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법의학자

선생님한테 오랜만에 전화했다. 처음일지도 모른다. 편하기는 하지만 가까운 선생님은 아니니.

 

수청동 철거지역의 사망사건과 관련된 부검보고서에 대한 보도요청서를 읽고 선생님 생각이 났다. 보고서가 뭔가 충분히 말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좀더 적극적인 해석을 하시지는 않을까 싶었다. 일단, 보고서가 말하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필요도 있었고.



놀라는 기색없이 전화를 받으셨다. 사건과 보고서의 개요를 말씀드렸더니 "다 말하지 않은 것 같네" 하신다. 자료를 봐야 알 것 같다고 하시더니 메일로 보내란다. 시원하시다. 하기는 그런 인상이 늘 남아있어 전화걸어볼 엄두를 내기도 했다. 메일 보내고 전화로 설명을 들었다. 학생 가르치듯이 한참을 말씀하시더니 역시나 끝은 "법의학 수업 시간에 강의 안듣고 뭐했냐"셨다. ㅡ.ㅡ;

 

기사도 기사지만 법의학의 매력을 새삼 느꼈다. 사체에 남아있는 진실의 흔적들을 좇는. 사체가 헤쳐지고 잘리는 것이 죽음에 대한 또한번의 모독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망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이 어쩌면 위로가 될 수 있을 지도.

몸의 반응이나 물리학적인 힘의 작용 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망자가 사망할 당시의 전후상황을 추론하는 것이 흥분되는 과정인 것도 같다. 위에서 던진 물체에 맞아서 생긴 손상이 정수리 부근이라면 물체에 맞을 당시 서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거나 적어도 이미 쓰러져있는 상태이기는 힘들지 않겠냐는 것 등. 

하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법의학이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지기도 했다. 사망에 이르게 한 직접사인 혹은 선행사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에만 매몰되어서는 안될 테니.

 

그래도 진위를 가리고 진실에 가장 근접한 가능성을 밝히는 것 역시 중요한 일. 지금 수청동철대위를 향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 철거정책의 비열함을 폭로하기 위해서,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서...

 

그래서인지 경찰의 엉터리 조사와 몰지각함에 대해 점점 화가 났다. 시신을 방치한 것도 그렇고 헬멧을 쓰고 있었다면 깨지거나 찌그러진 헬멧이 어딘가 있었을 텐데 확인됐는지 모르겠고 시신을 이송하면서 사체의 위치나 자세도 조사하지 않았던 것 등. 교통사고가 났을 때 도로에 사람이 누워있던 자리와 모양을 표시한 것도 몇 번 본 적 있는데.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안한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듯하다. 몰랐대도 문제지. 에잇.

 

사실, 통화 마치면서 좋았던 것은 다른 거다.

 

전화를 걸어 저 기억하시냐고 물었더니 왜 기억 못하겠냐고 타박을 주면서 뭐하냐고 물으셨다. 인권운동단체에서 일한다고 대답했더니 '운동권처럼 논다~'며 흘기듯 웃으셨다. 뭐라고 말하셨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런 표현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철없다며 비웃거나, 니가 뭘하겠냐며 혼내거나, 왜 그러냐고 걱정하거나 하지 않는, 그 느낌.

너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구나, 인정해주는 목소리,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처음 들어본 것 같다. 하아.

 

내멋대로 느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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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4 17:29 2005/06/0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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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콩!!! 2005/06/05 01:0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사체에 남아있는 진실의 흔적을 좇는' 매력은 나도 인정. 하지만 수업시간에 들었던 내용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딱 세가지만 기억이 나요. 하나는 김귀정 열사 사건을 소개한 슬라이드, 하나는 어느 작은 식당에서 있었던 살인사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살을 하려면 절대로 물에 빠지지 말고 목을 매라는 얘기...

  2. 콩!!! 2005/06/05 01: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마지막에 쓴 그 느낌, 참 좋았겠네요. 미류 멋대로 느낀 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 또한 '힘' 아닐까요.

  3. kanjang_gongjang 2005/06/06 19:3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수청동철대위와 전철연 연대식구들이 조속히 살인 피의자 신분에서 벗어났으면 하네요. 미류 기사 잘 읽고 갑니다.

  4. 미류 2005/06/08 09: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콩, 저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네요. ^^;

    간장오타맨, 경찰이 강제진압한다고 발표했던데 ... 걱정입니다.

  5. kanjang_gongjang 2005/06/08 10:0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네 지금 침탈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특공대 50명, 경찰병력 2400명 크레인 2대, 포크레인 2대, 소방차 3대를 배치하여 지금 크레인으로 콘테이너 박스를 철대위 옥상에 내려놓기 위해 특공대를 앞세운 경찰의 침탈이 시작되었다고 하는군요.
    전철연의 투쟁의지를 믿어야죠. 이 싸움이 끝이 아니니까요.

  6. jaya 2005/06/09 16:0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성 선생님? 이*덕 선생님? 진로선택 조사때 법의학 나만 썼더라구요. 운동권처럼 놀긴.. 운동권인걸..ㅋ

  7. 미류 2005/06/11 09: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