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님의 [인권의 재장전 5-6강 - 요약] 에 관련된 글.

 

# 강의 요약을 마치고 메모를 남기려고 했는데 박스 안에 갇힌 커서가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서 애꿎은 마우스만 고생시키다가 트랙백으로. 

 

# 5강은 강의록만 읽었고, 6강은 직접 들었다. 6강에서 '폭력'을 다루는 게 다소 뜬금 없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예시한 고시원 사건과 같은 사건들이 비단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고민해온 '폭력'의 줄기와 어디에서 만나는지 잘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휙 건너뛰어서 읽어도 무방한 느낌. 요약하면서 다시 보니, 굳이 '폭력'에 대한 사유를 거치지 않아도 됐다는 생각은 여전한데, 그만큼 굳이 '폭력'을 주제로 삼지 않아도 되새겨볼만한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 충격적인, 혹은 선정적인 사건이라 나 역시 붙들려 있었던 듯. 건설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내가 만난 한 트랜스젠더와 중국인 식당 노동자 등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혐오들을 주제로 이야기해볼 수도. '수평적 분단화'란 '차별'로 읽을 수도 있었던 것. 

 

# 5강은 인권의 (불)가능성을 다룬다. 끊임없이 인권을 향하게 하는 힘을 인권의 불가능성-보편성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나는 이론적으로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 내 수준에서는, 어떤 이상 혹은 이데아를 끊임없이 모사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설명인지를 모르겠는 것. 즉, 인권과 인권들 사이의 위계 설정이라는 함정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데리다의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 것일 수도. 다만, 스피노자가 신과 수많은 양태들의 관계를 설명했던 방식을 통해 다르게 이해해볼 여지도 있을 듯.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한 점에서 무한히 뻗어나오는 빛들로 만들어진 구(공)가 연상된다. 그 빛들은 빛들이기 때문에 사실상 균질한, 경계 없는 공간과 다르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낸다. 결국 그 한 점도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것. (불)가능한 '인권'이 선들을 출발시킨 한 점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공간에 펼쳐져 있는 것이라는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럴 때 구체적 권리라 불리는, 구체적 집단의 권리 또는 구체적 대상에 대한 권리들의 위치를 새롭게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 권리는 구체적 조건 속에서 제기되기는 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인권들'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런 구체적 권리들을 통해서만이 보편적 인권의 '속성'이 구성되는 것이다. 홈리스의 상황 혹은 삶을 통해 모든 사람은 사람답게 살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듯. 혹은 그렇게 읽어낼 수 있을 때 그것이 홈리스의 인권이라고 말해질 수 있기도 하다는. 복지 또는 다른 접근과의 차이랄까.

부르주아 계급만이 아니라 어떤 계급 혹은 계층, 집단도 보편적인 권리라는 이름으로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은 언제나 당파적이다. 이것은 보편성의 한계가 아니라 보편성을 둘러싼 싸움이고, 그 보편성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인권, 혹은 인권과 인권들 사이의 위계는 다른 우려도 불러일으킨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것으로서의 '인권'을 늘 유보해야 한다는 것. 어떤 사건과 관련된 '진실'이 늘 유보될 때의 긴장과 비슷한 것. 이런 고민은 강의에서 "모든 인간에게 전적으로 동등하게 평등자유가 권리로 주어지게 된다면 그때 사실상 사회, 혹은 연합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을 통해 더욱 생긴다. 이때의 '평등자유'란 무엇일까. 이런 주장이야말로 인권의 자유주의화에서 경계했던,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을 출발점으로 하는 접근인 것은 아닐까. 인권들은 언제나 인권의 제한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이를테면 혐오나 전쟁 선동과 표현의 자유) 그것은 인권의 제한이 아니라 인권의 재구성 과정이라고 보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코나투스가 관계적 권리로서 인권을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고도 생각했는데, 강사는 거기까지는 안 간 듯. 같이 읽었던 지젝의 반인권론에서 지젝은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고 일갈. 이런 비판을 통해 재구성되는 인권론이 필요한 듯. 

한편, 인권과 인권들이라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와 여성주의들이라는 문제의식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둘이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지점이 있는 듯. 인권은 이념이나 사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철학인 동시에 제도로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복잡한 듯. 

 

# 메모하는 지금 또 드는 생각. 어제 많이 사용되었던 '태도'의 문제. 사실 인권은 어떤 태도이거나 시선의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내용과 동떨어진 형식이 아니라 속성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무엇이 문제인지 보고 듣고 말하고 드러낼 수 있는 태도나 시선,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구성적 원리. 그게 관계로부터 출발할 때 닿을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 강의록 읽은 후에 그림을 끄적거리면서 '지도'를 구상해봤는데 다시 보니 애매하다. 울퉁불퉁한 지면 위의 무언가들을 새롭게 배치해내는 힘으로서 인권을 고민했던 듯. 그리고 코나투스/주도권(타협, 협상, 저항, 굴복 무엇이든)/존엄, 이라는 메모도 있음. 

 

# 6강은 '폭력'을 경유하지 않고 다시 고민해봐야겠다만 강의를 들을 때는 과연 성폭력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더랬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남성의 폭력을 '공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만 그렇게까지? '가해자가 자신을 잠정적 피해자로 상상하고 그 상상된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 상상적 가해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반전'(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다고 강의에서 인용)이 성폭력에서도? '폭력'에 대해 말한다면 반드시 놓치지 않아야 할 주제. 

 

# 용역 폭력은 어디쯤? 이건 따로 한 번 정리해야 할 듯. 참고로, 강사는 '사설폭력산업의 공권력화 경향'이라 보고 이제 공권력은 사설폭력기구가 투쟁을 폭행할 수 있는 치외법권의 지대(법의 공백지대)를 만드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고 비판. 

 

# 강사는 '폭력'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힘이 실행되느냐라고 주장. 그러면서 권력과 능력(potentia/puissnace)을 구분. 이와 비슷한 논의는 여러 철학자들이 다뤘던 듯. 그런데 과연 권력과 능력이 그리 쉽게 구분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구성"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배하려는 의도가 있는, 또는 지배-피지배가 너무나 분명한 것은 권력이라고 하자, 는 합의가 있다면 모를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게 사라질 수 있을까. 노골적이거나 전면적인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생겼다 흩어지고 역전되기도 하고 등등 늘 움직이는 어떤 관계의 모습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능력-힘의 실행이라기보다, 폭력의 긴장을 견디는 힘이지 않을까. (아니면, '자아/주체'의 개념을 재구성해서 권력과 능력을 새롭게 서술하거나...)

 

# 강의를 한창 들을 때는, 강의가 모두 끝나면 나름의 완결적인 글을 한 번 써보리라 생각했지만-생각이라기보다 그땐 막 다 써질 줄 알았지 ㅋ - 역시나 끝... ㅎ 그래도 애써 남겨둔 메모가 언젠가 텃밭이 되어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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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2 14:33 2012/08/2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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