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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폭력이냐? _청올

- ‘누군가에게는’ ‘어떤 이유가 있다면’ ‘조금쯤’ 함부로 해도 좋은가?

 

폭력이다/아니다, 라는 이분법으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가도,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가 그 행동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을 때 결국 그 이분법에 의지하게 되는 당혹스러움이란.... 

 

용산 참사 추모 집회가 있던 주말 판넬을 세워두고 집회 하던 어떤 이들도 그랬다. 한순간 자신들의 집회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 노숙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술취한 목소리로 허공에 몇 번 화풀이로 소리지르다가, 갑자기 판넬들 세워둔 쪽으로 다가가더니 판넬 하나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두 번째 판넬을 또 차려던 찰나- 그 깃발 아래 서 있던 두 청년이 노숙인을 거칠게 몇 번 밀쳐내는가 싶더니 결국 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양쪽에서 붙잡고 땡볕에 하늘을 향해 누운 그의 자세대로 7m 정도를 질질질 바닥에 끌고 와서 내팽개친 것이다. 면티 한 장을 입고 있던 그 아저씨는 티가 들어올려져 등의 맨살도 일부 드러났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유유히 판넬 쪽으로 돌아갔다. 그 노숙인은 한동안 꿈쩍 못하고 뙤약볕에 내버려져 일어나지 못했다. 난 일행을 찾으러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그 순식간의 장면이 충격적이라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최근에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됐지만 짐작도 가능하듯이, 일반적으로 노숙인들(그때 그 사람도)은 수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지하철역사에선 첫 차가 있는 5시 이전에 무조건 역 밖으로 쫓겨나고, 막차 뒤에나 들어갈 수 있고, 행인들의 소리 등 주변 소음에 잠 못 이루어 술을 마셔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는 경우도 많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조금만 툭 쳐도 픽 쓰러질 수 있다고 한다. 

 

망설이다 결국 이쪽(쓰러져 꼼짝 못하는 사람,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의 얼어붙은 시선)에도 시선이 힐끗힐끗 와 꽂히기에 용기를 내어 그 한 명에게 물었다. 혹시 저 아저씨와 이전에 무슨 다른 사연이 있었나? (그것도) 아니라기에 더 확신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했다. 그러나 그가 노숙인으로 보이고 술도 취해 있었고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며 사람을 친 게 아니라 판넬을 찬 것인데, 그냥 제지만 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라고 굳이 저렇게 했어야 하냐는 내 말에 그들은 이런 말들로 받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많이 참은 거다. 보통 같으면 그냥 저렇게 안 보냈고 맞아서 갔을 거다."

"그 사람이 우리 판넬 찬 건 폭력이 아니냐, 언제까지 평화를 외칠(?) 거냐. 우리는 누가 와서 때리면 맞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야 하냐."

"당신 집에 누가 쳐들어와서 접시를 하나씩 둘씩 깨고 있으면 가서 곱게 말로만 '그러지 마세요' 하겠냐"

 

한명씩 한명씩 끼어들면서 결국 일 대 다의 토론(사실은, 그리고 점점, 그 ‘일’인 나에 대한 집단적 감정적 성토? 같은)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잘되는 토론일 리가 없다. 나중에 가세한 또 한 명은 “아줌마”란 표현을 여러 번 섞으며 반말을 해서 내가 “아줌마라고 말하지 말라. 지금 그 말 욕으로 쓰고 있는 것 알고 있다”고 하니 잠시 그 표현만 빼고 말하는 것 같다가 이내 곧 무시하고 욕으로 활용하며 빈정거리길 계속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골똘한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사람은 문득 이렇게도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어서 당사자가 느낄 2차 피해는 생각해 보셨어요? 그 아저씨가 자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걸 보고 느낄 당황이나, 그런 거 생각해 보셨냐구요!” 내가 “그 문제는 저에게만 고민해보라고 말씀하실 건 아니지요”라고 했으나 그는 “거 봐요! 그런 것도 생각 안하고 무슨 말을 해요!”라 하였다;;

 

언제까지 평화를 외칠 거냐고? 집회를 평화적으로 하는 것이 무조건 모든 사람이 떄리는 대로 맞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권력이 부당하게, 전/의경이나 경찰이 무기 없는 시민을 때리거나 밀어붙이면 맞서 싸울 수 있다. 같이 때릴 수도 있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전경 차를 훼손하는 것 정도도 괜찮다(빈 차라면, 그리고 남성들끼리만 들어가 ‘오줌을 싸는’ 짓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명박산성이 사람들의 발길을 (그야말로) ‘폭력’적으로 원천봉쇄했으니 그것을 뚫어버리든 위를 넘어가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숙인 아저씨는 전/의경이 아니다. 집회 당사자들이 그를 질질질 끌고 간 것은 전의경이 시민을 발로 차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공권력에서 평소 받은 스트레스를 그날 그에게 화풀이하듯 쏟아낸 것처럼 보였다.)

 

집에 들어와 접시를 깨는 도둑이라면 나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강할 경우가 많을 터이므로, 나는 정당방위를 (그나마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사연에선가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에 내가 너무 놀라고 방어기제가 발동하느라 그 사람이 약한 것을 몰라보고 지나치게 강하게 제지, 아니 제지가 아니라 보복으로서 훨씬 더 심한 정도로 파괴했다면, 나중에라도 사태가 파악되면 미안해져야 할 것이다(물론 이것도 가택침입과 성폭력 위험에 대한 정당방위 등등을 모두 고려하여 엄정히 따질 문제고 내 문제제기에 대한 대항 비유로는 애초에 잘못된 것이지만).

  

또 한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도 잘못한 점은 있지만 어쩔 수 없기에 해명해야겠어서 나선다. 집회의 효율성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가 없고, 훼방 놓는 사람을 좀 그렇게 한 것이니 이해해야 한다"

  

이 논리는 미안하지만 용산 참사를 일으킨 정부의 논리와도 똑같이 닮았다. "경제 개발과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 너희 살던 사람들은 나가줘야겠다." 그리고 그들은 나가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았다. 그들의 논리에 정부 정도의 공권력이 보태어진다면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 너무 답답했다. 명백히 존재하는 차이와 차별 상황에서 등장하는 말들. "그 사람만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도 피해자다" "왜 그쪽 편만 드느냐, 그가 잘했다는 것이냐" “그가 먼저 폭력을 썼는데 왜 우리한테만 뭐라고 하냐” "우리가 좀 세게 한 건 인정하지만 (어쨌든) 그가 먼저였다." 다들 낯설지 않은 논리다.

 

소위 ‘폭력’이라고 하는 것을 누가 행사하냐에 따라 같은 것이 ‘폭력’이라고 이름붙여져 낙인찍히기도 하고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쉽게 합의되기도 한다. 상대의 것을 ‘폭력’이라고까지 이름붙이기가 민망할 때에는 ‘도발’이라는 알쏭달쏭한 죄목(?)으로 이름지어 불러서라도 기어이 폭력("권한에 따른 응징") 행사가 정당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특정 행위나 상황에 대하여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뜻을 부여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은 기존의 ‘합의’나 ‘권한’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내가 기존의 합의나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돌아보는 일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보기에는 물론 참으로 귀찮고 낯설고 피곤한 일이기에 슬쩍 미뤄지기 쉽다... 그리하여 ‘폭력’ 대 ‘폭력’의 대결에서 한쪽의 ‘폭력’은 정당화되고 다른 ‘폭력’(?)은 가차없이 단죄된다. (센 사람이 보기에) 괘씸하다는 이유로.

 

p. s. 이렇게 공개적으로 고자질하듯 글을 써서 해당 ‘그들’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날은 혼자 수고했으니 쩝;; 내가 계속 ‘그들’이라 칭한 이들에게 이후에는 노숙인에 관련한 영화를 같이 보자고 얘기해볼 가까운 소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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