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린다 파라스, 알라메다주 의료센터

"(미국의 의료제도는) 사람들을 죽게 하고 일할 능력을 박탈하는 매우 체계적인 수단이지요. 의료문제는 한 사회의 도덕성과 매우 큰 관련이 있습니다. 의료가 사유화, 상품화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의료문제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문제이지요."

 

이번 노동영화제에서는 '사유화의 종말'이라는 섹션을 두고 해외작품들을 상영하였다. 그 중 하나가 '출혈;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의료제도'이다. 감독 로나 그린은 미국의 보건의료노조 활동가들과 쿠바를 다녀오면서 미국의 의료제도를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특히, 미국 의료제도의 잔혹함은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영화는 미국의 의료제도의 잔혹함을 찬찬히 설명해준다. 그것은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한결같이 '모든 사람에게 교육과 의료만큼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장'이 아니라 이미 삶에 배어있는 가치다. 이를테면, 우리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어떻게 돈을 안 낼 수가 있어?'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그/녀들은 '어떻게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돈을 낼 수가 있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게다가,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매우 체계적이다. 지역마다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의료인력이 배치되어 치료뿐만 아니라 연 2회의 검진 서비스가 제공되고 방문진료도 이루어진다. 노인복지센터나 정신건강센터 역시 경제봉쇄로 인해 공급이 충분하지 않은 의약품들 대신 독창적인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여 훨씬 훌륭하게 민중건강에 기여하고 있다. (물론, 나는 화면에 비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한결같은 만족감을 읽지는 못했으며 편집된 다큐가 현실을 100% 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다큐는 분명히 쿠바의 의료제도를 '찬양'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옮긴다.)

 

쿠바를 다녀온 감독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직장에서는 의료보험을 제공하지 않으며 고혈압과 천식을 앓고 있어서 개인적인 의료보험 가입도 제한되는 상황. 치료비를 아끼기 위해 하루에 한 알 먹어야 하는 약을 반으로 쪼개 먹고 바늘에 찔린 후 곪아들어간 손가락의 상처를 부엌에서 직접 '수술'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녀의 오빠. 직장에서 의료보험 적용을 확대하라는 요구를 했다가 대번에 실업상태가 되고 당장 주거불안정 상태가 된다. 오래된 치통을 참다가 공공병원의 응급실을 뒤늦게 방문하여 겨우 치료를 받는다.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뷰들은 왜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그런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특히 그/녀들은 이미 실업과 빈곤으로 인해 불건강을 강요받는 사람들이라는 것. 의료가 이윤추구의 수단이 되면서 많은 보험회사들은 얼마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 이윤이 극대화되는가에만 골몰한다는 것. 지역마다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응급실이 있지만 최소한의 치료와 관련된 서비스가 제공될 뿐, 검진 등의 예방서비스는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것 등.

 

영화를 보는 동안 역시나 작년의 경험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모병원 응급실이었다. 그 곳은 '행려'환자들을 받는 응급실이라 밤마다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응급실'에서 치료받을 만큼 위급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길에서 쓰러져 자고 있으면 경찰들이 마지못해 옮겨다놓는 곳이기도 해서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인 적도 꽤 있다. 하지만 당장 응급수술을 해야 할만큼 위급한 데도 병실이 부족해 수술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치료를 적절히 마치더라도 다시 방문하기 힘든 조건 때문에 후속조치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병원은 응급실뿐만 아니라 행려환자들을 위한 병동을 운영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를 마친 환자들은 병동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나 병동은 자리가 쉽게 나지 않는다. 워낙 쇠약한 상태로 병원을 방문하다 보니 치료기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대부분 주거취약자들이라 퇴원하더라도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정권에서는 '도덕적 해이'라고 이들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정권의 '도덕적 해이'일 뿐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집을 보장하지 않는 것,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의료보장을 확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권의 '도덕적 해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응급실은 응급실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실이 되기도 하고 중환자실이 되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병상은 늘 가득차있었고 반드시 병실로 옮겨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언제 다시 병원을 방문하게 될지 모르더라도 퇴원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그렇게 응급실은 가득차있는 날이었다. 호흡곤란과 흉통으로 40대 중반으로 기억되는 남자가 내원했다. 환자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빈 침대가 없어서 매트리스 하나를 깔고 바닥에 눕혀 급한 대로 검사들을 진행했다. 기본적인 검사들을 마치고 나니 폐암이 의심되어 본격적인 검사들을 시행하기로 했다. CT를 찍고 돌아왔을 때 침대 하나를 마련하여 자리에 눕혔고 산소를 공급하면서 수액치료와 진통제 주사 등을 시작하였다. CT 결과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폐뿐만 아니라 간, 뼈, 부신에더 암세포 덩어리가 득시글대고 있어 어디에서 시작된 암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시작된 것이든 이미 말기로 진행한 상태고 수술이든, 항암제든 치료를 시작하는 것과 시작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처음 환자가 내원했을 때 이전에도 비슷한 증상을 느낀 적이 있냐는 질문을 했었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때는 어떻게 했었는지, 호흡곤란이나 흉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등을 물었을 때 그는 그냥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먹거나 집에서 좀 쉬거나 했다고 했다. 이번에는 증상이 오래가고 심해져서 열흘 가량을 집에서 혼자 뒹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경찰서로 갔고 병원에 데려다달라고 요청하여 경찰차를 타고 응급실로 왔다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그 환자는 내원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나 사망하였다. 산소호흡기를 이용하여 2-3일 정도 버티다가 끝내 사망하였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로 앉아있다가 며칠이 지나고서는 거의 혼수상태가 되어 쓰러지듯 누워만 있었다. 아무리 진통제를 주사하여도 통증은 거의 조절되지 않았고 호흡곤란은 심해져만 갔다.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만났던 환자들 중에 기억나는 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니다. 이 환자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그가 처음 호흡곤란을, 혹은 흉통을 느꼈을 때 동네병원이라도 가볼 수 있었다면 결말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이 아니더라도 세네번, 대여섯번째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근처 병원을 방문할 수 있었다면 결말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가 건강보험 가입자들에게 제공되는 검진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가 안정된 일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적정한 주거를 보장받고 있었다면 그렇게 혼자 죽어가지는 않을 수 있었을 게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건강보험은 아파서 죽기 전에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인 제도가 아니다. 이 제도는 국가의 의료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 그 성격과 내용이 어떤지에 따라 민중의 건강은 크게 달라진다. 우리에게 낡은 버스와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도로, 낙후한 삶으로 기억될 지도 모르는 쿠바가 낮은 사망률과 높은 평균수명 등을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엄청난 돈을 쏟아붓더라도 그것이 기업의 이윤으로만 돌아가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예방은 커녕 필요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그 점을 충분히 보여준다.

 

16일 국무회의에서는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병원의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별 것 아닌 듯 보일 수도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국인 진료의 허용 자체가 아니다. 경제자유구역에 들어설 외국병원은 영리법인도 허용되고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한국의 모든 병원에 영리법인이 허용되고 건강보험 지정 요양기관을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준다. 이전부터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꾸준한 준비를 해왔던 삼성이 선두에 서지 않을까 싶다. 이 다큐는 한국의 건강보험제도가 충분히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정확히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한편, 본격적인 민간의료보험제도 도입의 물꼬가 터진 시점에서 또한 정확히 한국의 미래를 보여준다. 

 

사유화는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 게다가 '아픈'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를 불건강하게 만드는 전면적인 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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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2 13:36 2004/11/2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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