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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의도적일 수 있다

2008/10/23 22:13 베껴쓰기

필립 퍼키스, <바닷길, 세인트 로렌스, 퀘벡>, 2003.

 

알프레드 히치콕은 영화를 만들 때 절대 내용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지 이야기가 스스로 흘러가도록 분위기만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미리 계획하는 것보다 덜 의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더 의도적일 수 있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면, 내 안에 잠재된 것들까지 끌어내 더욱 역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보다 대략적인 계획 아래

구체적인 부분들을 자신의 본능, 직관, 감각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한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_필립 퍼키스, <사진강의 노트> 52쪽.

 

사람들마다 일을 하는 스타일이 다를 텐데, 일의 세부 요소를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면서 안에서 밖으로 구축해 나오는 사람(음, J차장?)이 있는가 하면, 일단 몇 가지 구획만 대강 그어놓곤 밖에서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사람(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과연?)이 있다. 장단점을 따질 필요는 전혀 없고, 어느 쪽이든 완성된 계획을 가지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손을 떼도 구성물이 혼자 제 힘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조심조심 균형을 맟추는지 다각적으로 확인을 하면서 나와야 한다거나 껍데기와 내부가 제대로 일치하는지 밀고 들어가 봐야(내 문제는 대체로 굴을 판다고 말만 하고 힘들다고 하다 만다는 데 있다) 완성물이 나온다는 거다. 어쨌든 조심조심이든, 들이박기든 자기 안에서 계속해서 뭔가를 꺼내서 맞춰 보다가 어느 순간... 되었다 싶을 때까지 가야 끝이 나온다는 거다. 되었다 싶은 순간을 아는 것... 원고를 다루는 일과 요리하다 간을 맞추는 일이 비슷하긴 한데... 둘 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재료의 특성과 품질, 신선도 등에 맞추는 게 제일이라는 점에서 가장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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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22:13 2008/10/23 22:13

막냉이가 자란다. 나도 자란다.

2008/10/23 00:25 생활감상문

아버지와 음력 생일이 같은 막냉이의 양력 생일은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시월 초가 중간고사라며 스스로 생일 잔치를 반납했다. 엄마와 음력 생일이 같은 내 생일은 얼마 전이었지만, 여고 동창생의 자식 결혼식에 가신다며 부산에 가시는 바람에 막냉이와 합동으로 하려던 생일 가족모임은 연기되었다. 세 자매끼리만이라도 하려던 막냉이 생일파티는 지난 주 오클라샘과 저녁 약속이 있던 관계로 또 미뤄졌고, 두 번인가 주말에 엄마가 따로 밥을 사주신다며 나오라 하셨지만... 처음 계획했던 대로 식구들이 다 모이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통 기운을 못 차려서(불가피한 사정으로 금요일 저녁에 사내 강의가 시작된 이후 체력과 집중력 소모가 상당해서 요즘 애인이나 함께 사는 가족이 있는 동료들을 제외하곤 다들 주말에 방콕 신세다) 딱히 부모님 마음을 상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식욕이 없노라면서.

 

그렇게 해서... 내 생일 파티는 그냥저냥 넘어가고, 지난 주에야 겨우 인터넷으로 골라서 주문한 스니커즈 한 켤레도 전해 줄 겸(본디는 지난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가려 했지만, 제인 오스틴 원작 영화 세 편을 내리 보고, 자고, 요리하느라 계속 집에 있었다) 오늘 저녁을 같이 먹었다.

 

부모님 댁에 가면, 가자마자 저녁 먹고 주말 드라마(가 다행히 재미가 있으면) 보고 독서실에서 12시를 넘겨야 집에 오는 막냉이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 농고 축산학 담당에서 인문고 윤리 담당으로, 또 현장 교사에서 교육관리직으로 승진하는 일련의 과정이 진행될수록 아버지와 소통할 만한 대화 주제는 점점 더 줄어들어 가고...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으면 그만. 나의 의사표현 방식은 점점 집에 가는 빈도수가 줄어드는 것이라... 가끔 가면 좀 화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겨우 안도하는 정도.

 

막냉이가 미국(어학 연수)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에 대한 아버지의 모든 관심은 입시와 관련된 것으로만 조정되었다. 애 좀 풀어 키우라고 뭐라 좀 할라치면... "너도 네 자식 낳아서 똑같이 당해 봐라"라는 (아버지 생각보다 훨씬 심한 타격을 입히는) 말로 대화 종결. 누구라도 좀 숨통을 틔여주는 게 좋을 듯해서... 그녀에게 놀자, 놀아라, 놀면서 해라, 놀아야 잘 된다...라고 해도... 신설 학교/목동 학원가라는 패러다임 안에 사는 아이는 "그거야 언니 얘기고"라며 초조해한다. 그러니 좀처럼 만나기가 어려울 수밖에.

 

길다면 긴... 오로지 입시생으로만 정체성이 형성되는 고등학교 3년의 기간 중에 절반이 지났다. 아버지는 주말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신다. 환갑에 다시 입시생 부모가 되어야 하는 엄마는 자꾸 입시생 지킴이 역할에서 이탈하고 싶어하신다(엄마 친구분들은 다 그럴 나이다. 특히나 엄마는 아직 직장도 다니시니까). 주말에 와서 애 식사 좀 챙겨주라며... 갑자기 전화를 하시면 나는 잘 가지 않는다. 엄마를 생각하면 안 된 일이지만, 급작스런 호출에 자연스레 응하게 되지는 않는다. 늘 엄마에게 마음 약한(또한 가족 안에서 자신을 찾고 싶어하는) Y양이 다녀오곤 내게 투덜거림을 던질 뿐이다.  

 

그래서 간만에 막냉이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한다니, 조금쯤 설레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중간고사 때 수학 답안지 밀려써서, 큰 일이라고, 당장 대학이라도 떨어진 양 호들갑스럽게 전화하시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털어 버리셔야 애도 털고 마음 잡죠"라고 드라이하게 답한게 불과 어제다.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연락에 사무실에서 선물이랑 챙겨서 나오다가... (평소 책 좀 읽으라고 무작정 안기면 부담스러워하는지라 조심조심했지만) 이번에야말로 <공부의 달인>이 필요한 때다 싶어서 한 권 들고 나왔다. 식당 가는 동안 시험지 밀린 것.. 못 들은 척하고 아무 소리 안 했더니...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중간고사 때 수학 답안지 밀려 칠해서 네 문제 더 틀렸다고... 최진실도 죽고, 사람들도 따라 죽고, 자기네 학교에서도 왕따 당한 아이랑 성적 고민하던 아이가 두 명이나 자살하고 해서 자기도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는 소리에 한편으론 철렁하고, 한편으론 잘 넘겼구나 싶어 기특했다.

 

가끔 호사스런 접대 자리나 회식에 참석하는 직장인인 내게는 별로였지만, 오늘 꼭 먹고 싶다는 캘리포니아 롤도 사주고, 나름 신경 써서 고른 신발도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었다. 책을 건네주면서... 공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구들이 모두 말리는데, 이과를 선택한 녀석. 환갑을 넘기신 후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가는 부모님들과 입시생 모드로 살면서, 학교나 학원에서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뭔가 진보적인 이야기(그래봐야 한겨레 창간이나 촛불집회 정도의 주제)가 재미있다는 말들을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워낙 집안에서는 정치 이야기가 금기인지라(엄마와 Y양은 정치 문제로 아버지와 내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을 동네 시끄러운 일로나 생각하지만) 막냉이에게 뭐가 옳으니 그르니라는 말은 나도 별반 꺼내지 않았지만, 스스로 관심을 갖고, 자기 공부의 주제를 스스로 찾고 싶어하는 그녀가 확실히... 짓눌려 있던 내 십대 때보다는 성숙한 듯해서... 나도 편안하니... 네 서사를 찾으라는 (식의) 얘기와 아버지의 지나친 관심에 눌리지 말라는(나는 지난 몇 년 사이에서야 아버지의 학벌 컴플렉스가 아직 치유되지 못했음을 인지했다) 얘기를 했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이미 5년 전에 맏이로서의 권리/책임을 자의든, 타의든 포기한 셈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어떤 순간에 그것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맏이여서가 아니라... 지금처럼... 몇 년 이르게 태어나 몇 년 더 부모님과 한국 사회를 겪어서 조금쯤 덤덤해진 부분들이 있고,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약간의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고... 그게 내가 막냉이와 맺고 있는 느슨한 관계다.

 

물론 아직도 필요하면 그녀에게 가족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주로 나쁜 말버릇이 나타난다던지, 청소 안 하는 것이나, 타인에게 배려 없는 행동을 할 때)이 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래야 하는 순간은 생기지 않는다. 나도 굳이 그럴 생각은 없고. 그래도 뭐 하나... 한번도 안 해준 일을 해주고 싶어서... 밥 먹는 동안 [오늘 도착한] <백석 시집>에서 두 편을 읽어 주었다. 내 기분에 취해 한 일이지만, 다행히 그녀는 즐거워해 주었다. 이 아이가 참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나도 오늘 조금쯤 더 자랐고. 우리의 관계도 그러하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백석, <여성> 3권 5호, 193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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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00:25 2008/10/23 00:25

시간이 필요한 일

2008/10/20 19:17 생활감상문

David J Bellak, 1970, <잉그리드>

 

내키지 않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기로 했지만, 내킴과 내키지 않음, 그럼에도 결국엔 내가 해야 할 일임 등등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어려운 법이라... 더이상 의미 없어지기 전에 해치웠다. 그러곤 기어이 좀 힘들고 서글픈 느낌이 든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나? 그러나 어쩌겠어. 결국 했으니, 그만이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계획을 실행하는 일이 아니라면... 결국 준비된 순간을 맞이해 본 적이 없음을 기억해 낸다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은 나 자신뿐이라면... 애초부터 내가 의도했던 바가 일종의 잉여였음을 내가 인정한다면... 그 잉여에 대한 보상이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들에 아주 드물게만 주어졌을 때조차 어찌나 어색했던지 다시금 떠올린다면... 결국 삶이 내게 가르쳐 온 바가 으쓱거림보다는 겸허함이었음을 받아들인다면... 내 변화와 성장이란...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감당하고, 감사해하는 일에 불과하다. 다만 내게 시간이 좀더 필요할 뿐이다. 지금껏 그랬듯이.

 

 

보탬/

요사이 저녁 무렵 듣기 좋은 음악으론

<사과>(심현정)과 <멋진 하루>(김정범)의 OST를 뽑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을밤에 어떤 음악이든 좋지 않겠냐만은, 또한 누군들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시절이냐만은,

두 음반(과 영화)의 매력은 그저 자기 자신의 황폐함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현정(문소리)가 무작정 사과하는 법을 배우고, 희수(전도연)가 부끄러움과 배려의 능력을 되찾듯이...

자존이란 결국 무언가 행동할 줄 아는 데서 나온다고, 우리가 감히 그래도 된다고 차분히 격려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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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9:17 2008/10/20 19:17

욕심쟁이 혹은 산만함 그 자체

2008/10/14 00:04 생활감상문

지난 주 오클라 샘과 M선배와 함께한 스페인 레스토랑에 갔다가... 공통 화제인 요리 이야기가 한참 나왔다. 일은 '할 때 열심히 하자'주의이고, 삶의 질은 확실한 먹을거리를 제대로 즐기고, 여유롭게 잘 노는 데서 나온다는 데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세 사람인지라... 스승과 제자, 또 10년 아래의 제자 뭐 이런 나이를 초월하여... 삶의 질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구현할지... 한참 수다 떨던 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M선배가 요리를 배우고 싶다 해서... 나도 다니고 싶다고... 같이 배워서 시연회 한번 하자고... 뭐 그래서 오클라 샘 댁의 드넓은 주방까지 빌리기로 하고.... 아예 내년 스승의 날에는 선배가 톱세프를 하고, 내가 보조하면서... 한 상 근사하게 차려보자...로 얘기가 전파되었다.

 

그래서... 오늘밤엔 불현듯... 선배와 다닐 만한 요리학원(저렴하고, 가깝고, 동서양 요리를 망라하는 싱글 전문 요리반)를 알아보기 시작....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난 너무 욕심이 많다. 불과 2주 전까지 살기 힘들어 낑낑거리더니... 흠~~ 또 하나도 제대로 못할 거면서 이것저것 딴데로 눈이 돌아가는군.

 

철학아카데미 정회원(월 1만 원 내면 봄, 여름, 가을, 겨울학기마다 한 강좌를 무료로 듣게 된다)도 가입한 데(이건 약간 할까 말까... 뭐 이러던 상태에서 약간 분위기에 떠밀린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뭐 가끔 듣고 싶은 강의가 있는데 약간 귀찮아하던 거고... 어차피 연락 없이 잠수 타기로 악명 높은 S선생에게 눈도장 찍을 겸 겨울학기는 들을 생각이었으니... 이 참에...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다.... 지난 주부터 요가도 주 3회(월, 수 밤+토욜 아침)나 등록했지, 다음달부턴 중단했던 영어회화도 회사 앞 학원으로 옮겨서 아침마다 다닐 계획이지... 겨울엔 지리산 간다고 걷기 트레이닝도 해야 한다고 결심중이지, 이런 데다가 요리학원까지? 이 와중에 11월 말까지 책 두 권, 내년 초엔 블랑쇼 선집도 출범시킨다(이미 원고도 두 가지나 들어왔다)고 벼르고 있지...

 

에이, 또 이러다가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고... 어쩌려고 그러냐고... 세상에 대충 만들어야 하는 책은 한 권도 없지만, 지금 진행하는 책들은 모두 유달리~ 신경이 쓰이는 책들(생전 처음 저서 내는 양반, 원채 눈이 높은 양반, 블랑쇼 선집의 첫 두 권)인지라... 딴짓하지 말고 편집에만 집중하자고... 여름휴가에서 돌아올 때부터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왔는데.... 중간에 아프고, 여행 다녀오고, 병원 다니고... 겨우겨우 살 만하니까... 이렇게 또 산만해지는가?

 

그러게 어학 공부는 20대에 쫌 열심히 하지, 실컷 놀러다니다... 암기력은 제로에 건망증만 날로 심해지지... 기껏 등록금 내고 철학과 다녔으나 아는 건 별로 없고, 그나마도 학교 졸업한 몇 년 사이 다 까먹은 데다... 운동도 어려서부터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그나마 안전한 요가나 (그것도 목소리 맘에 드는 선생님이랑 한다고 일곱 정거장이나 버스 타고 가서) 배우러 다니는 거고... 세상에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 뭐 일케 없냐고T T....

 

그러니 뭐 산 입에 거미줄 칠까 봐 출판사에 취직한 것도 아니고, 내 나름으로 사명감(정말?, 뭐 어쨌든 초심은 그랬음)을 가지고 선택한 직업인데... 쫌 훈늉해질 때까지 집중해서 하자고... 암만 열심히 주문을 외워도... 나란 인간은 또 이 모냥인 것이다. 무언가 하나를 열심히 하려면.... 자꾸 딴짓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히 원고를 읽을 때는 (어려울 때도 있지만) 중간중간 뭔 말인지 확실히 알겠다 하는 부분에선 감동도 있고, 동료들과 나누는 일에 대한 고민과 감각에서도 늘 조금씩은 변화를 느끼고, 분명히 그러기는 하는데... 그래도 그걸로 다 충족이 안 되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아무 거나 듣기만 하면 다 머리에 쏙쏙 들어가는 듯 오해받던 천재소녀(뭐 그런 시기심 섞인 별명에 상처받던 때도 있었다... 그거지;;) 시절도 이미 다 지났고 뭐라도 하나 배우려면 그만큼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거 참, 어째 나의 에너지는 늘 이렇게 옆으로만 확장되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지.

 

여하간... 뭐가 더 중요한지 쫌 고민해 보고... 두 가지쯤은 미뤄야겠다. 살림도 해야 하고, 중간중간 분명 또 병원도 다녀야 하고, 아프다고 통 못 챙긴 친구들도 만나기는 해야 하고... 9월 이후 부모님께 계속 까칠하게 굴고 있는데... 약간 반성도 해야 하고... ~해야 하고... ~해야 하고.. ~해야 하고... "내키지 않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기"로도 했고... 체력은 약한 데다가... 어쨌든 "책은 잘 만들고 싶으니까". 쩝쩝. 몸이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좋았을 터인데T T... 에잇, 그래도 뭐, 요가 다시 시작했으니까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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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00:04 2008/10/14 00:04

생일 자축

2008/10/11 09:13 생활감상문

<루마니아식 블라우스>, 앙리 마티스, 1940.

 

"살아 있는 모든 날을 축복하라"는 말, 한순간도 허비하지 말라는 말, 뭐 그런 말에 이끌린 지 적어도 3년은 되었으니... 생일과 생일 아닌 날을 구분한다면 언행일치가 안 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도 떠받들려 키워진 온실 속의 화초(?)인지라 축하하고, 축하받을 일 있으면 기념하는 게 좋다.

어쩌면 별다른 이벤트가 없던 우리 집안에서 생일만큼은 이모도 오시고, 친구도 불러 맛있는 것도 해먹고, <빨간머리앤> 흉내내며 초대장 보내서 티파티도 하고, 맛있는 음식 먹은 다음엔 말뚝박기도 하고... 나름 그런 것 다 해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생일이나 기념일 따지는 걸 촌스럽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인이 된 다음에도 졸라서 선물도 받아내고, 매일 마시는 술이지만 기념으로 모여 마셔 주기도 하고... 내 생일 챙겨달라고 안 챙겨 줘도 된다는 지인 생인들 앞장서서 사람들 모아 챙겨 주기도 하고 말이다(별반 어렵지 않은 일이던 게 어째 나랑 친한 사람들은 생일이 비슷해서 1월 하순~2월 초, 아니면 8월 초 등에 몰려 있다. 천칭자리가 원채 물병자리와 사자자리를 좋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生日을 '태어난 날'이 아니라 '모든 날을 축복하기' 위한 하나의 '살아 있는 날'로 생각하면... 뭐 그리 형용모순은 아니니까... 축하하기로 한다. 영아사망율이 높던 시절에 백일, 돌을 크게 기념한 것은 '얘가 이제 곧 죽을 위험은 벗어낫구나.' 뭐 이런 거겠지만.... 갓난애가 아닌데도 살기 힘든 요즘 세상에서 '살아 있는 날'을 기념하는 일은, '살아 있는 나를' 축복하는 일인 것 같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라고.

 

그런데 직장 다니고 친구들과 제각각 생활이 달라지고, 집에서도 독립해서 식구들과도 생일 기념 행사를 주말에 미리 하거나... 뭐 그리 되자... 일종의 생일 주간처럼... 최소 세 그룹(집, H양+누군가들, 회사)과 생일파티를 다 제각각 하기는 하는데... 정작 생일날에는 혼자 지내게 되는 일이 생겨 버렸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기도 하고, 일을 싸가지고 와서 집에서 혼자 보내기도 하고... 초보 편집자 시절에 그러니까... 좀 우울해져서... 서른 살 생일부터는... 정책을 조금 달리하기로 했다. 생일에는 가장 나답게 보내는 것이다. 나를 위한 일을 하는 것. 평소에 시간에 좇겨서 못 하는 일을 꼭 한 가지 이상 하는 것이다. 못해 본 일을 해본다던지. 우리 달님처럼 매번 새로 태어나는 일은 못하지만, 생일을 맞이하여 전에 했던 대로 전에 만난 사람과 똑같은 생일 축하를 받기만 하는 일 대신... 뭔가 안 해본 일을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쯤 하는 것.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한 능력'을 하나 키우는 일이 되니까 내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 되는 셈이다(물론 물적으로도 나한테 선물을 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엄마가 보내주신 맛있는 미역국으로 아침식사 하고, 요가 가서 몸과 마음의 평안을 내게 선물한 다음, '처음으로' 이사 간 필름포럼 가서 영화 보고, 미장원 가서 오랜만에 파마하고, 생일엔 혼자 지낸다는 원칙에 매달릴 것도 없이... 오늘 함께하기로 한 H양과 [뜻하지 않게 같이 놀아준다는] Y양 커플과 저녁 먹고... 내키면... 간만에 [한동안 갈 사람 없다고 못 갔는데... 정 안 되면 혼자라도] 춤을 추러 갈 계획이다. 계획이 너무 많으면 이지러질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상관 없이 오늘 하루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즐기는 일을 아주 잘해서... 매일매일을 그렇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ㅎㅎㅎ 

 

 

보탬/

오늘 필름포럼에 간 것은 <해변의 폴린느>를 보러 간 것인데... 영화 속에서... 내가 저 위에 놓은 마티스 그림이 벽에 포스터로 걸려 있는 장면이 나왔다. 아니,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사실은 마티스의 <붉은 마드라스 쓴 여인>을 걸고 싶었으나... 전에 미니홈피에서 써먹은 적이 있어서.. 아침에 글 전부 쓴 다음에... 마티스 그림 새로 보면서... 내 기분에 어울린다 싶은 그림을 새로이 고른 것인데... 우연이 필연 같고, 로메르와 오늘 제대로 통한 기분이어서 더욱 상큼했다. 물론 영화도 재미있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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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1 09:13 2008/10/11 09:13

시의 한때

2008/10/07 01:37 베껴쓰기

시는, 비록 해설적인 경우에라도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은 승리와 패배로 끝나는 모든 종류의 싸움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끝을 향해 진행해 간다.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의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질러 간다. 시는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값싼 안심이나 마취에 의해서가 아닌, 일단 한번 경험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없다는 약속과 인식에 따른 평화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기념비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여전히 싸움터에 있으면서 누가 기념비를 바랄 수 있겠는가.) 언어야말로, 외치고 요구하는 그 경험들을 받아들이고 깃들이게 하는 안식처라는 사실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_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었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가운데 '시의 한때'에서(굵은 글씨 강조는 내가 했다)


 

보름 정도... 내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책은 존 버거의 것이었다. 지난 달 포스팅하다가 존 버거 할아버지의 염소(<아코디언 주자>라는 소설책에 나온다)를 떠올린 다음엔... 뭐랄까... 그의 굳셈(마초성를 초월하는 남성성? 인간성? 신화적 존재감?)이 몸서리쳐지게 필요해서... 뭐라도 새로 그를 흡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또 열화당에서 나온 얇은 에세이집을 사들였고, [누가 또 열화당 책 아니랄까 봐] 코팅도 안 되어 있는 말똥종이 표지가 상할까... 꽃핑크색 비닐봉지에 담아가지고는 가방 안에 넣어두고... 5분도 좋다, 10분도 좋다... 흡연자가 시시때때로 담배라도 피듯이 읽어 갔다. 책의 3분지 2가 넘으니까 꽤 아까워하면서... 야금야금. 드디어 다 읽었다. 전부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특히 중간중간 나오는 러시아 시... 어렵다).

 

전에는 한번도 인지하지 않았는데... 1927년생인 존 버거 옹도 젊어서 했는지, 늙어서 했는지... 현상학 공부를 열심히 하셨는지... 아니면 혼자 쭈욱~ 생각한 것을 풀어낸 것인지... 9월 이후 작업하고 있는 하이데거 예술철학과 꽤 흡사한 말을 훨씬 쉽게 해준다. 이 책은 에세이고, 내가 잡고 있는 원고는 박사논문이니까... 뭐 당연한 거지만... 여튼... 의도치 않게.. 원고에 대해 감을 잡아주니 기분이 좋기도 했다.

 

뭐 좀 더 할 말이 있어서 몇 줄 베껴놓기는 했는데.... 어케 쓸까 하고 생각만 하다가 2시가 가까워지니까 갑자기 졸리다. 자야겠다. 뭐.. 생각나면 투비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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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01:37 2008/10/07 01:37

금주 선언

2008/10/05 23:07 생활감상문

정작 힘들 때는 술 먹는 걸로 해결했다가는 폐인이라도 될까 보아... 자제하느라 안 마셨는데(뭐 그래도 중국 가서 한두 잔 정도는 했지만)... 조금 살아났다고... 열흘 전에 한약 받아놓고는 지난 8일간 5일 동안 술을 마셨다(심지어 오늘은 처음 만난 사람과도 사케 한 잔을... 쳇). 과음한 날은 한 번도 없지만... 술 먹은 날은 한약을 못 먹으니... 손해로다.

 

오래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술이 땡기는 것도 아닌데...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라는 게 술을 빼놓으면 어색해지는 사이였던 걸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한약 때문에 안 마시겠다고 그냥 말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때마다 약 먹고 있다는 사실이 존재라도 하지 않듯이... 계속 술을 받아 마신 것은... 무의식에서 찾고 있다는 것인가?

 

여하간... 불과 보름 정도만 안 마시면 되는 것이지만... 곧 찾아올 생일 때만 적당히 조절하면... 딱히 술 마실 일도 없고 하니... 잠시만 끊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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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5 23:07 2008/10/05 23:07

2008/10/03 아침

2008/10/03 12:35 생활감상문

 

2008년 9월 15일.

상하이 타이캉루 예술지구 옆 골목에 나와 놀고 있는 아저씨들.

 

오후엔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간만에 밥도 해먹고, 설거지도 하고, 빵도 굽고, 미뤄둔 여행사진도 정리하고,

새로 산 음반도 mp3로 바꿔 하드에 깔아두고... 그러면서 오전 내내 음악도 실컷 듣고...

여유롭다. 이 한가한 기쁨이란~.

 

녹차향 풍기며 막 오븐에서 나온 모닝빵도 여러분께 전하고 싶지만...

그건 못하겠고(오후에 만날 사람들 선물용으로 구운 거라^ ^;;)

음악과 사진만은 공유하고 싶어짐.^ ^

 

상하이 여행 사진 중에 제대로 찍은 인물들 사진 한 컷.

(빨래 찍는 척하면서 몰래 찍었다.^ ^)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오르간 음악 한 곡.

 

 

마티아스 베크만의 오르간 곡을 지그베르트 람페가

바로크 시대에 제작된 교회 오르간으로 원전 연주한 앨범 가운데...

곡명은 "Es ist das Heyl uns Kommen Herr :Secundus versus (Manual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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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12:35 2008/10/03 12:35

사람 되려면 아직 멀었다.

2008/10/01 00:10 생활감상문

배탈 나서 점심은 굶고, 오후에 효나상(HA양)이 사다 준 딸기 요구르트 하나, 둥글레차 두어 잔, 속이 헛헛해 마신 따끈한 녹차라테 한잔.... 그리고 집에 와선 미음 좀 끓여서 몇 숟갈에 간장 타서 먹은지라.... 아직 내가 포스팅 재개할 때가 아닌데... 이건 정말 반성해야 할 것 같아서.... 두고두고 반성하려고 현장기록 차원에서 몇 줄 적는다.(몇 줄 적는다 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배경 설명에 진을 다 빼겠지만)

 

놀다가 늦게 들어와 일단 잠은 잘 잤는데... 새벽에 한기에 떨면서 늦잠도 못 자고 일찍 깼다. 일어나자마자 옥상에 이불솜 갖다 널었다. 시월을 맞이하야 솜이불 덮을 때(해마다 일년에 8개월은 솜이불을 덮고 잔다)가 왔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한기가 들어서 그런지, 대충 차가운 샌드위치랑 야채주스로 아침 때웠더니 배탈 나서 오전 내내 뜨거운 찜질팩 배에 올려놓고... 먹은 게 없으니 기운이 없어서... 이게 장염인가 뭔가... 상하이 다녀온 다음 배앓이가 벌써 몇 번째던가 세보면서... 과민성대장증후군인지, 세균성 장염인지.. 그런 거나 고민하면서.... 몇 번이고 자기한테 시간 맞춰서 겨우 세팅해 놓은(그것도 쉬는 날인 토요일에, 부산영화제 가는 것도 포기하면서 잡아놓은) 모임 갑자기 못 온다는 L선생도, 설득할 기운 없어서 전화도 못하고는 겨우 메일로만 간곡한 참석 압박을 했다. 내일 아침까지 답장 없으면 기운 차려 전화 걸어야지 하고는.

 

그러고 집에 와서 혼자 미음 끓여 몇 술 뜨고는.... 기운 하나 없는 다리로 옥상까지 올라가서는 솜이불 메고 내려오는데... 아~ 정말 오늘 같은 날은 누구 기운 센 사람, 부려 먹을 사람 있으면 좋겠다고... 나도 마누라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도... 뭐 그럴 수는 없으니까... 난 언제까지 기운이 세야 할까... 뭐 그런 생각하면서 후달거리면서... 좀 서글퍼하면서 내려왔다.

 

내일은 회사에 입사한 지 만으로 1년 되는 날. 그리고 울 아버지와 동명이인인 신입사원이 새로 입사하는 날이다. 기념으로 케이크 내기로 했는데... 한약도 먹고 있고, 배탈까지 났으니 더더욱 밀가루는 안 되겠는지라... 소화 안 되는 달걀과 우유도 처리할 겸... 찹쌀케이크 반죽해서 얼른 오븐에 집어넣고 밀린 설겆이 해결하고 있는데... 자꾸 문자가 온다. 이동통신 포인트 썼다는 문자다.

 

안 그래도 아침에 샌드위치 사먹는데... 멤버십카드 없길래... 어제 또 놀다가 어디다 흘렸군... 하고 쩝쩝...했는데... 누가 주워서 그것을 편의점 가서 쓰나 보다 했다. 에휴~ 아침에 정지시켜야지 원.. 하고... 그런데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전화기를 보는데... 10~20분 사이에 포인트 사용 문자가 일곱 통이나 와 있다. 금액도 350원부터 1500원까지... 순식간에 5천 원이다. 뭐 현금은 아니지만, 영화 예매할 때 할인도 되고, 가끔 월급날 케이크 사서 후배들한테 인심 쓸 때도 요긴하고... 일주일에 1리터씩은 꼬박꼬박 사다놓는 우유 살 때도 출근길 편의점에서 할인받아 사는 재미가 쏠쏠한데...(그거 말고는 쓸 데가 없어 30퍼센트도 다 못 썼지만) 괜히 기분이 나쁘다. 자꾸 문자가 오니까. 통신사 홈페이지에 가서 정지 신청을 했지만, 업무시간이 아닌지라 내일 아침에나 반영이 된단다. 이거 이런 식이면 8만 원쯤 남은 포인트... 밤새 다 쓰겠잖아?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이 주워서 이렇게 순식간에 쓸 수가 없다. 이렇게 짜잘하게. 또 곰곰히 생각해 보니... 포인트 카드를 쓴 것은 어제 아침 집앞의 편의점에서였다. 아무래도 이 집 알바생이 의심스럽군. 가봐서... 물건 고르는 척 서 있다가 누가 계산할 때 이게 나오나 안 나오나.. 봐야겠다.... 지갑도 안 가지고 열쇠랑 핸드폰만 들고 슬리퍼 끌고 대문을 나섰다.

 

집에서 해당 편의점까지는 도보로 2~3분 거리. 그런데 가는 사이 또 포인트 사용 문자가 두 통이나 온다. 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열도 더 오른다. 작은 편의점에 들어서서, 계산대를 보는 순간... 이 이름 석 자 멀쩡히 찍혀 있는 멤버쉽카드가 바코드 판독기 앞에 그냥 편안하게 놓여 있다. 아예 내놓고 쓰고 있던 거다.

아마... 어제 아침엔... 편의점 주인 아줌마가 계산을 했는데... 내가 계산하고 놓고 간 것을 주인 아줌마가 챙겨 놓은 것을 알바생이 발견하고... 재미 삼아 손님들 계산할 때 찍어준 모양이다. 자~ 여기서부터 나 사고 치기 시작한다... 다짜고짜.... 카드를 집어 들고..."이걸 누구 허락 받고 사용하지요?"라고 따지기 시작한다. 내가 누군지, 이 카드가 내 것인지... 생략생략.... "이게 남의 거라고 마구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요? 손님 물건인데... 고스란히 간직했다가 찾으러 오면 돌려줘야 할 물건을... 이런 식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요?" 화들짝 놀란 알바생(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죄송합니다. 한번밖에 안 썼습니다."라고 급히 둘러댄다. 아마도... 문자로 포인트 사용 내역이 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거짓말에 난 더 화가 났다. "한 번이라고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전화기 문자 내역 보여 주면서...) "열 번은 썼잖아요." 계산을 하려고 계산대에 다가오다가 내 서슬에 주춤주춤 서 있던 30대 남자 자기도 모르게 전화기 같이 들여다 본다. 마치 그가 증인이라도 된 듯이.... 나는 더 의기양양해져서 목소리가 더 커진다. 밥도 못 먹은 사람이... 좀전까지... 자기 연민에나 빠져 있던 사람이... 아아~ 아무래도 그 자기 연민은 동정이 아니라 분노였나 보다. 쳇. "내가 여기 편의점 코앞에 살아요. 자주 온다고요. 이 카드 주인이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바로 쓴 거죠?" 성질 같아선 10분이고, 20분이고 훈계를 늘어놓고 싶었지만... 더 할 말은 없을 듯해... 그 정도 하고 왔다는 말도 없었든, 간다는 말도 없이 바로 돌아서서 나왔다.

 

그렇게 걸어나온 지 딱 1분쯤 지나서야 후회가 들었다. 익명의 카드 주인을 무시하고, 남의 포인트로 손님들한테 인심 쓴 알바생이나... 익명의 알바생이라고 다짜고짜 화를 낸 나나.... 별반 다를 것도 없건만...  평소 돈 꿔가고도 제때 안 갚는 친구에게 착한 척하고, 식당에게도 아줌마들한테 감사함니다, 고맙습니다 어찌나 생글거리는지, 평소 딸네미 고운 목소리 한 번 듣고 싶어하는(그러나 늘 짜증 섞인 대답밖에 못 듣는) 울 아버지에게 "뭘 그리 비굴하게 구냐"는 질투 섞인 구박까지 받는 내 모습은 다 위선이었나 보다. 어디 성질 부릴 껀수 없나 찾고 있다가... 제대로 걸렸달까?

 

어쨌든 (천지가 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리 지르고 따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왕 날아간 포인트....(이미 10월이라 8만 점이든, 7만 5천 점이든   남은 포인트 다 쓸 일도 없고, 사실 현금도 아니고.... 그래 봐야 통신사 포인트 땡겨다가 편의점 물건 파는 대기업만 좋은 일이고...) 카드만 찾아오면(현금영수증용 카드로 등록되어 있어서 잃어버리면 아깝기는 했다. 재발급하려면 천 원 내야 하기도 하고) 될 일이었는데... 결국 또 돈 문제로 이렇게 밑바닥 보이는구나. 작년에 회사 그만두고 오사카 여행 준비할 때도 예약 상황 놓쳐다가 나중에 더 비싼 코스로 예약하라는, 무책임한 여행사 직원이랑 싸워 놓고도... 반나절을 우울해했는데... 난 왜 이 모냥인지.... 서비스직종의 백화점식 감정 서비스... 너무나 피곤하고 위선적인 일이라고... 안쓰러워하면서도... 내가 강자라는 생각이 들면.... 결국 이런 식이다.

 

그 알바생... 잘못하기는 했지만, 아직 어리고 철없어... 심야에 알바하다가 재미 삼아 그랬을 수도 있는데... 뭐 꼭 나이의 문제는 아니지만, 열 살은 더 먹은 내가... 거기서 그렇게 성질 부릴 이유 없었는데... 아아~ 정말...... 입이 쓰다.... 빨래 개고, 이불솜 끼우고... 정리하면서도... 낯이 뜨겁다. 잊지 말자... 오늘 또 사고 쳤음을. 누군가가 어떤 잘못을 했건, 어떤 사람이건 내가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다. 조용하고 친절한 태도는 남에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꺼내 쓰는 카드가 아닌걸. 그렇게 조심을 하는데도... 이게 참 안 되니.. 난 정말 사람 되려면 멀었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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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1 00:10 2008/10/01 00:10

컴백은 아니지만.

2008/09/25 00:26 생활감상문

피에트 몬드리안, 회색 나무, 1911

 

컴백은 아니지만, 죽을 것 같은 순간은 지나간 듯해서... 우울한 포스팅을 뒤로 넘기는 차원에서 새 포스팅. 완전한 컴백은 아니지만, 터닝포인트는 지난 듯(이라고 믿고 싶다)..... 나란 사람은 그릇이 작아서, 조금만 힘들어도 아프다고 야단인 대신, 그리 오래 힘들어할 능력도 못 되어서... 금세... 다시 살겠다고 나서야 하니 말이다. 뭐, 그게 나의 매력 아니겠어? 뭐 언제는 내가 사는 게 행복하다고 했나? 오늘도 잘 버텼다고 흐뭇해하면 다행이었지.

 

추석에는 준비는 안 되었지만, 계획은 있던지라 상하이로 떠나... 어쨌든 나만의 취향과 서사가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 주말엔 소중한 친구 H양, 사랑스런 오다기리상과 함께 도쿄 산책도 했겠다(<텐텐> 관람). 그제는 한의원 가서 놀라고 지친 횡경막 위로하려 거금 들여 한약도 지었고, 요즘 들어서... 바라거나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몇몇 지인들에게 (심지어 소문으로) 얻은 애정고백에서 위안을 얻었고... 연연하던 관계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분명한 입장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가족과 음... 여하간).. 다운된 상태에서 "업무시간만은 열쒸미 일하자"는 부담에 억눌리는 기분도... 덤덤히 일하는 가운데 적당한 긴장감 정도로 풀리는 듯싶다. 계획을 세울 엄두도 못 내다가, 큰 윤곽이나마 그려놓으니 조금 안심이 된달까?

 

여하튼... 이번에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소양인인 듯. 목소리는 크고, 일은 잘 벌이되 뒤수습은 약하고, 스트레스 받으면 횡경막 부분에 열이 쌓이는 홧병 걸리는 게 딱 소양인이다. 다만 태음인으로 키워져서 맨날 우왕좌왕인 듯. 앞으론 소양인답게, 생긴 대로 잘사는 방법(음, 주로 에너지 발산?) 연구에 초점을 맞추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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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5 00:26 2008/09/25 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