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5-8일 지리산 記

# 남부터미널에서 오후 1시 30분 버스를 타고 구례로. 일행 중 다섯 명이 11시 30분으로 예매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버스 출발 전 내림. 당혹스러웠으나 왠지 예감이 더 좋아지는 묘한 느낌. 3시 30분 버스를 기다리는 두 시간이 y에게 매우 의미 있는 노동 시간이 되었다는 후문. 큭. 하루 묵기로 한 집은 박** 열사의 어머님이 지내시는 집이라고. 어머님(성함을 모름)은 강정에 가시느라 집에 계시지 않았고 열사의 선배 한 분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마당에서 키운 토마토를 미리 썰어서 꿀에 담가놓으셨더라. 시원하게 먹으며 밥을 올려놓고 남은 일행을 기다림. m이 짐을 풀어 다시 정리하는 걸 보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 무언가 알려주거나 의견을 주는 것과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 저녁 내내 어머님은 전화를 통해 매실주를, 냉동실의 떡을, 여기저기 넣어둔 이런저런 음식들을 꼭 챙겨먹으라며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오심. g을 아끼는 마음이었을 것. 근처라고 하기에는 먼 광주에서 고기를 사들고 만나러 오신 분은 급하게 먼저 떠나셨고 다음날 산행을 위하여 성대한 저녁식사를. 얼떨결에 o의 동거견인 초코가 화상을. 다음날 아침식사를 위해 북어국을 끓인 s를 마지막으로 모두 잠을. 

 

# 새벽 세 시에 울리기 시작한 알람. 나는 양을 확인하고 채비를 마침. 조금씩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성삼재로 출발. 근처에 사시는 분이 차로 데려다 줌. 이른 새벽에 기꺼이 데려다주러 나온 분들. 역시나 g의 힘? 성삼재에 닿았을 때는 다섯 시가 넘었던 듯. 노고단으로. 노고단에서부터 j가 힘들었을 것으로 뒤늦게 예상. 임걸령까지 천천히 같이 걷다가 노루목에서 잠시 반야봉으로 외도. 다시 가보니 다녀갔던 기억이 새록. 그때처럼 오르는 길은 화창했고 정상은 구름 위라 능선을 볼 수 없었음. 삼도봉을 조금 지나 다시 일행과 합류. 화개재 근처에서 점심 식사. 연하천 산장으로. 벽소령에서 묵으려던 계획이 이미 어려워진 시간. j의 가방을 c가 메고 먼저 앞선 일행을 따라갔고, 나와 y와 u는 j의 속도에 맞춰, 그리고 j를 추스르며 산행. 토끼봉을 지나 명선봉을 오를 때쯤 먼저 도착한 이들이 마중 나옴. 시원한 커피가 정말 맛있었음. 연하천에 닿았을 때는 해가 지기 시작. 저녁을 먹으며 이후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눔. j는 내려가겠다고 함. j의 몸 상태나 휴가 일정을 고려할 때 그럴 수밖에 없었음. 지리산 산행이 처음인 이들도 있으니 나와 u가 j와 함께 내려가자고 제안. 나머지 일행은 계속 가기로. 연하천 대피소에 예약을 해둔 것이 아니라 j와 활동보조인, 여성 한 명의 자리를 겨우 구함. 다른 이들은 벽소령까지 야간 산행 시작. 자려고 들어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여기는 여성들이 자는 곳이라고 얘기해줌. 내 목소리를 듣고서는 민망한 듯 여성스럽게 생겼다는 말까지 덧붙이심. 

 

# 일곱 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고 음정으로 출발. 겁나 험한 내리막. 이런 길은 차라리 오르는 게 낫다는 생각에 변함없음. 길도 중요하지만 시간도 중요해서 다른 길을 선택하기는 어려웠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무더기와 바위들은 j가 걷기에 매우 무리였던 듯. u가 j의 가방까지 메겠다는 결단(그는 이미 매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어서)을 해준 덕분에 겨우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도 u가 가방을 메고 먼저 내려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j는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됨. 그걸 깨달은 건, 이 코스로 올라오다가 잠시 쉬는 사람 두 명(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을 마주친 후 한참을 내려가서 뒤돌아 보니 그이들이 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시간과 거리와 모든 것이 짐작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금 두려웠음. 길이 좁아서 어깨로 부축하다가 뒤에서 잡다가 앞에서 받쳐주다가 하면서 내려감. 한참(?이라고 생각되는 시간) 후 먼저 내려간 u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림. 아마 그 소리에 j는 더욱 긴장이 풀린 듯 갑자기 내 몸에 더욱 무겁게 기댐. 그야말로 긴장됐던 순간. 하나 둘 구령을 붙이면서 내려감. 이윽고 군사도로인 흙길 나옴. 이미 점심 때를 넘기고 있었음. 행동식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절감. 흙길 역시 j에게 쉽지 않았으나 겨우 힘을 내어 등산로 입구까지. 마침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함. u가 먼저 내려갔는데 택시기사가 오늘 연하천에서 부상으로 하산한 장애인이 있다는데 못 보셨냐는 질문을 하더라고. 그 택시를 타고 백무동으로. 오후 네 시쯤 때늦은 점심. 산채비빔밥이 어찌나 맛있는지.

u와 나는 이후 계획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상황. j는 다섯 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서울에서 마중나오는 걸 a에게 부탁. u는 세 가지 안을 제시. 장터목으로, 서울로, 실상사로. 내가 장터목으로 안 가도 혼자 갈 것 같다고 하길래 같이 백무동을 오르기로 함. 나는 연하천에서 내려오면서 상상도 하지 않았던 계획이었고, u는 내심 실상사 쪽으로 마음이 가 있었다고 뒤늦게 얘기했지만, 어쩌다 보니 둘이 백무동을 오르게 됨. 탐방지원센터에서, 장터목에 예약이 되어 있다는 사실과 아침에 연하천에서 내려오게 된 사정을 얘기하고 겨우 산행 허가를 받음. 내려오다가 무릎을 크게 다친 적 있는 길이라 오를 때는 어떨까 궁금했던 길. 역시나 이런 길은 차라리 오르는 게 낫다는 생각은 그대로, 지만 쉽지 않았음. 절반 정도 왔을 때 계속 가던 방향으로 갈 것인지 잠깐 고민했지만 꿋꿋이 걸음. 산행경험이 엄청 많은 u가 잠깐 자고 싶다는 얘기를 지나가듯 내뱉었을 때 혹시라도 이이가 정말 지친 걸까 살짝 걱정했음. 해진 후 바닥으로 내려앉는, 사라져가는 빛을 놓치지 않고 걸음. 잠시 바위에 기대 쉬면서 지리산 이야기도 나누고 몰래 담배도 피웠던 길에서 바라본 야경은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지리산의 모습 중 하나. (파란 간이비옷을 입고 대원사 계곡 길을 따라 걷다가 잠시 쉬며 담배를 피우던 곳, 음정에서 벽소령으로 가는 길에 눈밭을 밝히는 야경에 막걸리 한 모금을 들이키고 걸었던 곳, 뱀사골로 내려가는 단풍길에 도롱뇽 만났던 자리, a와 치밭목 대피소를 막 지나 천왕봉으로 향하던 때 어두워지던 하늘과 숲, 다들 정확한 위치가 기억나지 않지만 잊을 수 없는 장면들) 그리고 어느새 눈 앞에 나타난 장터목 대피소와 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그쪽에 있던 y, 어찌나 반가운지. 사람들은 저녁밥과 안주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음. 고생했다고 반겨주는데 왜그리 정겨운지. 솔잎 생 막걸리는 또 얼마나 맛있는지. 그렌피딕 17년산은 얼마나 달콤한지. 사람이 반가운 게 이런 거구나 싶은 밤. 역시나 가장 오래 기억될 하루. 

 

# 다섯 시 사십 분 일출이라길래 네 시 사 분에 알람 맞췄는데 일찍부터 일어나는 사람들 있어 따라 일어남. 몸을 좀 풀고 밖으로 나감. u와 s는 잔다고. i가 나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g에게 부탁하고 m, y와 먼저 천왕봉으로. 제석봉이 있어 두 고개 오른다는 걸 자꾸 잊음. 하늘로 오르는 문. 어제밤까지도 일출을 보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왠지 보고야 말 것 같은 느낌. 이미 천왕봉에 사람들이 한가득 자리를 잡고 있었고 적당한 자리를 잡고 하늘을 기다림. 그러다가... 보고야 말았음. 사실 크게 기대했던 것 아닌데 너무 감동적이라 울 뻔했음. 더이상 기록하지 않아도 절대 잊히지 않을 듯하니 패스. g가 늦게 올라오느라 못 본 줄 알고 완전 미안했으나 다행히 봤다고 함. 아침 먹고 중산리로 내려옴. 내려오다가 들어가면 안 될 계곡물에 몸 적심. 차마 풍덩 들어가지는 못함. 들고간 야생화 책을 천천히 활용하면서 가기로 함. 길지 않고 어렵지 않은 길. 주차장에 닿을 때쯤 o가 설레임과 게토레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음. 산행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한 동무. 비빔밥 감자전 도토리묵 막걸리 먹고 지리산과는 안녕. 원지 시외버스 정류장 대합실 바닥에 돗자리 깔고 맥주 한 잔 하면서 버스 기다림. 남부터미널에 여덟시쯤 도착. 동무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 기록은 기억을 위해서일 텐데 무엇을 기억하게 될 지 모르겠다. 어차피 기억날 것은 기록이 없어도 기억날 텐데. 길들은 몇 번 다녀온 걸로 역시나 기억나지 않는다. 지도를 끊임없이 보며 능선과 주봉들을 기억하려 애써도 다음에 가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다녀간 적 있는 길이라는 게 기억날 뿐인데, 그것 역시 과연 '기억'인지 모르겠다. 산의 길이 아니라 '그' 산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아무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길 자체보다는 함께 한 동무들. 그건, 당연한 거겠지? 헤헤, 흥미진진한 산행이었다. 

 

# 몇 안 되는 이미지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천왕봉 일출 동영상

 

일출 전 하늘 - 일출 직전 하늘 - 일출 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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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능선. (네 머리 위로 보이는 게 반야봉이라는 걸 기억하렴.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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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에서 가장 자주 만난 야생화들이 한자리에. 동자꽃, 모싯대, 짚신나물, 참취. (덧붙여 기억하기. 음정 내려오는 흙길에서 이삭여뀌. 중산리 내려오는 길 노루오줌. 반야봉에서 산오이풀. 이질에 약으로 썼다는 이질풀보다 조금 더 높고 꽃잎에 짙은 줄이 있는 둥근이질풀. 노고단 가는 길에 물봉선. 중산리에서 계곡 만나기 시작할 때쯤, 수염며느리밥풀로 추정되는 꽃. 구릿대인지 어수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 지나친 그 흰 꽃에 대해서 꼭 자세히 알아보리라. 그리고 중산리 내려오던 길 단풍취, 사진과 이미지가 다르지만 부드럽게 휘어진 가는 꽃잎과 세 개의 술 기억하기. 기억하게 될까.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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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 찾아보며 매번 기억하려 들지만 번번히 잊는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쩝. s가 보내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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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1 21:46 2012/08/1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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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2/08/23 11:4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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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류 2012/08/29 11:25 고유주소 고치기

      아 반가워요!!! ^^ 일출 정말 감동이죠? ㅎㅎ 또 뵐 기회가 있기를~ (근데 현피, 는 무슨 말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