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소를 누린다는 것은 관계를 얻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장소의 전유는 관계의 조직을 위한 실천이기도 하다. 게이바나 엘바 등의 전유와 농성을 통한 공공장소의 전유를 비교한 토론은 어떤 역사를 돌아보게 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성소수자의 공간들은 사적인 장소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명동의 샤넬다방이 그랬듯 지금 익숙해진 성소수자의 공간들은 공공장소를 전유해낸 실천이었기도 하다. 어떤 역사의 맥락에서 지금 맞고 있는 시기를 살피는 것도 유의미할 듯.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전유하던 시기를 거쳐, 공적 공간에서의 개인적 커밍아웃 또는 범위가 제한된 커밍아웃이 확산되던 시기를 지나, 공적 공간을 공적 장소로 전유하며 집단적 커밍아웃을 하는 시기로 접어든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의 과제는 무엇일지. 토론회에서 어렴풋하게 공통의 과제로 드러나는 것은 세 가지인 듯하다. 혐오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경제적 생존권'이라는 표현으로 지칭되는 운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제도'라는 전장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세 가지는 모두 맞물려있다. 
 
* 발제와 토론 모두에서 농성 종료의 결정에 대한 평가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은 특히 '제도'와 관련된 고민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와 관련있어보인다. 전체토론을 통해 모인 의지와 다음날의 입장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온 듯. 결정 과정에 대한 평가에 집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결정이 필요해지기까지의 상황, 결정 자체에 대한 평가가 조금 더 이루어져야 할 듯. 농성의 요구와 농성단의 욕구, 농성의 목표와 농성단의 성과를 차분히 정리할 필요를 제기하는 듯. 서울시가 인권헌장을 선포하도록 더 밀어붙여야 했을까? 인권헌장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을까? '제도'에서 부딪칠 일이 많아지는 현실(운동의 성과이기도 한)로부터 바로 제도 대응을 모색하는 것은 토론의 전반적 방향과는 다르다. 발제나 토론은 제도적 실천을 넘어선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제도'가 싸움의 현장이 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때 '제도'가 쟁점이 되어가는 성소수자운동의 역사적 시기나 고유한 조건들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차별금지사유를 명시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반대한다고 주장해야 했던 차별금지법, 차별금지 사유를 명시해서 통과시켰던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차별금지 사유를 명시한다면 선포할 수 없다는 서울시 입장을 확인한 인권헌장. '제도'라는 이름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를 오히려 흐려버릴 수 있다. 
 
* 혐오에 맞서는 것은 혐오세력에 맞서는 것이다. 혐오세력에 맞서는 실천의 본질은 우리를 세력화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이라는 '제도'를, 이제는 과제로 검토할 수 있을 듯하다. 혐오를 금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 앞장서 싸울 세력으로 우리를 세우기 위해. 혐오에 맞서는 연대에서 고민해야 할 지점은, 혐오에 노출된 세력의 연대가 아니라 세력화하기 위한 관계의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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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8 01:31 2015/01/08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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