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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8
    여성인권을 위한 활동가와의 인터뷰
    burma
  2. 2007/09/18
    손님에게 가장 극진한 나라?
    burma
  3. 2007/09/18
    이주노동자 아들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burma
  4. 2007/09/18
    높이 날아 새로운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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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9/18
    시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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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9/18
    2004년11월후원금송금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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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9/18
    강제노동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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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9/18
    계원 여러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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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9/18
    국경없는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
    burma
  10. 2007/09/18
    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burma

여성인권을 위한 활동가와의 인터뷰

Name  
   류은숙  (2004-12-16 13:59:16, Hit : 1191, Vote : 52)
Subject  
   여성인권을 위한 활동가와의 인터뷰
'국경없는 친구들' 2004년 3-4월호

인권활동가 Myo와의 인터뷰
(Rangoon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던 Myo는 88년에 버마-타이 국경을 넘었다. 현재는 버마인권교육연구소를 세워 활동하고 있다.)

"전세계 여성은 성에 대한 편견으로 차별받고 있다. 버마 출신 여성들은 군사정권의 문화로 인해 더욱 억압받고 있다. 또한 난민 여성은 난민이라는 지위 때문에 더욱 주변부화된다"

나에게 Myo는 난민이라는 것 이상이다. 7년 전에 방콕의 이주자 수용시설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이후로 그는 나의 오랜 친구였다. Myo는 88년에 결성된 버마학생민주주의전선 출신의 학생활동가였다. Myo는 국제 행사에서 버마 전통 춤을 잘 추는 댄서여서 박수갈채를 받곤 한다. 현재 그는 여성을 위한 인권활동가이다. 흔히 볼 수 없는 유형의 활동가...

2000년에 Myo는 '버마인권교육연구소'를 세웠다. 인권교육가를 위한 훈련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인권교육훈련을 하는 조직이다. 최근에, 이 조직은 성문제, 여성의 권리, 평화건설에서의 여성의 역할 등에 관한 여성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는 모든 것이고 나머지 식구들은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 다른 가족들이나 학교나 대학, 일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그것이 차별이라는 것을 몰랐다. 단지 뭔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나는 권위주의 체제 속에 성차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당연하다는 듯이 성차별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인권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면, 성인지적 관점을 갖고 해야만 한다. 우리가 인권침해나 권력남용에 대해 얘기할 때면 그것은 당연히 권력자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차별은 한 집단의 권력을 강화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권력을 박탈하는 구조를 만든다."

"우리가 조직하는 어떤 인권교육훈련에서이든지 성문제와 여성의 권리는 필수사항이어야 한다. 더욱이 적어도 40%의 여성 참가자들이 참여해야만 한다. 여성이 남성만큼 자질을 갖추고 있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남성이 대개는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여성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의사결정을 할 힘을 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상당수 남성참가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할 권력을 전부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미신이다. 실제로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공동의 협력이다. 사실상, 성인지적 관점은 남성과 여성이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증진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남성 탓으로 돌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성차별이 문화나 종교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화나 종교가 본래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을 불행하게 만드는 관습을 볼 때면 문제삼아야 한다. 일부 문화적 관습 속에 있는 성차별의 진정한 요인은 사회의 신념 체계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경험한 가장 인상적인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성의 총명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여성은 보통 약하고, 감정적이고, 지적이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나는 여성에게 단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침묵을 강요받았다. 여성들은 가슴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일상을 배우고 살아간다. 그래서 여성은 매우 실천적이다. 반면에 남성은 머리-즉 지식-을 우선에 둔다. 남성이 더 많이 알지 모르나 실천하려는 동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종종 나는 인권문제에 대해 남성보다 여성들이 훨씬 더 잘 대처하는 것을 본다. 여성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나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위해, 버마가 살만한 곳이 되기 위해 일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의 권리가 제외된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를 건설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목표하는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참여를 의미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평화, 인권을 먼저 얘기하고 나중에 여성을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모두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체가 하나의 이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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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에게 가장 극진한 나라?

Name  
   류은숙  (2004-12-15 13:29:49, Hit : 233, Vote : 30)
Subject  
   손님에게 가장 극진한 나라?
손님에게 가장 극진한 나라?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인기 있는 곳이 어딜까에 대한 Lonely Planet의 2004년 조사에 따르면, 타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이자 "손님에게 가장 극진한 나라"로 뽑혔습니다.

타이 정부가 자랑스러워하는게 당연하겠지요. 왜냐하면 타이 정부는 관광산업을 부양하기 위해 난리였으니까요. 타이 국민들 또한 "은밀한 타이"로 가는 여행을 할 것을 장려 받고 있습니다.

Tak 지방에서 정말로 '은밀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은밀한'이라는 말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가 그 은밀한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더 잘 알게되고, 우리가 겉핧기식으로만 방문하는 곳들을 더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을 내포한다면 말입니다.

Mae Sot에서 1085번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만 달리면, 대나무집으로 촘촘히 구성된 장엄한 공간에 이르게 됩니다. 담장과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은밀한' 타이를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타이 사람이 아닙니다. 일부 청소년들은 거기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들은 버마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버마군사정권과 카렌족연맹과의 내전을 피해 도망나온 카렌족 난민입니다. 1984년에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을 때, 마을 주민들은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고 국경을 넘어 타이로 왔습니다. 이곳은 4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타이내의 가장 큰 난민캠프입니다. 현재 이런 캠프가 타이-버마 국경지대에 9개가 있습니다. 전체 인구는 10만명이 넘습니다. 난민의 대부분은 카렌족과 카레니족입니다.

타이 정부는 난민들을 제한된 지역에 머물게 하면서 식량을 기다리게 했고, 교육과 의료 지원은 국제 NGOs들이 시행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타이 정부는 이들더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내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향'은 평화롭지 않고 빠른 시일내에 평화를 찾을 것 같지 않습니다. 승리를 위해 버마군부는 전체 마을을 불지르고, 사람들을 강제노동에 내몰고, 여성들을 강간하고, 주민들을 고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타이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외화를 가져오거나 타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고 해서,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환영도 받을 걸 기대해서는 안된다면, 타이 정부는 "손님에게 가장 극진한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해온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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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아들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Name  
   류은숙  (2004-12-11 12:46:39, Hit : 242, Vote : 32)
Subject  
   이주노동자 아들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2004년 2월 6일

어머니,
오늘은 우리 선조를 기념하는 날이네요. 고향에 있었다면, 자랑스럽게 오늘을 Mon National Day라고 했을텐데요. 하지만, 태국에서는 종교의식조차 조직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요. 어머니도 아시듯이, 우리는 오늘날 고향을 잃은 사람들로서 여기서는 불법 노동자랍니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수백년전 오늘 세웠던 Hongsawdi 제국의 Mon국을 자랑스러워 할 수 없어요. 우리는 버마의 동등한 '시민'으로조차 여겨지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Mon족의 피와 영혼과 존엄성이 제 속에 있음을 느껴요. 오늘, 저는 소녀들이 순백의 윗도리에 Mon족의 허리천을 감고,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어머니를 떠올려요. 이날은 1년 중 유일하게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선언할 수 있는 날이고, Mon족의 음식을 먹고, Mon족의 노래를 부르고, 두려움 없이 Mon족의 언어로 얘기할 수 있는 날이랍니다.

어머니, 이곳에 수천명의 Mon족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이들 대부분이 우리 고향이 Rey에서 왔어요. 휴전된 후 8년간 많은 마을이 거의 텅비어버렸지요. 어머니가 너무 걱정돼요. 논에 나가려면 그들에게 허가를 받으셔야 하나요? 버마군이 막아서 추수할 것을 거의 다 잃으셨나요?

어머니, 제가 보내드린 돈이 어머니가 그들의 짐꾼이 되는 일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했기를 바래요. 운좋게도 여동생과 조카가 여기 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그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몰랐을 거예요. 군인들이 마을에 머무를 때 소녀들을 데려가 동침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어요. 그래서 소녀들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워서 태국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들었어요. 날마다 우리 고향과 Dai Peng에서 오는 사람들이 여기 도착해요. 휴전지역에서 더 이상 처형은 없다지만, 먹고 살수가 없다고 해요. 조그만 산촌에 수만명이 넘는 귀환 난민에다 버마군통치지역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모여드니 농사지을 땅이 없다고 해요.

어머니, 저에게 돌아와서는 절대 안된다고 여러차례 소식을 보내주셨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저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셨어요. Mon 지역에서 4년, 태국에서 6년, 그 날들을 헤아려왔어요.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10년이예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여기 와서 고생하시는 것을 볼 수는 없어요. 여성들이 생선관련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이 훨씬 쉽기는 해요. 하지만 무례하게 말하는 고용주들 아래서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해야 하고, 경찰이 무서워서 거리를 걸을 때마다 두려워해야 해요. 어머니가 그곳(Rey)에서도 많은 고통을 겪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머니가 항상 제게 깨우쳐 주셨듯이, 그곳은 우리의 선조들이 태어나 농사를 짓던 땅이예요. 저는 어머니가 여기와서 고생하면서 사장앞을 지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원치 않아요. 단지 당신이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적국인', "불법체류자', '범죄자', '개새끼들' 등 듣기 고통스러운 이름으로 불러요. 제 친구가 태국신문을 제게 읽어주었어요. 몽족의 여성들이 여기 체류하기 위해서 태국인 남편을 필사적으로 얻으려 하고, 이주 여성들은 아주 좋은 '번식자'들이어서 태국에 너무 많은 이주아동을 낳아놓고 있다는 기사였어요. 저는 이런 얘길 듣는 걸 견딜 수가 없어요. 어머니.

한 여성을 병원에 데려다 준적이 있어요. 그녀는 낙태로 인해 출혈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그녀가 이틀 결근했다고 해서 바로 해고되었고, 4,000바트(약 12만원)짜리 노동허가증이 종결돼버렸어요. 이주여성은 공장에서 너무 힘들게 일해야 하고, 그리고 나서도 아이들을 돌보고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야 해요. 일부 여성은 저녁부터 새벽 4시까지 일해야 해요. 일을 마치고 나면 버마에서 그랬듯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집으로 걸어가야 해요. 어떤 사람들은 태국법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해요. 하지만, 우리가 경찰서로 가면, 그들이 하는 첫 번째 일은 우리를 체포하고 추방하는 거예요.

Rey에서 새로 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 요즘은 힘들어요. 일거리를 찾기가 너무 힘들어요. 태국 정부가 새로오는 사람들에게는 노동허가를 주지 않아요. 때때로 저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기운을 잃어요. 하지만 오늘 힘이 다시 생겼어요. 어머니, 조부모님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춤추는 것을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젊은이들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Mon족의 음식과 간식거리, 전통 허리천을 팔고 있어요. 어머니가 만일 이 자리에 계시다면, 저는 어머니를 부엌으로 모시고가 다른 분들과 함께 Mon족의 음식을 만들어달라고 졸랐을 거예요. 저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음을 깨달았어요.

어머니, 정치란 제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어요. 특히 휴전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성 집단은 학교와 성인들을 위한 글자교육, 직업훈련 같은 것에 열심입니다. 우리들 또한 여기서 곤란한 지경의 Mon족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쓰고 있어요. 병원에 데려가고, 고용주와 협상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고, 서로를 보호하고 있어요. 이런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 제 마음 속에 모든 것이 건재하며 어떤 것도 전혀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어머니, Mon National Day인 오늘, 이 생애에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머니는 제게 Mon족 그 자체입니다. 어머니는 제 속의 정체성입니다.

어머니의 아들, Soe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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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날아 새로운 세계로

Name  
   류은숙  (2004-12-11 10:18:53, Hit : 288, Vote : 48)
Subject  
   높이 날아 새로운 세계로
나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굶주림을 봅니다.
군사령관의 딸은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구요
노동자의 딸은 규칙적으로 먹을 수가 없어요
나는 둘 다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비교해요;
상점점원의 아들의 얼굴과
군사령관 아들의 비싼 신발을 비교해봐요.

그 돈은 아들의 학위를 위해 필요해요.
그 돈은 딸의 학교 수업료를 위해 필요해요.
그 돈은 엄마의 약을 위해 필요해요.
사람들이 있어요,
분노하고,
울고,
절규하고,
머물 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요.

늙은 여인이 울고 있었어요.
이제는 쓸모 없게된 25 차트(버마의 옛 화폐단위) 지폐를 바라보며,

행진이 있던 날 저녁에
빛나는 별이 G-3 총탄에 떨어졌어요.
그리고 나서
하늘위로 빛나는 별들은  
높이 나는 새들이 되었어요
학생 저항군이 되었어요

높이 나는 새들의 소리가 들리면
주의깊게 들으세요!
그리고 결정하세요!

"높이 날아 새로운 세계로"의 일부분
1988년 Mi Suu Py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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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

Name 류은숙 (2004-12-06 18:12:18, Hit : 278, Vote : 49) Subject 시 한편 '국경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2004년 9-10월호에 실린 시입니다. 쓴 사람에 대한 설명은 이름 외에는 없네요. 형제요 자매인 우리들 벗들이여 우리는 형제요 자매다 우리는 같은 강물의 물을 마신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호흡한다 우리는 같은 지구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간다 기쁠 때 슬플 때 웃음과 눈물에는 같은 목소리와 색깔이 있지 않은가 '도시 거주자', '산 속에 사는 종족', '바다의 집시들', 뭐라 불리우든 우리는 똑같은 살과 피를 갖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보살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고 등 두드려 줄 것이다 형제요 자매인 우리들 우리는 똑같이 인간이라는 종족이요 우리에게는 똑같은 신이 있다 여기 저기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다 똑같은 영혼을 가졌기에 2004년 7월 우기에, 치앙마이에서 L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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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11월후원금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4-12-01 15:03:34, Hit : 414, Vote : 73)
Subject  
   후원금 송금 내역
11월에 모인 후원금을 12월 1일 송금했습니다. 송금액은 100달러로, 원화로는 110, 471원(수수료 포함)입니다. 현재 잔액은 -2,179원입니다. 참여해주신 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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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동의 땅

Name  
   류은숙  (2004-11-29 16:52:07, Hit : 416, Vote : 75)
Subject  
   강제노동의 땅
'국경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2004. 5-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역사적 장소와 전통적 생활방식은 언제나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다. 오늘날에는 여행하는데 돈도 덜 들고 훨씬 돌아다니기 쉬워져서, 상당수 사람들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Ankor Wat), 라오스의 LUang Prabang, 중국 남부의 Sipsongpanna 등 이웃국가들에서 갈 곳을 고른다.
아직, 버마 같은 곳은 대중적으로 선택되는 곳은 아니다. 외국인들, 특히 서구인들은 자기들 돈이 군부정권의 주머니와 군대로 흘러들어갈까봐 버마에 가지 않으려 한다. 이런 행동은 일종의 불매운동이다.
버마에는 아주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예를 들어 Pagan, Rangoon, Pegu같은 곳이다. 여기에 가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은 도시와 사람들의 이국적 분위기에 감명받는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많은 지역이 있고, 그곳에서 버마인과 많은 인종적 소수민족들은 군사정권의 억압하에서 수백년 전의 노예와 비슷한 고통스런 환경속에 살고 있다.
현재, 버마군사정권은 사람들을 강제로 일 시켜서 도로 건설을 하고, 절과 불탑을 고치고, 군사시설을 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짐꾼으로 부려지거나 대인지뢰가 묻힌 전투지역에서는 군인들 앞서 걸어가는 인간 방패로 동원된다. 이렇게 동원된 사람들은 임금도 못받고 일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는 욕설과 구타를 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과 마실 물의 부족 때문에 병이 걸리고, 죽어서야 정글을 떠나게 된다.
수년 동안, 버마군사정권은 관광객들을 맞기 위한 인프라를 개발해왔다. 그러나, 군부가 예상했던 숫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관광객들이 왔다. 강제노동과 억압의 땅은 사람들이 휴가를 갖기 위해 선택하고 싶은 곳이 아닌 것이다.
이와 동시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버마에서 도망치고 있다. 이들은 타이를 행선지로 삼는다. 버마에서 도망치는 사람들 숫자는 버마를 행선지로 삼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몇 배가 훨씬 넘도록 많다.
강제노동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갈 때는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추신: 국제노동기구(ILO)에 강제노동관행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는 명목으로 세 명의 버마인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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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 여러분께

Name  
   류은숙  (2004-11-22 17:43:25, Hit : 365, Vote : 53)
Subject  
   계원 여러분께
안녕하세요. 날씨가 찬데 감기 조심하세요.

계원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먼저 이 사이트에 대한 홍보를 많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유게시판에 의견도 많이 남겨주세요.(제 이름으로만 도배되고 있는 듯 하여 무안합니다) 자신의 참여동기나 국경없는 친구들에 묻고 싶은 것, 같이 읽고 싶은 글 등등 많이 많이 써주세요.

그리고 계비 납부는 매 월 말일까지 해주셨으면 합니다. 모인 액수와 상관없이 매달 1일에 송금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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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

Name  
   류은숙  (2004-11-22 17:40:12, Hit : 447, Vote : 73)
Subject  
   '국경없는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한국의 친구들에게
한국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타이에서 인사를 보냅니다. 우리를 지원하는 모든 분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고, 저는 국경지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곧 국경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년 동안, 우리는 "우정과 인권을 위한 카렌(Karen)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인권의 향상과 카렌족의 네트워크를 향상하기 위함입니다. 소수민족인 카렌족은 타이-버마 국경에 의해 찢어져 있습니다. 버마쪽에 사는 카렌족은 독재치하와 무력분쟁지역에 살고 있고, 타이쪽에 사는 카렌족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온갖 종류의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카렌족 중 한 집단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들은 우리가 양 진영의 카렌족을 모아 함께 진행했던 풀뿌리 인권교육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사람들입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그들 스스로가 같은 종류의 프로그램을 계속하길 원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고, 다만 옆에서 보조하고 있습니다.

올해에 세 번의 워크샵이 있었습니다. 국경지대에 참가지원서가 배포됐고, 18명이 선발됐습니다. 자기 마을로 돌아가서 인권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약속 그리고 지원자의 마을에서 3번의 워크샵을 완전히 참가하도록 허락한 경우를 선발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성평등을 고려했고, 난민인 카렌족과 타이 시민권을 가진 카렌족도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 워크샵들은 난민 캠프와 국내유민캠프에서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인권의 원칙과 메커니즘, 타이법과 타이의 인권 메커니즘, 소수민족과 난민의 권리, 갈등해결과 평화건설, 발전권과 공동체의 권리, 미디어의 이용, 지역사회조직, 인권활동가에 대한 훈련에 대해 배웠습니다. 18명 중에서 10명만이 과정을 완수했습니다. 탈락자들에게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재정문제도 있었고,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렌 프로젝트 팀과 저는 이 10명의 사람들에 대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힘을 기르는데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8개월 동안 6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인 이들 10명은 가까운 친구가 됐습니다. 이들은 자기 마을에서 진행할 4개의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우리는 그것을 지원합니다. 둘 이상의 워크샵 참여자들이 공동으로 결합하여 이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저는 다음주에 이 워크샵 중 하나를 방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쟁지역에 있는 학교의 교사들을 위한 인권워크샵입니다. 다른 프로젝트는 난민캠프의 청소년들을 위한 인권교육, 타이에 사는 카렌족·난민캠프와 국내유민캠프에 사는 카렌족에게서 수집한 인권상황에 대한 책입니다.

여러분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들이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는가를 들으면 아주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아주 신이 나서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저는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쓰기 직전에, 저는 2003년 프로그램의 한 참가자에게서 온 작은 보고서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Naw Mary이고, 난민캠프에 살고 있습니다. 27살인 그녀는 그녀 인생의 13년을 난민으로서 폐쇄적인 캠프에서 살아왔습니다. 작년에 훈련워크샵을 마친 후에, 올해 초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특히 분쟁지역의 여성을 위한 워크샵을 조직하고 싶다고요. 우리는 필사적으로 그녀가 워크샵을 여는 데 필요한 425달러를 위한 재정지원을 알아봤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Naw Mary가 우리에게 전해온 소식은 타이 당국이 더욱 엄격해져서, 난민캠프내에서 워크샵을 조직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버마로 가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편지를 받아보고, 얼마나 기쁘고 그녀가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그 일을 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15명 정도의 카렌 여성만이 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32명이 참가했고 그중에는 5명의 남성도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주변 마을에서 왔는데, 그 지역은 버마군부가 아주 날뛰는 곳이라서, 매우 조심해야만 했습니다. 워크샵 둘째날 군인들이 마을에 왔습니다. 참가자들 모두가 흩어져서 도망쳐 숨었습니다. 모든 서류와 종이들을 급히 치웠습니다. 군인들은 2시간여동안 마을을 수색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때 참가자들은 아주 겁이 났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워크샵을 계속하기 위해 되돌아왔습니다.  

평가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자신들에게 소중한 경험이었으며, 이런 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분석해봐야 하고, 세상을 더 넓게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좀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했습니다. 무력분쟁 때문에 아주 고립돼 있는 그들에게 이러한 프로그램은 다른 사람들을 알게하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참가자들은 후속프로그램이 또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전쟁 속에서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이런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습니다.

저는 Naw Mary의 편지를 읽고,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자랑스러울 뿐 아니라 제게는 '국경없는 친구들'이 또한 자랑스럽습니다.  우리가 한 역할이 극히 미미하다 할지라도요.

어떤 사람들은 난민들이 인권에 대해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얘기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그들이 배우는 것은 국제인권법으로서의 인권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 대해 배우는 것이요, 뭔가 변화를 일굴 수 있는 자신들의 힘에 대해 배우는 것이라고요, 둘째, 인권교육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인권피해자인 그들 자신이 고립과 침묵의 문화를 깨뜨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들이 행복감을 느끼고, 호기심을 느끼고, 자극을 받고, 배우기에 열심이고, 그로부터 나오는 힘을 확산시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한국의 친구 여러분, 이것이 제가 새해가 오기 전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활동은 여러분의 지원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난민과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제 동료들, 그리고 저는 우리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핌(Pim)
국경없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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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Name  
   류은숙  (2004-11-18 13:33:32, Hit : 680, Vote : 84)
Subject  
   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국경 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친구가 사는 곳"

어디에 제일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신은 어디를 떠올리나요? 가고 또 가도 결코 지겨워지지 않는 그런 곳 말이예요.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단연코 "Mae Hong Son"입니다.
그 마을이 아주 풍경이 좋고 작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민족의 풍부한 문화를 갖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Mae Hong Son"이라 하면 으레 떠올리는 상징은 "긴 목을 가진 카렌족(목에 고리를 끼워 길게 늘이는 종족으로 유명한 것이 카렌족임)"입니다. 사람들은 카렌족과 그들의 가족이 버마에서 온 난민이란 것을 모른채 관광객으로서 그들의 목걸이를 떠올릴 뿐입니다. 내가 Mae Hong Son을 아주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내 친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고, 그 친구들 때문에 Mae Hong Son에 관광객의 관심을 끄는 일들 말고도 더 많은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한 친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지요. 그녀의 이름은 빅토리아입니다. 빅토리아는 가족이 버마에서 도망쳐 나온 후에 타이에서 태어난 Kayah족 소녀입니다. 우리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는 버마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와 Mae Hong Son에 살고 있는 만 명이 넘는 Karenni족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얘기합니다.

Karenni는 버마의 7개 소수민족국중에 가장 작습니다. Karenni는 많은 소수종족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일 많은 인구가 Kayah족이고, 그 다음이 Karen, Kayaw, 그리고 Kayan 또는 Paduang 족으로, 이들은 타이 사람들에게 "긴 목을 가진 카렌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Karenni 왕국은 Kayah족의 지도 하에서, 역사적으로 Lanna와 버마 제국 둘다와 외교적 유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버마에 대한 지배를 수립했을 때 Karenni국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성공적으로 분투하는 과정에서, 버마의 정치엘리트들은 버마연방을 만들었고, 이 연방은 소수민족 국가들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버마군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타 민족들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소수민족의 영토를 느슨하게 통치했던 고대 버마 제국의 권리 주장을 해왔습니다.

소수민족을 향한 혹독한 폭력은 소수민족을 겨냥한 전쟁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전혀 청취하지 않는 많은 개발 프로젝트(특히 댐 공사)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댐으로 인해 농사짓고 살던 땅에 악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거나 강제노동을 하게 됐습니다.

슬프게도, 그들이 타이로 이주하게 되자, 그들 중에서 "이국적"이고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은(긴 목을 한 카렌족처럼) 타이 장사꾼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이 장사꾼들은 이 사람들의 문화를 팔아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데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만약 버마정부가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의회를 소집하게 돼서, 전쟁이 끝나게 되고,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Mae Hong Son의 관광산업이 영향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 이들 장사꾼들의 속내입니다. 빅토리아가 이런 뉴스를 읽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빅토리아의 꿈을 생각합니다. 그 고향에서는 산 속에 마을들이 있고, 사람들은 소박한 삶을 살고, Mae Hong Son에서보다 더 아름다운 문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빅토리아와 똑같은 꿈이 있습니다. 모든 난민 친구들이 고향으로 즐겁게 돌아간다면, 나에게는 방문하고 싶은 "친구가 사는 곳"이 하나 더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희망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그들 사회에서는 더 이상 지역주민들을 싼 노동력이나 문화상품으로만 취급하는 개발 프로젝트와 관광산업을 볼 수 없게 되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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