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해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읽을 수 있다거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사람의 얼굴을 보면 나름 이런저런 짐작들을 해보게도 되고 때로는 이런 것이 편견이 되지는 않을까 저어되거나 맹목적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역시나 사람의 얼굴에는 그/녀의 삶이 담겨있다.



이번에는 돈의동에 사시는 분을 찾아뵜다. 돈의동은 피카디리극장과 탑골공원의 뒷쪽에 있는, 규모가 작은 편의 쪽방지역이다. 영등포나 서울역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오래된 쪽방지역 중의 하나다. 600-700명 정도가 쪽방에서 살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돈의동에서 만났던 분은 오래동안 쪽방에서 살아온 분이었다. 그만큼 얼굴에는 시간의 깊이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다들 그렇지 않나.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나물을 파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이른 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에서 신산하고 고단한 삶의 흔적을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웃음마저도 모질거나 억센.

 

그런데 돈의동에서 만난 그 분, 인터뷰를 하는 동안 세번쯤 웃으셨다. 그 웃음을 보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웃으셨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은 아니다. 웃음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너그러움에, 부끄럽게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웃음마저 허무하길 바랐던 것일까. 사실, 웃음에도 다양한 질감이 있는데 그 분의 웃음은 내가 지금까지 아름답다고 느꼈던 몇 안되는 웃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간의 두께가 허투로 쌓이지 않은, 여운이 있는 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지금 사시는 방을 잠깐 가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조용히 고개를 저은 후 한참을 멍하니 서있으시다가 입을 겨우 떼셨다. "비참해서..."

 

그 비참함 속에서도 그런 웃음이 자리잡을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그만 나는 놀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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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9 16:05 2005/05/0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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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끄러움

    2005/05/11 13:34

    * 미류님의 [비참해서...] 에 관련된 글. 노숙자 상담과 관련해서 몇달전에 들은 이야기다. 노숙자 생활을 하던 한 할아버지가 수급권을 얻어 쪽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할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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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njang_gongjang 2005/05/09 21: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분들의 삶보다는 그분들의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의 그늘이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하는 글이네요.
    누가 말을 걸어도 반갑겠지요. 그분들에게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 고마움이 아니었을까? 상상만 해봅니다.

  2. 미류 2005/05/09 22: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음, 고마움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적어도 제 느낌은, 그런 것과는 다른... 저희가 딱히 고마웠을 리도 없어보이고...외로움이 없지야 않겠지만 누가 말을 걸어도 반가워하지는 않으신답니다. 음, 어려워요...

  3. jseayoung 2005/05/11 17: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비참함 속에 아름다운 웃음.... 어제, 가난한 여성 가장들과 함께 생활하는 활동가를 만났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 비참함 속에서도 그 분들은 살아가고 계시다"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4. 미류 2005/05/13 09: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게 쉽지 않네요. 많이 배워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