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 하려면 제대로 하시라

질병관리본부는 10월 한달간 MBC를 통해 콘돔광고를 내보내기로 했다. 자그만치 국민건강증진기금 5억을 들인 사업이다. 뉴스에서 '광고가 시작된다'는 보도를 하며 자료화면을 보여주길래 기대하며 지켜보았다.

 

왠걸...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두 명의 첩보원이 등장하여 대화를 주고받는다. 

출생은? 1981년. 

규모는?  전세계 4000만명. 6초당 한명씩 증가.

국내에서는?  매일 1.7명씩 발생

대책은?

이때 짜안 하며 콘돔 이미지가 나오고 '우리나라도 더이상 에이즈 안전지대가 아니다' 라는 자막으로 광고가 끝난다.

 

노골적이라는 것은 코믹물의 형식을 빌렸다고 하는 이 광고가 현재 한국의 에이즈정책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는 것이다. 첩보작전!!!

 

이 광고는 에이즈를 '세계를 위협하는 그 무엇', '찾아내어 퇴치해야 하는 그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아인구는 전세계 4000만명을 훨씬 넘고 의사 한 명이 보는 감기환자는 하루에 17명을 훨씬 넘을 텐데 숫자와 무관하게 긴박감을 더하는 배경음악은 시청자로 하여금 무시무시한 것을 상상하게끔 한다. 궁금해질 때쯤 광고는 그것이 에이즈임을 밝히면서 예방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콘돔 사용, 절대 찬성이다. 많이많이 장려하고 보급하시라. (보건소에서 무료로 나누어준다니 필요한 사람들은 열심히 장만하시라.) 다만 콘돔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에이즈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공포를 조성하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권력에 따르게끔 하여 우리네 삶의 가치에 무뎌지게 하는 것은 현대 국가들의 익숙한 지배방식이다. 부시는 이라크전쟁을 선동하기 위해 테러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였고 한국의 정권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 '북괴와 내통하는 세력'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였다. 

국가보안법을 보자. 국가보안법은 그 존재 자체로서 어딘가에 '사회안전'을 파괴하려는 세력이 상존하고 있음을 설파한다. 그러한 세력을 감시하는 것은 정당한 권력임을 강변하는 동시에, 국민 모두가 스스로를 감시하도록 명령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 광고, 기억하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누구나 늑대일 수 있으므로, 누군가 감시당하고 부당하게 억류되어도 사람들은 '그럴만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HIV(에이즈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누군가가 '국민건강'을 파괴하기 위해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첩보작전'을 수행하듯이 은밀하게 그/녀들을 색출해내기 위해 국가는 감염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실명과 주민등록번호, 가족관계, 직업 등 갖가지 개인정보들을 관리한다. 3개월에 한번씩 상담을 위해 감염인을 불러내고 연락이 되지 않으면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소재지를 파악한다. 그야말로 첩보작전이다. 이 과정에서 감염사실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사례는 너무 흔해 문제로 여겨지지조차 않는다.

게다가 HIV에 감염될 수 있는 누군가를 색출하기 위해 강제검진까지 실시한다. 성매매여성들은 6개월에 한번씩 자신의 피를 국가에 바쳐야 한다. 동성애자들은 '고위험군'이라는 누명을 써야 하고 사람들은 동성애자 하면 에이즈부터 떠올린다.

각종 처벌규정과 의무규정을 두어 공포감을 조성하는 에이즈예방법과 이 광고는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태국은 HIV감염율이 급증하자 콘돔 사용률을 높이기 위한 캠페인을 2년여에 걸쳐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를 새겨볼 만하다. 콘돔 사용률이 전반적으로 증가하기는 하였는데 어떤 관계냐에 따라 사용률의 증가가 차이를 보인다. single visit commercial sex partner와의 관계에서 콘돔 사용률이 가장 높고 multivisit commercial sex partner와의 관계에서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중요한 것은 같은 기간 girl friend와의 관계에서는 사용률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관계는 부부관계라는 말이 달리 나오는 것이 아니다.

콘돔은 피임도구다. 임신할 생각이 없으면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피임할 의지'가 있으면 사용하고 에이즈로부터 보호받고 싶으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임신할 의지'가 없어 사용하다보면 마침 에이즈 예방도 되는 것일 뿐이다. 

콘돔 사용률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여성의 권리 증진이다. 콘돔 없는 질삽입 섹스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HIV를 감염시킬 확률은 0.1-0.2%, 여성이 남성에게 감염시킬 확률은 0.03-0.1%로 알려져있다. 남성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것보다 여성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남성들에게 콘돔사용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남성은 '임신할 의지'가 없으면 '사랑하는/섹스에 동의한 사람'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야 하며 '사랑하지도 않는/섹스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과 돈주고 섹스를 하는 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폭력이 범죄인 줄 몰라서 성폭력 범죄가 줄어들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지요.)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감염인들이 편견과 차별에 고통받도록 하고 인권침해를 당하고서도 숨죽일 수밖에 없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뿐인가. HIV 검사 결과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감염인이라고 생각하여 수십번이 넘는 검사를 받다가 결국 자살한 사건은 그 공포가 감염인들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 국제사회는 '에이즈는 감기다'라는 concept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치료제가 어느 정도 나와있어 건강관리만 잘한다면 당뇨나 신부전 등의 만성질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콘돔 실물을 넣으려 했으나 난색을 표했다는 MBC나, 부끄럽지 않은 우리말 이름을 지어달라는 응모행사에는 아쉬움만 전하자. 하지만 공포를 조장하는 전략은 끊임없이 걸고 넘어져야 한다.

 

좋은일 하려면 제대로 하시라.

 

 

(월~목요일에는 오후 9시55분과 오후 11시55분,

금~일요일에는 오후 11시58분 등 총 62회 방영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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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6 12:20 2004/10/0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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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ortan 2004/10/07 21: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오늘 여의도에서 성매매 여성과 업주들이 모여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를 했단다. △음성적 성매매와 개방형 집창촌을 구분해 단속할 것 △여성단체의 개입 거부 △성매매를 직업으로 인정할 것 △공창제로의 전환 등을 요구했다고 하네. “허울좋은 여성인권 존중보다 하루하루 생활하는 생존권이 우선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집회를 했다고 한다.

    성매매 특별법이 뭐지? 문제가 있나?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2. 미류 2004/10/08 00: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렵지요...저도 에이즈예방법 글쓰면서 관련조항이 있어 입장을 정리해볼까 했으나 손을 댈수록 번져나가는 탓에 일단 접었답니다. '그녀에게'(맞나?)라는 블로그를 찾아가보세요. 최근에 성매매와 관련한 글들이 올라왔었답니다. 트랙백도 몇 개 걸려있을 꺼구...다시함께센터나 이룸 같은 단체의 홈페이지를 찾아가보는 것도 추천.
    근데 '성매매특별법이 뭐지?' 는 심해도 너무 심하네 ㅡ.ㅡ 글구 집회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말들이 많으니 상황판단을 어렵게 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을 듯한데... ㅇㅇ

  3. 자일리톨 2004/10/08 11:3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별 생각없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위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학교다닐 때 "콘돔 = 에이즈 및 각종 성병예방"이라는 등식으로 성교육을 받았는데, 그것이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시각이었다는 걸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4. 미류 2004/10/08 12:1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하지요. ^^ 뭔가 좀더 분명하게 정리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잡히지가 않아 조금 갑갑하기도 했거든요. 글구 무엇보다도 글쓰고 하루가 지나니 '꽤' 민망하더라는 ㅡ.ㅡ 사람들 얘기 마니마니 듣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