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AIDS 감염인 인권증언 <말할 게 있 수다!>의 무대 뒤 플랭카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염인단체 활동가인 J가 건넨 문구였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감염인단체를 꾸려오면서 증언대회를 준비하는 지금에 대한 그의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고백이었다.
감염인들과 함께 증언대회를 준비하면서 무대를 어떻게 만들지, 언론을 어떻게 통제할지에 대해서도 함께 결정했다. 증언대회가 2주 정도 남았을 즈음의 회의에서 우리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무대에 커튼을 치고 음성변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시작된 회의의 끝에서 감염인들은, 적어도 증언대회에 오는 사람들과는 직접 눈을 마주치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래, 우리는 여기까지 왔어.
증언대회를 마치면서 나는 객석에 앉아있던 감염인들도 크게 감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1년 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자리가, 이제서야, 잔잔하지만 강렬하게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으므로.
뒷풀이를 하다가 옆에 앉은 증언자에게 전화가 왔다. 먼저 집으로 간 Y였다. "어머, Y가 계속 울기만 하고 말을 안 하네. 뉴스에서 우리 보고 계속 눈물이 난대." 나는 Y가 으레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증언자로 나선 이들에 대한 걱정과 자랑스러움이 뒤범벅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며칠전 증언대회 준비모임 평가가 있었다. 준비를 함께 했던 대부분의 감염인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자리였고 Y는 멀리서 서울까지 왔다. 예상했던 것 이상의 평가를 들었다. 그/녀들은 이미 '내일'을 위한 계획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Y는 그날 흘렸던 눈물의 자초지정을 들려주었다.
집에 들어가서 뉴스를 보는데, 세상에, 9시뉴스에 **가 나온 거야. 어머, **네. 헉, **도 나왔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입에서 나온 거야. 엄마가 나더러 아는 사람들이냐구 물어서 내가 화들짝 놀라, 아니, 내가 저 사람들을 어떻게 알어? 그러구 방으로 들어왔는데 끝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살인자, 그니까 우리가 살인자도 아닌데 모자이크 처리하구 음성변조하고 저럴 수밖에 없나, 그런 생각이 들은 거지. 근데 정작 나는 또 아는 척 할 수가 없잖아. 그르니까 마음은 복잡하고 혼자서 소주병 들고 잠들 때까지 울었다니까.
정작 화들짝 놀란 것은 나였다. 나는 방송에 모자이크 처리되는 것에 대해 한번도 안타까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혼자 만족하면서 '내일'로 가는 길을 보지 않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맴맴. 그리고 아직 '활동가는 아닌' 감염인들 역시 그럴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활동가는 아닐'지도 모르나 이미 에이즈인권운동의 길을 걸어왔고 나보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그/녀들의 존재가 그 길이고 '활동가'인 나는 그 길을 쫓아가고 있었을 뿐임을....
우리는 여기까지 왔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레이 2006/09/28 16: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마지막 단락에서 뭔지 설명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뭔가가 울컥.
미류 2006/09/28 18:1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레이가 이미 아는 무언가이지 않을까~ ^^
달팽 2006/09/29 16:1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가 아름다워보여~~
미류 2006/09/30 12:4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권? 와, 블로그 쓰는구나. 방가방가.
내가 쫌 아름답지~ 아름다워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구!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