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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차별'에 대하여 - 외뿔기린

자신이 차별받은 적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그런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정도와 횟수는 다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차별이라는 것은 일상적이다. 그렇다면 차별은 언제 일어나는가? 어떤 대상이 나 홀로 존재할 때 차별은 발생되지 않는다. 차별은 다수의 존재들 간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등장하는 것이다. 대상들 간의 비교와 대조는 그들 사이의 어떤 ‘차이’를 드러내고 그 차이는 곧잘 ‘차별’로 이어지곤 한다.

 

사례1.

 

"소수자는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적 편견 속에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데 소수자들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소수자도 사회 주류가 될 수 있고 주류가 됨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 소수자 속에 장애인, 외국인, 트랜스젠더 등이 있다. 이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면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 자체를 뒤집어놓지는 않는다. 그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차이는 남들이 갖지 못한 개성이다. 그래서 차이를 인정해주면 다양한 개성들이 다양한 능력으로 재창조된다. (...) 이제 더 이상 똑같은 것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름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그리고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국민의식이 필요하다."

- 경향신문, “<희망솟대> ‘차별’에서 ‘차이’로,” (2007.08.30.)

 

사례2.

 

"'다름'과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틀림'과 '차별'로 비약시키지 않는다면 가정과 사회는 물론 국가 간의 관계도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헤아려 보면 그 다름과 차이라는 게 하잘 것 없이 작기 마련이고, 그 또한 제 나름의 특성으로 인정해버리면 시비의 소지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라진다."

- 연합뉴스, “<연합칼럼> ‘다름’ vs ‘차이’, ‘틀림’ vs ‘차별’,” (2006.10.20.)

 

 

우리가 ‘차별’을 사고하고 그 사유를 통해 대안적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위와 같은 논리가 곧잘 동원되곤 한다. 좋다. 차별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너와 내가 다르다는 차이를 “남들이 갖지 못한 개성” 혹은 “제 나름의 특성”으로 인정한다면, “소수자도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고, “시비의 소지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라”지며 아름답고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유레카! 브라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진정으로 의식적인 수준에서 ‘차별’을 ‘차이’로 바꾸기만 한다면 장밋빛 미래사회가 펼쳐질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전환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차별을 사회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만 할 ‘악덕’으로 생각하고 차이를 ‘똘레랑스’(tolérance; 관용)적인 어떤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안이한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러한 생각 자체가 오히려 '차별적'이라고 느낀다.

 

우선, 이러한 입장에는 주장만 있을 뿐 그 내용과 전략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그러한 인식의 변화 혹은 전환을 종용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하고 있다. 의식만 바꾸면 모든 것들이 순조로워 진단다. ‘그래, 진리라는 것은 단순하며 그것은 단지 실천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좋아. 좋다구. 하지만 어떻게 실천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의식을 바꿀 수 있다는 거지? 모든 사람들이 바꿔야 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일 년 동안에도 수십 차례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손가락이 앙 물고 있는 또 한 개비의 담배를 발견하곤 하는 나로서는 그러한 주장에 의구심만 일 따름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모든 것들이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는데 있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 ‘사회’는 연산 과정 속에 있지 않고 결과 속에서만 힐끗 등장할 뿐이다. 결국 차별을 하는 것도 차별을 당하는 것도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문제일 뿐이며 그 차별 방정식의 해(solution)가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차별이 단지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면 개개인의 의식만 변화 된다면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차별은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깊이 있고 치밀한 통찰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통감한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별 금지를 제도적인 것(즉 ‘법’ 같은 것)으로 명문화 한다면 어떨까? ㅡ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생각해볼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일단 여기서는 두 가지 문제점, 혹은 생각해 볼 것들만을 말해보겠다. 우선 첫째로, 제도로 규정 되는 것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 어디까지가 차별인가? 그리고 차별이라고 공인된 행위들을 금지하는데 무게 추를 둘 것인가, 아니면 차별의 효과들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데 ㅡ 예를 들면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 같은 것 ㅡ 무게 추를 둘 것인가? 등등의 물음에 대해 제도는 어떤 하나의 태도 혹은 입장을 취해야만 제도로서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태도와 입장은 ‘사회 통념’과 ‘상식’이라는 미명 하에 현존 사회의 틀에 부합되는 것들이 선택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 것인가?

둘째로, 제도로 규정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현대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평등 이념의 기초는 ‘법 앞의 평등’이다. 하지만 법 앞에서의 평등은 곧 ‘법 앞에서 만의 평등’을 의미하게 되고, 법에 관련되지 않은 것에서의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차별금지법”과 같은 것들이 제도화 된다고 하더라도 법망을 벗어나는 곳에서는 차별이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며 어쩌면 오히려 강화될 수도 있다. 그것은 아무리 촘촘하게 법 조항들을 짜 넣는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정신과 활동 모두를 단어들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법으로 명문화되지 않은 차별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법으로 환원되면서 국가(특히 사법)에 대한 사회의 종속도는 심화되며 사회의 판단력은 점점 더 흐리멍덩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럴 경우 권리의 요구와 투쟁의 논거 또한 사물화된 어떤 것 혹은 (예를 들면 저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인권선언과 같은) 법화된 무엇만이 인정될 것이며 그렇게 법과 제도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넘어서 사고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각설하고, 다시 돌아가 보자면 위의 사례들이 주장하는 바는 그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차별적일 수 있다. 차별이란 차등을 두어 구별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위계화’(hierarchism)이다. 하지만 이 위계는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되어 있다. 따라서 외면적으로 위계 수준을 평준화 시켰다고 해서 절대로 관계가 평등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 드러나지 않는 위계들이 여전히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렇기에, 표면상의 평등을 주장하고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절대로 차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권리를 가진 자들의 기만이고 현실의 사회 구조에 안주하고자 하는 자기 합리화일 수 있다. 그것은 차이를 이야기 하면서 오히려 차이를 없애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차이는 ‘차이들 간의 차이 없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차이에는 사회적인 위계와 권력관계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드러난 돌기가 바로 차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권력관계는 그 자체가 사회적이다. 즉 그 위계가 현대 사회 구조와 틀 속에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사회를 벗어나 생활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이라는 것을 개인적인 것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 차별을 차이로 대치시키고 차이들을 평준화하는 것이 바로 그 드러나지 않은 사회의 권력관계와 위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일이며, 그렇기에 그 자체가 오히려 또 다른 차별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만 단지 인간이 아닌 권리를 가진 시민이 될 수 있다. 헤겔의 보편과 특수에 대한 변증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어떤 사람이 분명한 시민신분을 설명해주는 특수한 사회정치적 정체성을 박탈당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접받지 못하게 된다.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 즉 ‘헐벗은 생명’(bare life)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회 속에서의 혹은 사회라는 체에 의해 걸러진 ‘차이’를 사고하지 않고서 개인의 차이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저 너머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추상적인 ‘보편적 인권’을 말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실질적인 권리의 영역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한 개인이 “인간 일반으로 환원되고 그럼으로써 나의 직업, 성, 시민권, 종교, 민족적 정체성 등과 무관하게 개인에게 속하는 저 ‘보편적 인권들’의 이상적 담지자가 되는 바로 그 순간, 역설적으로 개인은 인권을 박탈당한다”는 지젝의 말을 상기해 보라. 따라서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권리’ 요구는 단순한 인간 종의 동일성에 기초한 요구가 아니라 정확히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의 권리를 가지는 시민에 대한 요구이다.

일찍이 맑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동등한 권리”는 “불평등에 대한 권리”라고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 개인들에게 각자의 노동에 비례하여 보상이 돌아가도록 기능하는 ‘기여원칙’(contribution principle)이 생산자들의 천부적 재능의 차이와 부양가족의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오히려 불평등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평등을 위한 불평등,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차별을 주장했다. 잠깐, 나는 여기서 맑스가 예기한 혁명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혁명이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 속에서 혁명은 요원하기만 하다. 또한 나는 여기서 구체적 전략이나 대안을 이야기 하려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본인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차이들 간의 차이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를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정치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 동시에 우리 공동체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영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하나의 공동체나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이들의 사회적 돌기인 차별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드러내야 한다. 단순히 존재를 인정받고 존재가 용인 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차이를 욕망하고 차별을 공격하며 그것을 전유해야 한다. 권리를 가진 이들의 시각에서 보여지는 차이가 아니라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들에 의한,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시각에서 비교하고 대조한, 차이와 차별을 드러내고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통해 투쟁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상상하고 기성 사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공간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러한 방향 속에서라야 최소한 앞의 사례들과 같은 관계 없는 개인들의 차이 없는 존재 인정 수준을 넘어서서 '다름'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하고 관계의 전략을 구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by 외뿔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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