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글로 기록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적어내라는 숙제를 받고 한동안 멍했다. 글쓰기와 저널리즘이라는 강좌를 신청하면서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쩌면 써내리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쩌면 굳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없어서, 하지만 나름 적지 않은 글을 써왔고 쓰고 있는 나.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블로그에 쓰려고 메모만 해뒀다가 쓰지 못한 글들이 꽤 많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내 안에 들어와 마구마구 번져나가기 시작한 이야기들, 넘쳐흘러서 주워담지 못하게 되기 전에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내게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런 이야기들은 하나도 글로 남기지 못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져도 글 하나 쓸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단지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개인 블로그에 글쓰는 일을 아주 어려워하게 됐다. 불편함. 누가 눈치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앞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불편했다. 그렇게 글쓰기가 멀어져갔다. 집에서는 절대 컴퓨터를 켜지 않는다는 다짐과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는 조건이 맞물려 나는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적어졌다. 그래서, 나는 왜 나를 들여다보기 어려워하게 됐나, 가 글로 기록하고 싶은 첫번째 이야기.

 

그렇다고 대단한 글들을 쓰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문득' 시작된 것들은 이유없이 들어오기 때문에 더욱 오래 남는다. 나는 알람을 맞출 때 00분, 30분, 15분과 같은 단위들을 쓰지 않는다. '문득'. 37분, 49분, 03분,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숫자들을 피해다니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얘기를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구?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참 재미난 놀이를 하나 알게 된 것 같은데 그게 다른 사람에게도 재밌는 놀이가 될까, 그냥 좀 튀는 것 혹은 삐딱한 것 쓸데없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묻어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유없이 들어온 것들은 이유를 얻고서야 나간다. 아날로그 시계로 알람을 맞출 때는 시계바늘을 직접 돌린다. 30분쯤에 맞추면 그게 29분 37초일지, 31분 56초일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게다가 인공위성에서 시간을 쏘아준다는 핸드폰 시간에 비하면 그 29분조차 28분인지 33분인지, 어차피 무슨 상관이람. 디지탈과 아날로그가 빚어내는 어긋남의 재미. 뭐 이런 '이유'들을 찾아줘서 안을 비우기, 가 또 하나의 욕심이다.

 

한 번 들어와서 모양을 달리하며 맴도는 이야기들도 있다. 올해 1월부터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새벽에 수련하는 이들은 보통 두세 명이고 그 안에서 여성으로서의 불편함은 별로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승급심사를 받기 위해 저녁 시간에 유도관을 가게 됐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대여섯 명의 남성들이 모두 상체를 날 것으로 드러낸 채 배밀기(팔굽혀펴기 같은 거)를 하고 있었다. 순간 문을 밀던 손이 머쓱해지면서 돌아나왔다. 심사를 받아야 하니,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시 들어가기는 했다. 그런데 또, 새벽반 사범님, 아, 몸이 너무 이뻤다. 혐오감, 위압감, 이런 것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아, 정말, 에잇, 진짜 너무 이쁜 거야. 그러면서 떠오르는 여러 기억들. 몸에 대한 기억들, 남성의 몸, 여성의 몸, 나의 몸, 사람의 몸, 그리고 몸에서 번져나오는 섹슈얼리티의 기운들은 어떻게 글로 쓸 수 있을까, 가 숙제를 받아안고 들었던 생각 중 하나.

 

활동을 하다보니 물론 활동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쓰고 싶은 것이 많다. 집과 주거권 이야기, 가난과 빈곤과 쪽방 이야기, 에이즈와 성매매여성/성노동자, 성소수자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 안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되는 글. 요즘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 엄마 이야기나 오랜 시간 동거해온 동생 이야기, 그녀들과 나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나의 이야기.

 

하지만 '여성의 글쓰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래도 나는 '글쓰기'를 고민하지 않았다. 기록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여성의 글쓰기'라는 말은 아무래도 나에게 '너를 들여다보라'는 명령이고 속삭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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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6 16:34 2007/08/2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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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올 2007/08/26 20:4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 ^

  2. 보풀 2007/08/26 23: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를 들여다보기'에도 (마음의) 근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기냥 지나가려다 최근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라 ^^;
    ..화이팅입니다. (저도 하고 갑니다..)

  3. 알엠 2007/08/27 00: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부럽군요.이 강좌 듣는군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세요... ^^

  4. 미류 2007/08/27 19: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비올~ ^^ 아, 참, 갈매기살은 어찌됐으려나? ㅋㅋ

    보풀, 정말 근력이 필요해요. 음, 화이팅 잘 받고 열심히 해볼게요. 보풀도 화이팅이어요~ ^^

    알엠, 음, 네, 많이 하려구요. 히히, 근데 잘 될까 ^^;;

  5. 슈아 2007/08/27 20: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구 좋다~

  6. 열띤 슴 2007/08/28 01:0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저도 강의듣는데 여기서 또 보니 반갑네요 >ㅅ<

  7. 요꼬 2007/08/28 10: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생활글 주위에 써보라는 권유 참 많이?받는데요......근데 막상 쓸려고하면 정리를 못해서인지....더 어려운거같아 한글자도 못쓰겠어요(무슨 소설가가 집필하는시간도아니고 ㅋㅋㅋㅋ)

  8. 미류 2007/08/28 22: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슈아~ 아잉~ ^^

    슴, 게시판에서 같은 이름 봤어요. 첫 강의 때 인사나누진 못했던 것 같네요. 반가워요. ^^

    요꼬, 생활글? 이 아닌 다른 글들은 많이 쓰시나봐요. 글들마다 유형이 있어서 쓰게 되는 게 있고 안쓰게 되는 게 있고 그런 것 같아요. ^^;;

  9. 현현 2007/08/30 09:5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궁금했는데 미류가 듣고 있다니 더 궁금...

  10. 미류 2007/09/01 13: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응, 현현, 강좌에서 들은 얘기, 고민된 얘기들도 같이 나누면 좋을텐데, 블로그에 담을 시간이 없넹. 나중에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