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갚는 약속

김규항 블로그'신뢰와 신용' 이라는 글에 트랙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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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에게 큰 돈을 빌려줘보지 못했다. 빌려준다고 했지만 돌려받지 않을 마음으로 조금 나눈 적은 있다. 그러니 돈 갚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는 못한 셈이다. 만약 나와 아는 누군가가 돈 갚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그를 믿을까, 믿지 못할까. 아마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할 것이다.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믿을 테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슨 고리대금업자도 아니고, 돈을 갚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그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고, 약속은 언제든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버리는(이건 돈 갚는 걸 미루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이라면 더이상 믿을 이유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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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 나와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던, 지금은 다른 단체지만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이들은 인권교육다운 인권교육을 널리널리 홀씨처럼 뿌리고 다니는 이들이고 어린이-청소년의 권리에도 관심이 높고 고민이 많다. 몇 년 전에는 '고래가 그랬어'라는 잡지에 고정 꼭지를 맡아서 쓰기도 했고 그 글그림들을 모아 펴낸 <뚝딱뚝딱 인권짓기>는 이른바 '잘나가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이들에게는 받아야 하지만 받지 못하고 있는 인세가 꽤나 있다. 그걸 빌려준 돈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출판의 세계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왜 아직까지 못 받은 인세가 있는지 짐작할 길이 없다. 책은 좀 팔린다는데 일정 비율로 계약한 인세를 받지 못하는 이유를. 그이들도 그 얘기를 잘 꺼내지 않아, 사실 나는 오늘에서야 여전히 못 받은 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게 속상했다. 먼저 내색을 하지 않으니 같이 출판사나 사장 욕도 제대로 못해봤고, 돈 생기면 자기들보다 먼저 받아야 할 사람 생각부터 하고, 독립하면서 단체 재정은 더 어려워졌을 텐데, 그걸 보고 있는 내가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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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규항의 블로그에는 '신뢰와 신용'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이른바 인권과 빈곤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활동한다는 사람들이 돈 갚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게 그들이 분노하는 저 합법적인 고리대금업자들(은행 등)이 말하는 '신용 불량'가 뭐가 다른지 나는 모르겠다." "자본주의라는, 돈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적 품위를 지킨다는 건, 계산을 깔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을 넘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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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규항이 글을 통해 말하는 이들이 내가 아는 그이들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믿는다. 돈을 못 받았다고 상대를 채근했다거나, 돈을 받지 못해서 남의 인격을 의심했을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을 주기 어렵다는 말에 원고료도 50%만 받기로 동의한 그이들이다. 아마도 어려울 출판사 또는 사장의 사정이 좋아지기를 몇 년째 기다리는 것밖에 못했던 이들이다. 그 후로 몇 쇄를 더 찍었는지, 받아야 할 인세가 얼마인지도, 알려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어, 물어보지도 못하고 모르고 있는 그이들이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김규항이 스스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고 판단하면서 그 이유를 돈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밖에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돈 때문에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그 돈을 받아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돈밖에 없을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건 도대체 어떤 종류의 품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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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김규항이 말하는 이들이 내가 아는 그이들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믿는다. 그의 형편을 모르는 나로서는, 그가 누군가에게 주어야 할 돈을 주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받아야 할 돈이 있는 그이들도 이유를 모른다. 그이들은 갚을 형편이 되는지, 못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조차 들어보지 못했고 서투른 미안함이라도 보지를 못했다. 그러니 아마도 그이들 얘기가 아닐 것이다.

믿어달라고만 해서는 믿어지는 게 아니고 침묵한다고 해서 신뢰가 유지되는 게 아니다. 신뢰를 주기 위한 행동이 필요한 거다. 글에서 말하는 "인권과 빈곤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활동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충분히 그런 노력을 그가 했기를,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김규항은 정말 신뢰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랄 수밖에.

뭐 나로서야 굳이 그를 신뢰해야 할 이유도, 신뢰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니, 그저 내가 아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렇더라도 "이른바 인권과 빈곤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활동하는 사람"이다 보니 괜히 불쾌하기는 하다. 행여 내가 아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정말 불쾌하다. 비겁한 글이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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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돈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적 품위를 지킨다는 건", 계산을 혼자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서로 깔끔하게 하는 것이다. 품위를 위해, 집주인한테 보증금 받을 기약도 없이 방을 빼는 세입자는 없을 것이고 고용주한테 밀린 임금 받을 기약도 없이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노동자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아마 김규항이 말하는 '저 너머 세상'의 모습도 아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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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5 00:49 2008/12/05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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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1. 미류님의 [돈 갚는 약속] 에 관련된 글. 김규항은 혹시 돈을 빌려줘본 경우나 돌려받지 못한 경우만 경험해본 듯하다.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그보다 훨씬 다양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 그것은 분통이 터지면서도 스스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권력관계 아래서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채권자가 권력을 쥔 것이 아니라 채무자가 권력을 쥐고 있는, 통상의 고리대금업과는 다른 관계인 것이다. 김규항은 갚을 형편이 되면서 갚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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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5 01: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돈 갚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로 시작한 것 논거가 참 거시기 하구만..

  2. 글쎄요 2008/12/05 01: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김규항님이 말하는 사람들이 그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돈 문제를 갖고 "신뢰"를 말했다면 잘못했네요.
    김규항님이 고래로 막대한 채무를 떠안았다고 들었는데....

  3. su 2008/12/05 01:5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음// 돈이 없는 사람에겐 돈을 빌려주는 것도, 돌려받는 것도, 못 받는 것도 다 생소한 경험이죠. 저도 돈이 없어서, 헤헤. 거시기한 논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혹시 이 글을 "돈 갚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본적이 별로 없는데, 김규항씨는 줄 돈을 한마디 설명도 없이 안 주더라, 그래서 좀 거시기하더라"라는 내용으로 읽으신건가요? 다른 경험-기반에 서있는 우리 각자는 언제나 서로 상이하게 텍스트를 읽어내지만, 이 글은 좀 더 다른 플롯으로 읽어보시면 "음"님께서 좀 더 행복해지시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글쎄요// 글쎄요. "신뢰"를 돈의 문제로만 환원해서 생각하는 것은 김규항님의 생각이 아닌가요?

  4. su 2008/12/05 02:0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나저나, 김규항님 블로그 "신뢰와 신용"에 걸려있던 이 글의 트랙백링크는 삭제되었네요 -_- 방금전까지 있었는데, 쩝.

  5. 겨울 2008/12/05 03:1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피식.. 지울 줄 알았지요. 그리곤 웃기는 변명이 더 붙었군요.
    졸지에 고리대금업자 활동가들을 동료로 두게 되어 이거 영광인 듯.

  6. 2008/12/05 03: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su.. 뭔소리요..? 당신이야 말로 희한하게 읽혀내는 군. 생소한 경험이란 또 뭐노무 소린겐지.. su님의 생각이나 적으시지요. 남덧글에 왠 답덧글 ㅋㅋ

  7. 처절한기타맨 2008/12/05 09: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세상에서 젤 나쁜 시키가 일 시켜먹고 일한 사람 돈 떼먹는 쉐리지요. 지는 온갖 개폼 다 잡음선~

  8. 미류 2008/12/05 09: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음// 돈 갚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얘기하면서 시작한 건, 그저 김규항이 "돈 갚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게 무슨 논거는 아닌데 거시기하다는 게 어떤 말이지...

    글쎄요// 아니길 바래야겠죠. 방금 확인해보니 글을 좀 수정했더군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그랬다고... 저도 돈 문제'만' 갖고 신뢰를 말하는 이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답니다.

  9. 미류 2008/12/05 10:0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su// 음, 트랙백이 삭제되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는데 막상 겪고 나니 꽤나 황당하네요. 그러고 나서 글을 수정하고 몇 문장 덧붙인 건, 그도 뭔가 속상하거나 억울했기 때문이겠죠? "오죽하면"...

    처절한기타맨 // 김규항이 어떤 개폼을 잡는지는 사실 모르지만 원고료나 인세를 '빌려준'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참 한심하네요.

  10. 비올 2008/12/05 19:5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무엇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 고찰하지 못하는 면이 많이 실망스럽네...그 사.람.

  11. b급은무슨.. 2008/12/05 22:5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제 겨울바다에 갔다. 고래가 있었다. 고래가그랬어. "전경련과 경총에서 규항이 스카웃할거"라고..

  12. 미류 2008/12/06 04:1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비올// 응, 그저, 못된 사람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 덜 된 사람인 건 괜찮은데...

    b급은무슨// "돈 때문에" 스카웃될까요? >,<

  13. 비올 2008/12/06 12: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응 나도 좀 덜된 사람이었으면 하네...그럴 수는 있으니까, 살다보면...친구들이 상처 받지 않았으면 하공. 괜찮겠지? 맷집들이 좋으니 말이야. ㅎㅎ

  14. 디디 2008/12/06 16: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고, 그걸 혼자 해결하고 떠안하야 한다는 고립감이 지속될 때, 코너에 몰린 기분, 뭔가 억울해지기만 하고, 잘못된 방식을 택하게되고, 그럴 때도 있는 거 같긴 하여요. 음음음-

  15. 미류 2008/12/07 09:0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비올// 응, 맷집들이 좋은 게 걱정이야. ㅎㅎ

    디디// 음, 그런 때도 있죠. 그게 못된 건 아니고, 같이 토닥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16. 2008/12/10 01: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수많은 '악덕기업주'라 불리는 사장님들도 '혼자 해결하고 떠안아야 한다는 고립감'때문에 잘못된 방식을 택하게 됩니다.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이라해서 너무 말랑말랑하게들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일 시키면 돈 줘야한다"는 원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원칙인 건가요?

  17. 미류 2008/12/10 10:3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중요하죠. 돈을 주고 일을 부탁해야 하는 거겠죠. 그닥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고, 차라리 말랑말랑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하겠죠...

  18. 앙겔부처 2010/12/11 04: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2년만에 다시 이 글을 읽고.. 벌써 이년이나 됐네. 지금은 어떤 상황일지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