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이 있었다, 는 얘기를 들었다. 같이 있어야 하는 자리였는데...

 

세계에이즈의 날 기념식이 삼성동 코스모타워에서 열렸다. 차별과 편견을 넘어, 라는 슬로건을 달고. 각종 축사로 이어지는 1부 순서에, 정작 중요한 감염인 발언은 없었다. 축하할 일이 없는 줄 알고 뺀 건가. 쳇.

 

HIV/AIDS 감염인 인권주간 Positive Rights 준비위원회에서는 감염인 발언순서를 요구하는 공문을 질병관리본부와 행사주관단체인 에이즈예방협회로 보냈다. 며칠 후 돌아온 답변은, 오래 전부터 준비한 거라 바꿀 수 없다,는 몇 마디였다. 발언 하나 더 들어갈 때마다 워~낙 애쓰시나보다.

 

공식적인 발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비공식적으로라도(?)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자고, 코스모타워로 갔다. 에이즈확산의 주범은 사회적 차별과 FTA이고 차별과 편견을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이즈예방법의 전면 개정과 한미FTA 중단이라는 우리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행사장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우리가 기념 따위를 하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는 걸 알았나. 알았다고 하더라도 막아서 문제가 해결될 꺼라고 생각했나.

 

행사장에 들어갔을 때 이미 1부 행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화나는 건 예정에 없던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의 발언순서가 끼어있었다는 거다. 미국의 에이즈정책을 자랑하다가 내려갔다. 빌어먹을 순결 따위로 에이즈를 어쩌겠다는 건지. 콘돔이나 뿌려대면서 정작 필요한 의약품은 먹지 못하게 하는, 배울 것도 없는 그따위 발언은 예정에 없다가도 생길 수 있고 감염인 발언은 예정에 없어서 안되겠다?

 

보건복지부 차관의 발언에 이어 우리 얘기를 하려고 일어섰는데... 그게 1부 마지막 순서였다. 2부로 이어지면서 레이저쇼가 시작되고 -돈 쳐바른 행사는 일단 싫다.

주요 관계자들이 모두 자리를 뜨는 분위기가 되자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다시 행사장 밖으로 나왔고 보건복지부 차관에게 가려던 중.

 

한 감염인이 우리를 막았고 심지어 우리가 들고있던 항의서한을 가로채 찢어버렸다. 감염인 당사자도 아닌 당신들이 왜 나서냐고...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도 어쩔 수 없이, 우리랑 같이 있었던 감염인은 없었냐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 움추러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 얘기 블로그에 쓰는 것도 망설여진다. 막연한, 어떤 부끄러움.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일정 때문에 길게 통화를 할 수가 없었고 저녁에서야 다시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울먹이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고 결국 꺼억꺼억 우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다시 몇 시간 후 여전히 울고 있는 친구들의 전화를 받았고 또 몇 시간 후, 그렇게 밤을 새워 마음을 다독이는 친구들의 전화를 받았다.

 

일정이 겹쳐 같이 있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미안하고 속상했다. 하지만 나 역시 억울하고 속상하고 부끄럽고 화나고 치욕스럽고 자괴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항의서한을 찢은 그가 에이즈예방협회에서 일하는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우리를 막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실이 되는 순간 다른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잠시 '길 잃은 어린 양'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잘 걸어왔는데 길을 잘 찾아온 것 같은데 갑자기 뒤는 깜깜해지고 앞은 희뿌옇게 된 것 같은 느낌. 이런 상황에 대고 '당사자주의'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것조차 공허한 느낌.

 

그래도 나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잘해서 이런 상황을 맞게 된 거라고. 그만큼 에이즈운동이 성장했기 때문에, 숨어있던 대립과 갈등이 나타날 수 있었던 거라고. 감염인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관변단체밖에 없던 상황에서 다른 공간을 열어낸 한 해였다고. 정립회관투쟁할 때 장애인들이 장애인들과 싸웠고 두발자전거 스쿨어택할 때 학생들이 왜 남의 학교 와서 이러냐고 항의했다고.

 

장애인이라서, 학생이라서, 감염인이라서 모두 똑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다. 그건 내가 고향이 제주도라서, 내가 여성이라서 그/녀들과 같은 입장을 취할 것이라는 통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억압이 다층적인 만큼 '억압받는 소수자'라는 관념 너머의 현실 역시 다층적일 수밖에 없다.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은 하나가 아닐 뿐더러 그 각각은 수많은 가능성들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단순하지가 않아, 나에게는 수많은 선택지들이 존재하고,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지 않거나 못한다고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테고 지금 함께 있는 이들이 영원히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단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는 단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다.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수많은 공동체, 어디에서도 '권력'은 만들어질 수 없는 유동체가 아닐까.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길에서 아무리 '당사자'라도 우리는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서로 미끄러지고 어긋날 때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 발목잡히지 말고 차라리 싸워야 할 때가 아닐까.

 

우리 계속 가던 길 열심히 걸어가요. 모두들 힘내요.

 

그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감염인에 의해 제지당했던 감염인 활동가의 마음을 감히 내가 다독일 수 있을까, 감히 위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는 못하는...

 

가브리엘이 보고싶어지는... 보고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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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2 13:23 2006/12/0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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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위 2006/12/04 14: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 발목잡히지 말고'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가끔 오긴 하는데 덧글은 간만에 남기네요. 어줍잖게 '힘내라'는 류의 말밖에 할 수 없는 제자신이 초라해서리... 그래도 힘내세요! 지치면 좀 절룩거리던가^^

  2. 디디 2006/12/04 16: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음..음음.. -ㅅ-);; 맞아요. 우리에게 붙은 이름으로, 정체성이 모아지지 않는다는 게 다행일지도. 아무튼 모두들 힘껏 걸어가요^^

  3. 2006/12/04 20: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난 언제나 든든해.

  4. 안티고네 2006/12/05 12: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잘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공감이 가는(특히나 정체성 이야기는,)....끄덕끄덕

  5. 미류 2006/12/05 13:5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무위, 힘내라는 말로도 서로 힘받으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언제든 환영~ ^^

    디디, 다행, 맞아, 다행일지도. 디디도 힘껏~ 아싸~ ^^

    돕, 호호, 나도 똑같은 얘기 하고 싶은 거 알지? ^^

    안티고네, 나도 자리에 없어서... 그래도 나눠지는 것들이 있나봐요. 안티고네도~ ^^

  6. 곰탱이 2006/12/08 17: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안녕하세요^^. 뭐 좀 부탁 드릴 게 있는데, 메일 주소 좀 알려 주세요*^^*...

  7. 미류 2006/12/08 20:3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phyting 골뱅이 파란 닷 컴 이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