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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9/18
    주변부의 끝에서
    burma
  2. 2007/09/18
    안녕하세요
    burma
  3. 2007/09/18
    설 잘 보내셨습니까
    burma
  4. 2007/09/18
    무국적 난민(3)
    burma
  5. 2007/09/18
    무국적 난민(2)
    burma
  6. 2007/09/18
    안녕하세요
    burma
  7. 2007/09/18
    2005년 2월 1일 후원금 송금내역
    burma
  8. 2007/09/18
    무국적 난민(1)
    burma
  9. 2007/09/18
    초국적 이주노동열차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burma
  10. 2007/09/18
    타이 노동자들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burma

주변부의 끝에서

Name  
   류은숙  (2005-02-20 00:05:11, Hit : 249, Vote : 26)
Subject  
   주변부의 끝에서
주변부의 끝에서
고향, 가족, 그리고 기억...속삭임
글쓴이: Saytan Salw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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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그곳에 마지막으로 가본지 꽤 오래됐다. 그곳은 내가 처음 현장 경험을 한 곳이다. 7.8년전에 그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보이는 곳이었다. 마음에 편견을 갖고서 사람들은 그곳을 걸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곳의 삶을 '느껴'보려 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내가 일을 시작한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그곳이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통해) 타이에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는 수출경제지구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시선이 방콕에 가까운 이 작은 지방을 향하고 있지만,  나는 멀리서 지켜만 볼 뿐이다. 나는 단지 어느날 그곳에서 내 오랜 친구들과 예전처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도 그건 내가 엄마에게 가족을 곧 방문할 것이라고 말할 때와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이주자 친구들도 비슷한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항상 고향에 대한 꿈을 꾸지만, 고향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오늘, 내가 처음 현장 경험을 할 때 찍었던 사진을 보니 기억들이 몰려온다. 상반된 기억이 하나씩 떠오른다. 내게 떠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가 사무실(이주 아동을 위한 작은 학교) 밖으로 나왔을 때 있던 젊은 버마 교사와 어린 Mon족 소년이다.
그애의 이름은 'Oun' (뚱보라는 뜻) 이었다. 그 애는 그게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애의 Mon족 이름을 물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뚱보'였다. Oun의 부모님은 생선을 다루는 작은 공장에서 일했다. 그들 가족은 버마의 Mon주를 떠나 6.7년전에 타이로 왔다. 다른 Mon족 가족들도 비슷했다. Oun의 아버지가 먼저 친구들과 함께 나왔고, 나중에 가족들을 데리러 되돌아갔다.

Oun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얘기했다. "과수원하고 구멍가게가 있었는데도 가족들을 먹여살리기에 충분치 않았어요. Mon족과 버마군대가 교전 상황일 때 힘들었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요. Mon족 군인들이 우리를 보호해줬기 때문에 생계를 꾸릴 수가 있었어요. 나는 전투가 끝나면 상황이 좋아지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나빠졌어요. Mon족 군대가 없어지니까, 버마군대가 와서 원하는 건 뭐든지 가져갔거든요. 쌀, 고무, 도로, 다리 등등 모든 것에 세금을 거뒀어요. 최악의 일은 내 당을 몰수해버린 거죠." 내가 가족을 데려온 이유를 묻자, 그의 대답은 "걱정됐으니까요. 고향에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가요? 차라리 같이 있는게 나으니가요."

나는 타이 정부나 고용주의 관점에서 물어봤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지 '노동력'일 뿐이다. 그러니까 타이는 이주자에게 안전하지 않다. 임시노동허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아내와 아이들은 체포, 구금, 추방당하지 않느냐고. 그러자 Oun의 엄마가 말했다. "한 여성이 자기가 밖에 나가 일하는 동안 아들을 친구에게 돌봐달라고 맡겼어요. 그런데 경찰이 갑자기 사람들을 체포하려 나타나서 아이도 데려갔어요. 그녀는 경찰서에 아들을 찾으로 갔고 결국 둘다 추방당했어요. 남편은 아내와 아들을 국경에서 찾아야 했어요. 요즘 저는 Oun을 집에 두고 나갈 자신이 없어서 애를 데리고 일하러 가요. 경찰이 온다면, 우린 같이 체포될 거예요.  

우리가 이주아동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을 때, 아이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따로 잡힐까봐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이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온다면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아이들은 괜찮을 것이라 약속했다.

이건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런데 요즘 임신한 이주 노동자를 추방하는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이건 아직도 우리가 사람들을 단지 '노동력'으로 볼 뿐이고, 사랑하고 가족을 가질 수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갑자기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때문에 기억에서 깨어났다. 이번 나의 여행은 쓰나미로 인해 자연의 경고를 받은 땅의 슬픔에 빠져드는 일이다. 폐허가 된 길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들을 잃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나는 파도에 남편을 잃은 타보이족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임신상태였다.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같이 살자고 그녀를 데려왔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을때 그 어머니에게는 옷한벌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새 삶을 시작한다. 새로운 형제자매들이 그녀가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기댈수 있는 어깨를 내주고 있다.

연민의 파도가 쓰나미를 거의 말려버렸다. 나는 일상에서 볼 기회가 없었던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 나는 어머니-자연에게 기도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연민을 인류라는 대가족을 건설하는 일로 바꿔낼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이 인간가족은 오직 '우리'만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평화가 올 것이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고인들의 명복을 빌 뿐이라며 고향땅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마음과 몸의 잠시동안의 휴식을 원했고 상실 후의 새 삶을 시작하길 원했다.

내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어머니는 항상 내게 말한다. "네가 아주 지치거든, 집에 오너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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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Name  
   김예영  (2005-02-14 21:17:44, Hit : 190, Vote : 37)
Subject  
   안녕하세요
가입한지는 좀 되었습니다만
처음으로 글을 씁니다

발렌타인데이입니다
초콜릿을 사는 돈을 보니

저 돈을 다 싹쓸이해서...
이런 생각이 마구 드네요

그럼 모두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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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잘 보내셨습니까

Name  
   류은숙  (2005-02-10 23:20:10, Hit : 262, Vote : 37)
Subject  
   설 잘 보내셨습니까
길게만 여겨지던 연휴가 갔습니다. 만원계 여러분 설 잘 보내셨습니까?

전자렌지 앞에서의 몇초가 길게 느껴지고, 잠을 자면 아침이 너무 빨리 오는 것 같고, 일할 때는 시간이 왜이리 부족할 까하고, 사람의 시간감각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연휴에는 왜 이리 시간이 안가나 하면서도 합해서 보면 정말 후딱 지나가 버린 것 같습니다.

언제나 일상이지만,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웬지 서글프게 느껴지니 '새롭게 시작한다'고 말을 해보지요. 만원계 여러분, 낡고 슬픈 기억은 지우시고 새롭고 활기찬 생각과 몸으로 다시 시작하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연휴를 사무실에서 보냈는데, 핌에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태국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그들만의 예정된 잔치로 끝나서 허무하다는 얘기, 다시 생각과 계획을 추스리면서 시작해야 겠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난민학교(제가 난민어린이들의 글에서 소개한 바 있는 Ler Per Her 학교)에서 아동의 인권에 관한 6일간의 워크샵이 예정돼 있는데, 원래 지원하기로 했었던 크리스챤 조직에 내부 문제가 생기고 담당자가 관두는 바람에 지원이 취소돼서 상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워크샵 비용은 1,000달러(약 100만원)라고 하는군요. 저희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감당하기엔 큰 비용이라 저혼자 고민하다가 그냥 고민이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듯 해서 이렇게 얘기하게 됐습니다. 어딘가 길이 있겠지요?

한 해 동안 모든 분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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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난민(3)

Name  
   류은숙  (2005-02-08 14:15:55, Hit : 272, Vote : 36)
Subject  
   무국적 난민(3)
무국적 난민(3)
글쓴이 Chana Damn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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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이들은 희망한다. 언젠가는 자신들이 밟고 있는 이 땅이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날이 오리라고, 방랑의 세월을 끝내고 굳건하게 번성하며 정착할 수 있는 진정한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10여 년 전에, 이들은 법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청색카드를 소지한 남자는 징발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버마 군인들로 인한 악몽은 여전히 이들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시민권이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전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또 한번의 신분증을 얻을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Miyazawa 펀드가 착수한 연구 프로젝트였는데, 이것은 또다른 유형의 서류작업, 소위 그린-레드 카드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공무원들은 제한된 시간 때문이 이들이 사는 지역을 조사하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어떤 종류의 서류가 됐던 괜찮아요. 우리가 그걸 이용할 수만 있다면요", 라고 BoBo는 온갖 색깔의 카드를 손에 쥐고 흔들면서 말했다.  "물론, 이상적인 것은 타이 시민권이겠지요. 우리도 마을 촌장이나 지역구 선거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투표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우리도 여기 살고 있는 주민이니까요. 어떤 종류의 카드가 됐던 우리가 보통 사람들처럼 살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나는 벌써 내 생애 절반을 넘게 살았어요."

"나는 내 애들에게 버마에서 있었던 잔인한 일들에 대해 전혀 얘기하지 않아요. 그건 이미 나에게 지나간 일이예요."라고 Charlie는 말했다.

"버마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도 내 미래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라고 Swe Poe가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도 난민캠프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도망 나왔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이 마을에 정착하게된 이유예요. 캠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국에 평화가 와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이 마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세웠고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우리가 나쁜 건가요?"

Paw Paw 할머니라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어찌됐던, 나는 여기서 살고, 여기서 먹고, 여기서 죽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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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난민(2)

Name  
   류은숙  (2005-02-07 16:44:27, Hit : 290, Vote : 26)
Subject  
   무국적난민(2)
무국적 난민(2)
글쓴이 Chana Damn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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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여기에 친절한 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죠. 그래서 여기 왔어요"라고 Charlie가 말했다.

Charlie의 부모는 단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시적인 피난처를 찾으러 동쪽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도망은 자식들을 위해 새로운 땅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것이었다. 수십년이 흘렀고, 불안한 마음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Paw Paw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가축을 기르고 바나나 잎사귀를 모았다. 일부 사람들은 작은 바나나 정원을 갖고 모자를 만들려고 잎사귀를 수확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작은 가게라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행상인으로 일했다.

"우리는 여기 살아요. 마을에는 불교도도 있고, 기독교인도 이슬람교도도 있어요. 마을 촌장은 기독교인이고요, 그의 측근은 불교도예요. 그들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해요. 마을 행정에서는 어떤 차별도 없어요. 우리는 형제와 자매들처럼 살아요."

"나는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살아요. 어쩔때는 내가 난민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지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떤 신분도 없기 때문에 나는 난민이예요. 당국이 와서 언제든지 우리를 쫓아낼 수 있어요."

이사람 저사람에게 서로 물어보고 나서,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신분서류도 갖고 있지 않은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오렌지 색으로 된 "버마에서 온 이주자" 카드를 갖고 있거나 청색의 "고산지대 거주자" 카드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10km를 벗어나면 경찰이 어디에서나 체포할까봐 너무 겁이 나요. 특히 단속이 심할 때 그래요. 도저히 어디갈 엄두가 안나요. 몇 달동안 여기에 죽 있었죠." Htoo Wa 삼촌은 긴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우리 애들은 출생증명서가 없어요. 애들이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Paw Paw 할머니가 말했다.

이 때, 스무살 쯤 된 Swe Poe가 얘기에 끼어들었다. "10학년이 됐을 때, 친구들처럼 주니어 군사 훈련을 받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가진 건 청색 카드였어요. 그래서 학교를 그만뒀죠. 너무 창피했어요. 선거가 있을 때, 18세가 넘은 모든 학생들이 등록을 하려고 줄을 섰는데, 나 혼자 교실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또한 나는 학교 체육 선수였는데, 지역 차원의 대회가 있을 때 나갈 수 없었어요. 나에게 신분서류가 없었기 때문이죠. 정말 창피했어요."

그들이 가진 청색카드에는 "고산지대인이 아닌 버마 소수민족"이란 소인이 찍혀있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타이 시민권을 얻는데는 문제가 있을테니 고산지대인이 돼야 한다고 했어요." Swe Poe의 눈에는 많은 질문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카렌족이라 생각하는데 타이인들은 그런 우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버마인들은 우리가 버마인이 아니라고 했어요. 우리가 인도인이나 방글라데시인에게 가서 요청한데도 역시 우리를 환영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어떤 소수민족에 속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가 오직 알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언제쯤 돼야 우리를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놔둘 건 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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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Name  
   이남윤  (2005-02-03 09:33:13, Hit : 287, Vote : 35)
Subject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이곳에 들렀고 바로 가입을 했습니다.
전 지금 중국에 있습니다. 일을 하고 있어요.
평소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마음 한편으로 그곳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만원계의 취지와 맞는것 같습니다.
만원계에 가입을 하면 만원을 내야하는 거죠?
한달에 한번씩인가요?
그럼...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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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1일 후원금 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5-02-01 12:07:10, Hit : 251, Vote : 28)
Subject  
   2005년 2월 1일 후원금 송금내역
1월에 모아진 후원금 150달러를 오늘 송금했습니다. 지난번과 같이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이름의 일부를 지웠습니다. 그리고 매달 내는 것이 번거롭다고 몇달치를 한꺼번에 주신 분들이 계셔서 매달 보내는 송금액의 편차가 클까하여 평균수준이 될 150달러에 맞춰 송금했기 때문에 잔액이 생긴 것입니다. '국경없는 친구들'과 함께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역

2004년 12월 잔액 11,020원
1월 3일 김태* 1만
          유해* 1만
1월 4일 최은*  6만
1월 10일 조대* 1만
1월 14일 김예* 2만
1월 25일 이민* 1만
1월 26일 황수* 1만5천
            이민* 1만
1월 31일 류재* 2만
            구태* 1만
            강대* 1만
            류은*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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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6,020원

2005년 2월 1일 송금 150달러(160,185원)

잔액: 45,83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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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난민(1)

Name  
   류은숙  (2005-01-26 11:41:17, Hit : 236, Vote : 28)
Subject  
   무국적 난민(1)
무국적 난민
Chana Damnem

머리말
서쪽 국경. 수십만명의 난민들의 캠프. 생명과 인간 존엄성이 위협받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국제법에서 "난민"이란 용어의 뜻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인간으로서 난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제한될 수 없다. 난민 자신들은 평화로운 삶을 강탈당했고, 그래서 도망쳐야 했으며, 식량이나 의약품을 찾아서라기보다는 새롭고 평화로운 삶을 찾아서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새롭고 평화로운 삶이 영원할 수 없다하더라도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난민캠프 바깥. 무수한 난민이 국경변 마을속에 숨어있다. 일부는 대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로서의 운명을 버텨내고 있거나, 또 일부는 고향의 미래를 위해 재정상황이 어려운 사무실에서 지하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불법 이주자로 분류된다. 그들 중 일부에게는 소멸 날짜가 적힌 갖은 종류의 서류에 적혀 있듯이 단지 일시적으로만 머물 것이 허락된다.  

작년에, 우리에게는 캠프 바깥에 사는 난민들을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생활에 대해, 문제와 희망에 대해 얘기했다. 이어지는 얘기는 국경을 여행하면서 있었던 얘기의 일부이다. 그들의 신변을 위해 이름과 장소는 모두 바꾸었다.

1. 지난 여름. 큰 나무집 아래, 노령의 여성-Naw Paw Paw-이 친구들을 데려왔고, 우리는 둥글게 둘러앉았다.

Paw Paw 할머니는 타이에 34년간 살았고, 다른 사람들은 약 20년동안 여기 정착해 살았다. 일부는 가족들과 함께 왔는데 나머지 가족들은 아직 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어떤 국가에게도 시민권을 청구할 수도 없고, 하나의 민족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드러낼 수도 없다. 이들에게는 사람들이 시빗거리로 삼을 수 있는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내 언어요?" Charlie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없지요. 나는 카렌어를 말해요. 타이 사람을 만나면 타이어를 말하고요. 우리 선조들은 모두 버마에서 돌아가셨어요. 내 할아버지는 인도나 방글라데시 출신일 것예요. 하지만 나머지 선조들은 카렌족이예요."

"하지만 우리는 인도나 방글라데시에 대해 전혀 몰라요. 거기에 친척이 있는지도 모르죠." 다른 사람들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들이 이주한 이유는 국경지대 캠프내의 다른 난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일부는 다른 Kawthoolei족과 함께 도망쳤고, 일부는 독자적으로 타이에 있는 친척들을 찾아왔다. 일부는 마을에 정착하기 전에 임시적으로 난민캠프에서 보냈고, 일부는 10여 년을 국경지대를 떠돌고 나서야 살아도 좋다고 하는 지역에 정착했다.
그들의 고향에서 무슬림은 버마인의 신분증을 얻기 위해서는 십만 차트(버마의 화폐단위)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국가 공무원들은 일단 그들이 무슬림이란 것을 알기만 하면 어느 소수민족에 속하느냐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따로 취급했다.

"무슬림은 학교 졸업증을 받으려면 별도의 돈을 내야만 했어요. 결혼을 하더라도 허가를 요청해야 했고, 1-2십만 차트의 돈을 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강제로 신부와 동참하거나 체포하려 했어요."

"어떤 평화도 없었기 때문에 떠날수밖에요." Charlie는 회상했다. "우리 마을에는 버마군과 Kawthoolei족 군인들이 다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항상 물건들을 가져갔어요. 버마군쪽이 더 지독했죠. 빼앗을 식량이 없으면 그들은 우리를 묶어놓고 때리거나 죽였어요. 전투가 벌어지면 짐꾼을 데리러 왔는데, 남성이 없으면 여성을 데려갔어요."

"버마군들에게 강간은 일상적인 일이었어요", Bo Bo라는 사람이 말했다.

이들은 카렌족 지역에서도 소수자에 속했기 때문에, 어느 편에서나 억압을 당했다. 버마정부는 무슬림을 공격할 때는 어떤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Kqwthoole족 군대는 무슬림을 같은 종족으로 보지 않았기에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버마에는, 엄청난 불신과 적대감이 있어요. 전단에는 무슬림은 버마인이 아니며 넓게 퍼지기 전에 뿌리뽑아버려야 한다고 적혀있어요." Bo Bo가 말했다.

"이걸 얘기하지요" Paw Paw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물건들을 운반했고 매를 맞았어요. 내 땅에 농사 지으러 가면 체포됐어요. 내가 키우는 것은 뭐든지 빼앗겼어요. 버마군은 나에게 닭을 사오라고 말하고, Kawthoolei 족 군인들은 그러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나는 양쪽 군인들이 다 무서웠지요.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들은 고향을 떠났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길어서 다음번에 마저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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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적 이주노동열차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Name  
   류은숙  (2005-01-21 16:01:07, Hit : 272, Vote : 37)
Subject  
   초국적 이주노동열차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초국적 이주노동자 열차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on board Transnational Migrants Train)
Saithan Salween이 쓴 글

감시당하고, 추적 당하는 생활, 그런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련돼온 나는 보다 명확하고 생생하게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내 상상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내가 상상해낸 그림은 기차를 탄 내 모습이다. 나는 기차에 앉아서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은 에어컨디셔너가 작동되는 1등석에서부터 붐비고, 냄새나고, 허리가 아픈 의자로 이뤄진 3등칸에까지 앉아있거나 누워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자기 목적지에 닿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 열차에 올라탄 자기만의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희망은 결국 만사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꿈이 실현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본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 꿈 때문에 사람들은 이 열차에 올라타거나 기차 뒤에 매달리거나 혹은 죽는다.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이 기차의 지붕에 올라가거나 승강계단에 앉아있다. 어떤 사람들은 "국민-국가"라는 차장에게 잡힌다. 어떤 사람들은 잡힐까봐 무서워서 냄새나는 화장실을 포함하여 숨는 방법을 택한다.

슬픈 아이러니는 이런 것이다. "국민-국가"라는 차장이 이들 3등칸이나 입석승객들을 나쁘고 진부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취급을 받은 승객들이 "국민-국가"의 주 수입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 승객들 상당수가 종착역에서 말해주는 바는 그들의 삶이 예전과 마찬가지의 상황에서 끝났다는 것이다. 가끔은 돈은 모을 수 있는 좋은 때가 있겠지만, 철도 경찰에게 아무런 도움도 없지 못한 채 강도나 도둑에게 간단히 빼앗길 수 있다.

내가 어느날 이 기차를 타야 한다면, 나는 좋은 좌석에 앉기를 바랠 것이다. 완전한 티켓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갖고 친절한 승무원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차에 타는 모든 승객들은 틀림없이 나와 똑같은 소망을 갖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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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노동자들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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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01-17 17:22:18, Hit : 592, Vote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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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 노동자들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타이 노동자들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인권하루소식> 2005년 1월 15일자 기사


"단속추방이 일으킨 재앙"

이주노동자 8명 전원, 하반신 마비…치료는커녕 귀국조치


화성시에 있는 한 회사가 안전장비도 없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을 시켜, 8명 전원이 화약약품에 중독돼 일명 앉은뱅이병인 '다발성 신경장애'를 앓고 있다.

이들이 2004년 8월부터 일을 했던 곳은 (주)동화디지털로 엘씨디, 디브이디 부품을 제조하는 회사다. 이주노동자들은 '노말헥산'이라는 세척 약품으로 생산된 제품을 깨끗이 닦아 출고시키는 일을 해왔다. '노말헥산'은 산업안전보건법상 '관리대상유해물질'로서 안전장비를 하지 않을 경우 호흡기를 통해 신경조직으로 독성이 침투해 신경장애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유해물질에 대한 경고표시와 안전교육, 직접노출을 막기 위한 보호 장비 등을 쓰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업장을 방문해 조사를 벌인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아래 외노센터)는 "세척 공정에는 이주노동자들만이 일을 해왔다"며 "마스크는 가끔 착용하거나 장갑도 면장갑을 끼고 일을 하는 게 보호장비의 전부였다"고 전했다. 또한 이들은 창문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점심 1시간과 저녁 30분의 식사시간 외에 아무런 휴식시간도 없이 하루 평균 14시간씩 대부분 서서 일을 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지난해 11월 무릎에 힘이 없고, 걷다가 자주 넘어지는 등 하반신 마비 증상이 나타났고, 12월 19일 외노센터로 옮겨질 때에는 업고 옮겨야 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돼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해고가 두려워 말도 하지 못했다. 외노센터 이해령 상담위원은 "아프다고 하면 태국으로 쫓아 낼까봐 고국에서 가족들이 보내준 약만 먹으면서 참고 일해 왔다"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최소한의 노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게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라고 성토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증세가 악화되면서 일을 못하게 되자, 회사는 이들을 치료해주기는커녕 귀국을 종용, 급기야 12월 11일 씨리난 씨 등 노동자 3명을 귀국시켰다.

또 다른 문제는 회사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지급해 왔다는 것. 한 달에 고작 하루 정도 쉬면서 평균 160시간의 잔업과 총 400시간의 노동을 했지만 이들의 손에 쥐어지는 임금은 100만 원을 조금 넘을 정도였다. 이 상담위원은 "임금체불, 산재 등의 피해자가 오히려 강제 추방당하는 것이 '코리안 드림'의 실상"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노총도 13일 성명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 단속과 강제추방 정책이 회사 내에서 불법·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게 한 직접적 원인"이라며 "단속추방을 중단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전원 사면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14일 외노센터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했으며, 최저임금과 보건조치 위반 등으로 (주)동아디지털을 수원지방노동사무소에 신고한 상태다. 왈리 씨 등 5명은 현재 안산중앙병원에서 조직검사를 거쳐 치료를 받고 있으며, 외노센터는 태국으로 돌아간 3명의 노동자들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완치 될 때까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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