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에이즈의 날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풍경 하나. 에이즈인권운동가들은 감염인 당사자의 발언 순서도 없는 기념식을 비판하며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발언을 마치고 나가는 관료들을 쫓아나갔다. 바로 그때 기념식을 주관한 관변단체와 관련된 감염인 한 명이 항의서한을 직접 가로채 구기면서 던진 말. “감염인당사자도 아닌 당신들이 왜 나서는 겁니까?”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이전 사무실에서는 불가능했던 휠체어장애인 접근을 실현하기 위해 이동경사로를 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실제로 접근이 수월한지에 대해 자문을 해주기 위해 방문한 장애인활동가는 “집앞까지 오는 오르막길에서 이미 접근이 불가능한 수준”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사무실 맞은편 은행입구에 설치된 휠체어용 경사로를 보며 “모양만 경사로지, 휠체어가 오르기도 어려운 저런 각도는 생색내기일 뿐”이라고 ‘씹어줬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은 ‘씹혀도’ 할 말이 없다.

 

'HIV/AIDS와 인권에 대한 국제 가이드라인‘은 에이즈와 관련된 정책의 광범위한 영역에 당사자와, 에이즈 취약계층의 참여를 강조한다. 그리고 호주의 ’국가 HIV/AIDS 전략‘은 감염인 당사자가 중심에 있어야 할 이유(centrality)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염인들의) 참여는, 정책과 프로그램이 그/녀들의 경험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그/녀들의 필요에 반응하며 정책방향이 개인과 지역사회에 미칠 영향의 모든 범위를 적절히 고려하도록 하기 때문에, 정책반응이 효과적이기 위해 필수적이다. … 이러한 인식은 의미있고 유용한 메시지를 만들어가는 데에 결정적이다. …”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비례대표 1순위로 장향숙 의원을 세웠을 때 장애인운동이 한결같이 환호하지는 않았고 한 여성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논쟁은 대상을 달리하며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개개인은 수많은 정체성들이 가로지르며 만들어진 점과 같다.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들은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사회구조 속에서 더욱 다양한 입장을 만들어낸다. ‘여성’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는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한 표를 던지는 것이 어렵고 장애인이 국회에 진출한다고 한국의 장애인정책에 대한 기대가 갑자기 높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감염인이 에이즈운동가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요구하는 목소리에 선뜻 고개가 숙여지지는 않는다.

 

혹자는 당사자주의를 소수자 운동의 ‘환상의 논리’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당사자가 과연 누구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기 힘들뿐더러 집단의 정체성으로 나아가면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당사자주의가 특정집단에 ‘당사자성’이라는 권위를 부여하면서 오히려 문제의 사회성을 은폐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소수자의 인권문제는 결국 그/녀들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인 듯 말하며 우리 자신을 ‘비당사자’로 여기게 하는 환상과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사자’라는 말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인권의 실현을 위한 원칙으로서의 당사자중심성을 쉽게 놓칠 수 없기에 그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을 게을리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며 “어떤 종류의 구별도 없이, 세계인권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데에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차이도 그 자체 실체로 여겨져야 한다. 평등은 동일시가 아니라 차이의 온전한 발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당사자중심성은 특정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는 구조가 바로 보편적 인권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구조이기 때문에 다시 우리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당사자의 목소리’는 당사자 개개인의 목소리의 총합과는 다를 것이다. ‘당사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복잡하게 얽힌 사회구조와 정체성에 대한 분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당사자중심성은 흔한 민원전화와 다를 바 없어질 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회구조에서 무엇이 ‘당사자’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어떻게 ‘당사자’의 인권이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 발언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동짓날 열릴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를 준비하는 노숙당사자모임이 쉼터를 요구하는지, 노동권과 주거권의 보장을 요구하는지 귀기울여보시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배움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그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당사자’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자리를 빌어 에이즈의 날 기념식장에 갔던 활동가들이 모두 보고싶어 했던 윤가브리엘의 치료비 마련을 위한 후원을 부탁드린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jinbo.net/Aspeople에서 볼 수 있다.

 

[인권오름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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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14:16 2006/12/1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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