍 속에 처박힌 약사면허증을 꺼낼 생각은 미처 못했슴다. 한 수 배웠어요-^.^

  12. 미류 2005/04/01 13: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감비 글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
    (근데 약사였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