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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해링(Keith Haring)의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의 그림들이 ‘너무도 무성적(無性的)이기에 오히려 성적(性的)이고, 너무도 정치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정치적이다’라고 생각했다.* 섹슈얼리티의 삭제는, 다원성을 말하면서도 지배적·주도적인 “주체”가 주변을 대상화시키는 포스트모던적인 아량과 관용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뺄셈의 크기가 소수성에 대한 억압과 편견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문제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 <열대병>의 첫 느낌이 바로 그러했다. 등장인물들이 가꿔가는 사랑은 소수적인 사랑이지만(혹은 사랑이기에)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화는 그 소수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퀴어 영화들이 보여주곤 하는 성소수자들의 치열한 정체성 고민이라든가 주변 환경과의 갈등 같은 것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통”의 어머니는 “켕”의 고백이 담긴 쪽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들에게 건네고, 두 사람의 애정행위를 목격한 아주머니는 외려 꽃을 사주라고 부추긴다. 이처럼 영화는 소수자들의 사랑과 생활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뺄셈을 통해 다수자들의 억압과 편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이라는 야수는 끊임없이 ‘자기-검열’의 조련사와 충돌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이 양자 사이의 추격전으로 인한 내부의 갈등으로 읽을 수 있다. 영화에서 야수는 ‘통’이자 ‘유령’이고, 조련사는 ‘켕’이기도 하고 ‘군인’이기도 하다. 유령을 사냥하려는 군인의 고독한 기다림과 팽팽한 긴장감은,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표범과 노인의 대결장면을 연상시키면서, 관객의 시각보다는 청각을 자극하고 촉각을 곤두서게 만든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흥미로운 장면은 군인이 유령을 살해한 후 호랑이와 대면했을 때이다. 욕망을 제압하고 뿌리 뽑았다고 생각한 그 곳에 또 다른 욕망이(어쩌면 보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형태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에 철퇴를 가하고 있는 국가와 정권의 폭력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스스로 규율하게 되었다. 권력은 자신들에게 친숙한 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위협을 가하면서, 우리 자신이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토목사업에 착수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우리의 욕망들은 결코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 제시한 '안전한' 도로를 벗어나 걷고 또 뛰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설령 그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를 원한다. 소수성은 셈해지는 숫자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소수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이고 고정적인 틀에서 끊임없이 이탈하고 탈주하기 때문에 소수적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군인이 호랑이를 응시하며 “이제 노래를 부르자. 행복의 노래를”이라고 읊조리던 것처럼, 우리도 소수적이고자 하는 욕망을 인정하고 그 욕망과의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조련사와 야수를 대면시켜야 한다. 야수를 응시하자. 그리고 그 야수와 함께 나아가자.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바로 그 길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진짜' 우리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by 외뿔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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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언급한 키스해링의 그림들은 섹스나 젠더 모두가 삭제된 작품들에 한정됨을 밝혀둔다. 물론 해링의 그림들 중에는 성기가 노골적으로 묘사된 것들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그림들은 또다른 섹슈얼리티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젠더 없는 섹스, 인격성 없는 섹스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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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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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 “켕”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 외부가 아닌 오히려 그들 내부의 “조련사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자막 (“인간은 본래부터 야수성을 지닌 존재이며, 그 야수성을 잠재우는 능숙한 조련사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은 욕망을 스스로 규율해야 한다는 것, 혹은 욕망에 대한 “자기-검열”을 의미한다. 위협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나온다. 외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내부에서 미리 스스로를 검열하고 억압하며 규율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소수성, 주변성의 위치에 있는 경우 ‘조련사’의 채찍질은 더욱더 매서울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꽃 파는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동승과 두 농부들에 관한 일화는 이러한 ‘자기-검열’ 과정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만족할 줄 모르면 모두를 잃게 된다’는, ‘욕심을 부리면, 욕망에 따라 행동하면 안 된다’는 금언으로서 말이다.흥미로운 영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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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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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권력이 제시한 '안전한' 도로를 벗어나 걷고 또 뛰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설령 그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를 원한다.(음... 가끔 어떤 글에는 다른 얘길 덧붙이는 것보다 인상적인 구절을 되뇌어보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좀 있더라오... 난 사실 영화나 그림은 잘 모르지만 저 말은 볼 때마다 굵은 글씨처럼 와 닿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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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의 문법이 타 영화와 다르다는 것에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뿐, 기타 공감 안되는 여러 수사들은 그저 이 영화를 보고 시간을 날려먹은 관객들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나 싶음... 위 글 또한 그렇고... 끼워맞추기식으로 아무리 써봐야 ㅋ 설사 위의 해석이 감독의 의도와 일치한다 한들 클리셰나 다를바 없는 주제의식인지라 하품만 나올 뿐.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