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앞 날개 소개에 따르면 '중국의 촉망받는 제 3세대 작가'라고 되어있는데, 누가 1세대고 2세대인지, 그리고 60년 생인 작가가 어떤 의미에서 제 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지는 물론 전혀 알고 있지 않다. 한 달 전쯤 사 놓고는 어제 저녁 문득 꺼내어 귤 까먹으면서 읽다.

 

 허삼관은 책 주인공 이름이고, 매혈기란 말 그대로 피를 파는 이야기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선 인간의 피나 장기를 현금으로 매매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철학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 똑같은 인간이 노동의 댓가로 돈을 받고, 그 똑같은 인간이 죽으면 보험회사는 그 인생의 가치를 정확하게 돈으로 환산하여 현금으로 지급하는 세상이다. 게다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얼굴과 몸매를 사고 팔고 있지 않은가. 이제 사람들은 놀 때도 돈 없으면 못 논다. 어릴 때 우리가 하던 말뚝박기, 오징어, 돈까스, 잣치기와 지금 아이들이 하는 컴퓨터 오락, 플레이스테이션을 비교해보라. 김 훈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놀면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거는 노는게 아니라 노동의 연장이다. 돈에 의지하지 않으면 못 노는 거는 돈 버는 노동세계와 연결돼 있어서 노는 게 아니다.노는 거는 그 자리에 있는 세상 하고 단 둘이 노는 거다."

 

 여하튼, 돈은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처럼 우리 삶의 운영 체제가 된지 오래인 것이다. 이미 지하시장에서 장기가 현금 매매되는 현실 속에서, 수혈할 때 주는 빵과 우유는 그러므로, 이 사회가 돈에 대해 지키는 거의 마지막의 위선적 자존심이다. 다른 말로, "눈 가리고 아옹하다"는 속담이 들어맞는 가장 적합한 예이다. 이는 또한 처음엔 빵과 우유이던 '선물'이 점점 환금성이 높은 영화표나 문화상품권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정부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 피마저 중국에서 수입하는 현실에서 매혈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그에 따르는 돌이킬 수 없는 씁쓸함은 우리의 몫이다.  

 

허삼관은 공장에 다닌다. 우연히 피를 팔면 몇 달 치 월급에 해당되는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피를 팔아 받은 돈으로 같은 공장에 다니는 여자와 결혼한다. 아들 셋을 낳는다.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하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난다. 첫째 아들이 아파서 피를 팔고, 둘째 아들 공장의 대장에게 밥 대접하기 위해 피를 팔고, 먹을 것이 없어 가족이 모두 굶주리다가 피를 팔아 국수를 먹으러 간다. 허삼관은 예순이 되고,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맛난게 먹고 싶어, 아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 피를 팔자, 는 생각이 들어 병원을 찾지만, 이제 늙었다고 퇴짜맞는다.

 

 별난 사건도 없고, 대량학살도 없고, 은근한 에로티시즘도 없고, 불타는 사랑도, 심오한 철학 문장도 없이 그냥 술술 읽히는 책인데 이상하게도 책장을 덮고 나면 문득문득 오래오래 생각나는 책이다. 저자의 간결한 문장과 보일 듯 말듯 비치는 해학이 줄거리 속의 굶주림, 아픔, 짜증, 슬픔들을 발효시켜 기묘하게도 책은 건강한 향내를 풍긴다. 맘에 안들면 깽판 부리고, 큰 아들이 자기 씨가 아니라고 국수 먹으러 갈 땐 빼놓고 가고, 빈정빈정 게으름이나 피우는 허삼관이 허영심 강하고 말 많은 부인을 위해 도시락 밑에 고기를 숨겨서 가고, 어찌보면 남의 자식인 큰 아들을 위해 사흘에 세 번 피를 팔며 돈을 구할 때, 허삼관은 교환가치가 되어버린 '피'를 팔아 무엇과도 교환될 수 없는 삶다운 삶을 겨우겨우 꾸역꾸역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같이 늙은 아내를 앞에 두고 맛난 돼지 간을 먹으며 젊은 것들에게 이렇게 한 마디할 자격이 있다.

 

 "그걸 가리켜서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의뭉스럽게 눙치면서 뭉개는 듯하면서 삶에 대한 튼튼한 믿음을 슬쩍 건네는 꼴이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이 좋아하실만 하다. 선생은 "백만원군을 만난 느낌이었다......늙어가는 머리를 젊게하는 처방으로 가뭄에 단비같은 신선함이 있었다"고 책 뒤에 썼다.

 

(멍멍 의 블로그 '날'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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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0 00:13 2004/11/20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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