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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재장전 5-6강 - 요약

5강. 인권의 정치와 철학 2 : (불)가능한 권리와 잔여에의 고집

 

인권은 자명하지 않은 권리. 오히려 현실의 운동 속에서 의미가 드러남. 그런데 어쩌면 모든 사회운동이 인권운동. 그렇다면, 구체적인 권리들만 존재할 뿐, '인권'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인권의 불가분성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 아닌가? 5강은 '인권의 보편성'과 '인권의 구체화된 목록들'의 관계에 대한 고민. 

인권의 보편성은 여러 맥락에서 비판받아 왔음. 맑스는 보편적 권리가 특수한 계급의 보편적 지배를 위한 권리라고 비판했으며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역시 '포스트주의'적 비판을 해왔음. 이들은 보편성이 타자를 설정하여 배제하고 은폐하는 권력을 통해 성립된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함. 그런데 이와 같은 보편성의 허구성 혹은 실현 불가능성이야말로 그것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근거가 아니겠냐는 질문이 강사의 주장. 또한 현실에서 보편적 인권의 이념이 절대적으로 구현된다면 오히려 인권은 원래 의미와 상반된 결과를 산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 (여기에서 투표권과 연령제한의 문제를 예시.) "모든 인간에게 전적으로 동등하게 평등자유가 권리로 주어지게 된다면 그때 사실상 사회, 혹은 연합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래서 보편적 인권은 연합체를 만드는 구성적 계기이자 해체적 계기라고. 

그러나 '인권'이 불가능한 것과 달리, 구체적 현실에서의 '인권들'은 가능. 그리고 이런 인권의 내용들은 보편적 인권의 이념을 일정하게 제한함으로써 존재 가능하며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서도 제약. 그래서 강사는 '인권'과 '인권들'을 양 극으로 하는 직선을 상정하고 둘의 관계를 설명. 

물론 '인권들'도 고유의 무한성이 있음. 현실화될수록 유한성, 상대성이 커지고 다시 혁신의 과정에 들어서는 반복이 이루어짐. 이것이 '인권들'의 무한성이며 이러한 증식과 변화의 과정이 인권의 정치를 통해서 작동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인권'의 근본저거 속성-보편성으로부터 비롯됨. 즉 '인권들'은 '인권'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강사는 (불)가능성이라고 표기. (데리다의 논의-<법의 힘>, <환대에 대하여>-를 빌어왔다고 함. 정의의 이념(환대의 이념)에는 현실의 법적 정의(조건적 환대)로 환원될 수 없는 잔여가 남아 있고 그래서 무한히 개선될 수 있다는 것. 번역자 진태원이 ite'rabilite'를 '되풀이(불)가능성'이라고 번역했다고.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차이.)

근대정치질서는 인권을 국가의 차원에서 제도화. 그러나 제도화된 인권들이 인권의 모든 것은 아님. 인권운동 역시 인권화된 국가의 건설을 최종적 목적으로 할 수 없음. 인권의 정치로서 인권운동이란 제도화된 인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잔여와 관련되어 있으며, (불)가능한 권리로서 '인권'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정치적 실천임. 안티고네적 집요함. 

 

6강.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참사의 시대. 강사는 2008년 경찰의 폭력과 최근 부각된 용역업체의 폭력과 더불어, 한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나오던 사람들을 칼로 찔렀던 한 사건을 예시하며 '사회적 패배자들이 자신의 절망과 분노를 표현하는 폭력'을 통해 '폭력'의 문제를 제기함. 

수평적 분단화에 의한 폭력과 수직적 분극화에 의한 폭력(사카이 다카시의 구분)은 명쾌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닌데, 그 배후에는 공포라는 정념이 있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소수자 혹은 배제된 자들에 대한 지배자들의 폭력이 '상상된' 공포에 의해서 추동되며 치안 강화의 논리로 이어진다는 것. 치안 강화로 폭력과 범죄가 감소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실패를 통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영구히 지연되며(푸코, "권력은 실패함으로써 성공한다") 예외상태를 관리하는 강력한 권력의 필요성이 역설됨.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통치. 상상된 공포는, 특정한 대상을 가진 두려움인 공포로부터, 대상이 특정화되지 않는 두려움인 불안으로 넘어감. 안보의 적은 불특정한 누군가. 이것은 커뮤니티의 해체, 쇠퇴로 인한 것. '배제의 폭력'(배제하는 폭력과 배제된 자들 사이의 폭력)은 의미를 상실하고 정치적인 것과 무관해짐. 

'잔혹으로서의 폭력'은 정치의 가능 조건 자체를 위기로 몰고 감. 이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관련. 강사는 발리바르의 씨빌리떼의 정치 논의를 가져옴.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정념/상상/관념 등의 개념을 통해 대중들을 사로잡은 권력의 힘을 설명한다고 함. 현실에 대한 주체의 상상적 관계라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스피노자가 사유하지 못했던 맑스의 '일반화된 경제' 논의를 연결시켰다고. 어쨌든 강사가 발리바르의 논의를 가져오는 것은, 대중들이 탈정치적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자율성이 실행되는 구조나 조건들을 변혁하는 정치(정치의 타율성)뿐만 아니라 폭력을 유발하는 정념적인 상상-이데올로기를 전화해야(타율성의 타율성)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듯. 

'인간들이 세계 및 자신들 사이에 맺고 있는 관계를 산출함으로써 사회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원리'(진태원)로서 정치의 가능성을 위해 폭력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나. 적대성을 상실한 비폭력은 의미가 없다. 비폭력지상주의는 주권의 틀에 포함되기 위한 투쟁이 되기도. 어떤 힘이 사용되느냐가 중요. 타자를 지배하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구성할 수 있는 힘을 실행해야.  '반폭력(nonviolence)'은 자율의 틀에서 민중의 집단적 삶의 형식을 구성하기 위해 주권권력과 투쟁하는 힘. 이것은 직접행동-직접활동이기도. 폭력의 주체를 정치의 주체로 전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실행하는 정치가 시급. 개인이 소속하는 정체성 집단들이 복수적일 수 있음을 상호인정하면서도 주체의 일관성을 구축가능하게 하는 정치. 정치의 가능조건을 구축하는 정치. 배제된 자들이 폭력에 맞서 자신들을 무권리 상태로 만드는 체제적 조건을 전복하는 주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직접행동을 통해 구축. 억압당한 이들의 자력화를 달성할 수 있는 정치적 연합의 형식을 모색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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