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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후원금 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5-06-02 10:20:58, Hit : 327, Vote : 31)
Subject  
   2005년 6월 후원금 송금내역
5월 6일 잔액 -20,383원

5월 9일 황수* 1만5천
5월 10일 김재* 2만383원
5월 26일 김예* 1만
        이민* 1만
5월 27일 전명* 1만
5월 30일 이민* 1만
5월 31일 조대* 1만
6월 1일 유해* 1만
6월 2일 구태* 2만
        류은* 7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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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85,383원
6월 2일 송금 150달러+수수료 5천원=158,300
잔액; 6,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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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너무 좋아요

Name  
   류은숙  (2005-05-26 14:14:52, Hit : 324, Vote : 28)
Subject  
   햇빛이 너무 좋아요
요즘 날씨가 정말 너무 좋아서 '미치'겠죠? 흐리면 흐린대로 맑으면 맑은대로 기분이 다르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너무 좋으면 반비례로 우울해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오히려 슬픔을 느끼는 묘한 기분이죠. 거기다 바람까지 솔솔 부채질을 해줍니다.

만원계 여러분, 5월도 며칠 안 남았네요. 6월에 있을 일들을 기대하며, 5월 마무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저는 5월에 계획했던 일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끄적끄적 대고 있다고나 할까요.

'국경없는 친구들'의 핌은 6월에 굉장히 바쁠 것이라 하네요. 올해 계획했던 일들이 본격적으로 치뤄지는 시기인 듯 합니다. 먼곳에서나마 우리들 마음을 담아 응원을 보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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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9)

Name  
   류은숙  (2005-05-25 13:34:27, Hit : 162, Vote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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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9)
버마 상황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앞으로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출처: Searching for Peace in Asia Pacific, A Project of the European Centre for Conflict Prevention(2004) 31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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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해결노력에서 중요한 사람인 말레이시아 외교관 Tan Sri Razali Ismael은 유엔 사무총장의 버마특사이다. 그는  정권과 Aung San Suu Kyi간에 2000년 10월부터 대화가 진행돼왔음을 2001년 초에 밝혔다. 그 회담 내용은 비밀이었고 무엇이 토론되고 있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국제사회는 그 회담을 지지했고, 그 결과에 대해 "조심스러운 낙관"을 표명했다. 그 회담의 중요한 결점은 다수 소수민족 조직의 대표자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Razali는 회담을 지속시키기 위해 몇차례 버마를 방문했다. 2002년 5월에 Aung San Suu Kyi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그는 신뢰를 받았다. Razali는 버마의 가장 긴급한 문제들(예를 들어 인도주의적 위기, HIV/AIDS 감염)을 다루기 위해 정권과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의 공동 위원회를 설립하는 구상을 진작시켰다. 또한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3년 5월 정부가 조직하여 Aung San Suu Kyi와 그녀의 경호원들을 공격함으로써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회담은 중단됐다. Aung San Suu Kyi의 석방을 보장하고, 화해 과정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Razali는 버마를 또다시 방문했고 회담을 되돌리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2000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했다. ILO는 그 회원국, 유엔 기구, 다국적 기구들에게 버마의 강제노동에 기여하는 일이 없도록 버마와의 관계를 재고하라고 권고했다. 1998년의 ILO 특별 조사위원회는 강제노동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이며, "인류에 반하는 범죄"를 구성한다고 결론지었다. 2001년 9월, ILO의 고위급이 버마에 대규모 방문을 했고, 정권과 협상후에 2002년 ILO는 랑군(Rangoon)에 사무소를 열었다. 이 사무소는 강제노동을 그만두겠다는 정권의 약속이행을 모니터하고 강제노동종식을 위한 기술지원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버마인권상황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 Paulo Sergio Pinheiro는 2001년에 임명된후 몇차례 버마를 방문했다. 그는 95년 이래 버마를 방문한 최초의 유엔특별보고관이었다. 그는 정치수들을 방문했고 소수민족 지역에서 벌어지는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조사했다. 그는 정권에게 이들 인권침해에 대한 신뢰할 만한 조사를 수행할 것을 제안했고, 버마의 모든 분쟁지역에 대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접근을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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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8)

Name  
   류은숙  (2005-05-19 11:12:58, Hit : 274, Vote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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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8)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8)
버마 상황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앞으로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출처: Searching for Peace in Asia Pacific, A Project of the European Centre for Conflict Prevention(2004) 31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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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전투중인 소수민족집단은 정치문제 해결 없이는 군부정권과 휴전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고, 이들간에 새로운 군사동맹을 결성했다. 반면에, 소위 휴전 그룹들은 상대적인 안정 속에서의 자기 지역의 사회경제적 발전이 정치면에서도 진전을 가져올 것이고 결국 더 많은 자치를 가져다 줄 것이라 희망하고 있다.

1989년 이래로 정권과 무장집단간에 개별적으로 맺어져온 17개의 휴전협약은 버마정권이 분쟁을 다루는 가장 구체적인 보기이다. 정권은 협약을 자신의 주요한 성취물로 보고 있다. 정권 지도부는 자신은 정부가 아니며 따라서 정치적 해결을 협상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군부가 휴전협약을 맺은 무장집단에게 말해온 바는 국민공회가 새 헌법을 완성하여 새로운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정치협상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지지자들은 휴전협약이 적어도 유혈학살을 중단시켰고, 피난민의 재정착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휴전지역의 교육과 보건 부문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사람들이 보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자들이 지적하는 바는 이들 휴전지역에 주둔하는 버마군의 수가 늘어나고 있고, 휴전을 통해 뒤따라야할 정치적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휴전을 반대편을 분열시키려는 버마군의 전략으로 본다.

버마의 분쟁을 처리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은 목표와 전략의 분열로 제한돼왔다. 미국과 EU의 일부 회원국들은 버마정권을 국제사회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옹호해왔다. 아세안국가들, 일본, 호주 등은 대화와 "건설적인 약속"을 통해 변화를 자극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아세안국가들은 그들이 버마의 국내 문제라 말하는 것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는다. 국제사회가 버마분쟁을 토론하기 위해 연 회의(한국, 영국, 일본, 가장 최근에는 태국에서 열린)에서는 버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동 정책을 도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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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7)

Name  
   류은숙  (2005-05-17 11:07:19, Hit : 259, Vote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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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7)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7)
버마 상황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앞으로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출처: Searching for Peace in Asia Pacific, A Project of the European Centre for Conflict Prevention(2004) 31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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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버마의 정치적 정체는 계속되었다. 2000년 10월 시작된 Aung San Suu Kyi와 군부와의 회담 후 정권은 초기에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에 대한 탄압을 어느정도 누그러뜨렸다. 랑군(Rangoon)의 NLD사무소를 다시 여는 것이 허용되었고, 정부 통제하의 언론이 NLD와 Aung San Suu Kyi를 공격하는 것도 멈췄다. 정부는 일부 정치수를 석방했고, 그들 중 많은 수는 NLD 회원이었다. 2002년 5월, 정권은 또한 19개월 간의 가택연금이 있은 후 Aung San Suu Kyi에 대한 이동의 제한을 풀었다. 그녀의 연금해제는 해외에서뿐 아니라 버마에서도 환영받았고, 더 많은 개혁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Aung San Suu Kyi는 국내 여행이 허용되자 Mandalay, Mon, Shan, Rakhine, Chin, Kachin 주를 방문했다.

그러나, 군부와 Anng San Suu Kyi와의 회담은 지연됐다. 일부 관찰자들은 그들의 회담이 결코 진지하게 시작되지 않았고, 신뢰형성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2003년 초, 군사정권은 몇몇 NLD 활동가들을 체포했고, 곧 석방하기는 했지만 Shan 민족의 고위급 정치가를 체포했다. 2003년 5월 30일, Aung San Suu Kyi의 경호인과 그녀의 지지자들이 정부가 조직한 폭도들에게 공격당하자, 회담이 재개되고 좀더 의미있는 정치적 대화로 진전되리라는 희망은 깨졌다. 이 일로 알려지지 않은 숫자의 NLD 회원들이 살해당하고 다쳤으며, Aung San Suu Kyi는 체포돼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구금됐다. 공격이 있은 후 수주동안 더많은 NLD 회원들이 체포됐다. 이일로 인해 국제사회는 강력한 비난을 했다. 여기에는 버마 군사 정권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취해왔던 아세안 국가들과 일본이 포함됐다. 2003년 8월,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 버마군사정권이 스스로를 칭하는 말)는 민주주의를 향한 로드맵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의회의 회복이 포함됐지만 어떤 시간표나 대표자에 대한 세부사항도 담기지 않았다. 2003년 9월부터 Aung San Suu Kyi는 또다시 가택연금됐다. 군사정권은 2004년에 의회가 재소집될 것이라 발표했다.

공식적으로, 모든 분쟁 당사자들은 그들의 활동목표는 민주 버마를 향한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정치 개혁을 향한 정부의 장치인 의회는 1996년 이래로 소집된 바 없다. NLD는 현재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삼자회담(군부, 민주적 야당, 소수민족집단)을 요구해왔다. 대부분의 소수민족 조직은 이를 지지하고 있다. 이들 조직은 현재 분리주의를 거부하고 대신에 연방국가와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한 소수민족 권리의 향상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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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군사통치와 민족갈등(6)

Name  
   류은숙  (2005-05-13 17:12:30, Hit : 260, Vote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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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마:군사통치와 민족갈등(6)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6)
버마 상황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앞으로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출처: Searching for Peace in Asia Pacific, A Project of the European Centre for Conflict Prevention(2004) 31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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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이상의 내전과 수십년의 군사 통치는 버마 민중, 특히 전투의 대부분이 벌어진 지역의 소수민족집단에게 큰 고통을 안겨줬다. 그 결과, 버마는 깊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심연에 있다.

분쟁과 관련된 사상자의 수에 대한 믿을만한 통계는 없다. 일부 정부 공무원들은 사망자 수가 "수백만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소식통은 사상자의 수를 4십년간 매년 1만여명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1989년 휴전협정 이루로 사망자수는 상당히 감소해왔다.

군부는 비사법적 처형과 약식 처형, 고문, 강간, 강제 이주, 강제노동, 토지와 재산의 몰수, 강탈, 아동군인의 이용 등을 포함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권침해로 비난받고 있다.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규제하는 가혹한 법률들이 국제기준에 매우 못미치는 재판 과정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을 처벌하는데 이용된다. 반체제 소식통은 버마에 1,500여명의 정치수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 정치수의 대부분은 공정한 재판없이 장기징역형을 받았고, 또한 구금돼있는 동안 부당한 처우와 고문을 받는다. 2002년 버마군은 Shan 주에서 소수민족 여성들에 대한 성적 학대를 자행한 것으로 비난받았다. 무장저항세력에 의한 인권침해도 또한 보고돼왔다.

인도주의적 재난은 보건과 교육 부문에도 영향을 끼친다. 방위예산에 비교할 때 보건과 교육에 대한 공적 지출은 극히 낮은 상태다. 가장 심각한 보건 문제 중의 하나는 급증하고 있는 HIV/AIDS 감염이다. 버마의 청소년은"상실된 세대"로 보인다. 1988년 이래로 학생시위를 막기 위해 고등학교와 대학이 정기적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학교가 다시 문을 열기는 했지만 교육 기준은 매우 낮은 상태이다.

그릇된 경제운용, 지속적인 분쟁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다양한 불법적인 경제활동, 예를 들어 불법적 벌목이나 마약 생산 등에 사람들이 연루될 여지가 생겼다. 버마는 아프가니스탄 이후 세계에서 가장 큰 아편 생산자이다. 대부분의 아편은 Shan 주에서 재배되며, 흔히 교전 집단과 정부가 인정하는 군대의 통제지역에서 재배된다. 새로운 보고에 따르면 UWSA(United Wa State Army) 지배 지역에서의 아편생산은 상당히 감소했으나 동시에 메탐페타민(각성제)의 생산은 급격히 증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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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5)

Name  
   류은숙  (2005-05-12 11:24:59, Hit : 196, Vote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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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5)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5)
버마 상황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앞으로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출처: Searching for Peace in Asia Pacific, A Project of the European Centre for Conflict Prevention(2004) 31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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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까지 협박, 체포, 사무실의 강제 폐쇄, 강제 사퇴로 인해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의 능력은 심각하게 약화됐다. NLD는 군부로 하여금 협상테이블에 나와 실질적인 정치개혁을 채택하게끔 압박으로서 군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할 것을 국제사회에 요구했다. 이로 인해 군부는 NLD가 외국인들에게 통제되고 조종되고 있다고 비난했다(군부는 종종 NLD의 지도력을 "외부의 파괴적 요소들에 휘둘리는 도끼자루"라고 불러왔다).

광범위한 소수민족 조직이 계속 존재하며, 이들 조직 중 대다수는 무장저항집단을 포함하여 민족구분에 따라 만들어졌고, 일부 조직은 군사정권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소수민족 조직은 많은 동맹과 연합전선을 형성해왔지만, 전국적으로 모든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조직은 없다. 소수민족은 목적(독립이냐 연방국가냐)과 전략(무장투쟁이냐 휴전이냐)에 따라 나눠져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와 경제(약물 거래를 포함하여)뿐 아니라 다양한 개인적 갈등과 관련된 논쟁이 있다.

강한 적의와 의심, 불신의 감정이 버마의 소수민족집단간에 존재한다. 소수민족집단은 오늘날까지 전국적인 정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버마민족에 의해 차별받고 있다고 느낀다.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통치가 국가를 통합하고 "연방을 구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중심적인 버마민족의 정체성에 기반한 단일정부를 구축하고 있으며, "극단적 배타주의"와 "버마화"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소수민족 지도자들은 비판한다.

국가의 불교 장려와 그로 인한 이슬람과 기독교를 포함한 타종교에 대한 차별도 또한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1988년 이래 몇몇의 반이슬람 폭동이 버마 중심부 도시에서 분출됐다. 특히 Rakhine 주에서 긴장이 심한데, 여기에서 무슬림 소수집단(Rohingyas)은 인종적, 종교적 차별을 겪고 있다. 91년과 92년 사이에,  버마군대의 작전으로 인해 약 25만여명의 무슬림 소수집단이 방글라데시로 도망했다. 이들 대부분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인해 Rakhine 주로 송환되었지만, 여전히 이동의 자유가 없어 고통받고 있으며 버마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는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소수민족간의 갈등은 더욱더 전망을 암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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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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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05-10 13:32:05, Hit : 250, Vote : 15)
Subject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4)
버마: 군사통치와 민족갈등(4)
버마 상황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앞으로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출처: Searching for Peace in Asia Pacific, A Project of the European Centre for Conflict Prevention(2004) 313-327

군부체제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가 새로운 헌법을 기초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군부가 국민공회의 구성원들을 선택했고, 1993년에 처음으로 소집됐다. 1995년, Aung San Suu Kyi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고 몇 달 후,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항의로 국민공회를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교착상태를 벗어나고자, NLD는 다수의 소수민족 정치인들과 협력하여 1998년에 민중의회대표위원회(Committee Representing the People's Parliament)를 세우고 군부에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이일로 인해 대대적인 체포와 구속의 바람이 불었다.

2003년까지 주요한 소수민족 무장세력은 여전히 군부정권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들은 타이와 인도 국경지대를 따라 작고 자주 이동하는 진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해왔다.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는 곳이 이들 분쟁 지역이다.

타이 국경과 방글라데시 국경지대에는 또다른 소규모의 무장세력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대규모 무장 세력에서 분리돼 나온 집단들이 있고, 이들 집단은 대부분의 분쟁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다른 예로는 휴전협정을 맺은 집단에서 분리돼나와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다시 무기를 든 집단도 있다. 추가로, 몇몇 정부가 지원하는 군대도 있다. 2004년 1월 버마군부와 카렌민족동맹은 구두로 임시 휴전 협정에 동의했는데 양편은 공식적인 휴전협정에 도달하기까지 대화를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버마 군부 체제는 예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버마군은 1998년 170,000명에서 2000년 400,000으로 상당히 증강됐다. 무장저항세력은 군사적 열세와 패배로 고통받아왔다. 권력이 매우 중앙집권화 돼있지만, 일부 버마 지역군 지휘자들은 군벌로서 자신들이 통제하는 지역을 다스리고 있다. 군사정권의 권력은 폭력과 협박에 기반한 것으로 그러한 권력이 정당성이 없다는 것은 1990년 선거에서 분명해졌다. 이 선거에서 군부가 후원한 정당(National Unity Party)은 겨우 10석을 얻었고, 야당인 NLD는 492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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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친구들에서 온 편지

Name  
   류은숙  (2005-05-09 17:24:46, Hit : 200, Vote : 26)
Subject  
   국경없는 친구들에서 온 편지
지난 4월 26일에 받은 편지인데 이제야 올립니다.
*****

한국의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여러분에게 편지를 씁니다. 타이-버마 국경지대의 난민들에 대한 여러분의 지원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지난 두달여를 저는 국경 근처에서 보냈습니다. 3월 중순에는 국내난민 학교와 더불어 버마의 Karen족 국내난민 출신의 교사들을 위한 아동권 훈련을 조직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경비 일부를 한국의 친구들이 후원했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고맙게 여기는지 여러분이 이해할 줄로 압니다.

이 프로그램의 경험은 매우 좋았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전 지역에서 온 일부 교사들은 국경 근처의 Karen족 마을까지 오기위해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고, 아동권 프로그램이 그들 자신의 인민에게 유익한 것이며 어떤 집단의 정치적 선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설득하여 무장세력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전에는 한번도 없던 일이었기에 무장세력의 군사 지도자들이 이 프로그램에 허가를 해주었다는 것을 듣고 우리는 기뻤습니다.  

교사 워크샵의 13명 참가자들 중에 여성은 6명, 남성은 7명이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국경에서 타이쪽에 속한 난민 캠프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았고, 어떤 종류의 교사 훈련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들 젊은 교사들은 타이에 있는 캠프에서 더 이상 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고달프더라도 분쟁지역으로 돌아가 살기로 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아동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피난민 마을은 안전하지도 않고 영구적이지도 않은 사회입니다. 그들은 내전 때문에 옮기고 또 옮겨다녀야만 했습니다. 여러번 마을과 학교가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이들 교사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정글속에 숨어야 했습니다. 폭음과 총소리가 멈추고 나면, 이들은 마을사람들이 어딘가에 다시 학교를 지을 때까지 나무 밑에서 혹은 동굴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번 훈련 워크샵에서 분쟁지역의 아동과 관련된 문제들이 토론됐습니다. 무력 분쟁에 아동을 군인이나 짐꾼으로 이용하는 것, 아이들이 폭력사용에 노출되는 것이 우려됐습니다. 워크샵을 마친 후, 이들은 서로에게 약속했습니다. 아동의 권리(특히, 아동의 참여와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교육과 훈련 방법(음악, 예술, 드라마를 포함하여)을 활용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입니다.  덧붙여, 저는 그들 중 많은 이들로부터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돌아가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아동의 인권 문제를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다는 겁니다. 한 사람은 이런 소식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의 숙모와 삼촌들이 모임이 너무 길다고(이틀) 하더니 몇시간이 지나자 토론이 너무 재미있으니 4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다는 겁니다.  

저는 잠시동안 치앙마이로 되돌아왔지만 여러분께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 경험이 너무 좋아서 잠시동안 제 가슴속에서 조용히 되새기로 싶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사들이 우리가 떠날 때 울었습니다. 우리가 빠른 시일내에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쟁 지역에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 고립돼 있습니다. 같은 목적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영혼을 위한 양식입니다. 여러분이 거기에 있었다면 여러분도 또한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픈 감정이 아니었고,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었습니다. 때때로 눈물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줍니다.

그뒤 3주 후에, 저는 다시 같은 국경 지역에 갔습니다. 난민 캠프 중 하나에 있는 Karen 여성 조직의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성 조직은 인신매매 문제가 지역사회에 점점더 심각한 문제가 돼가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어린 소녀들이 매매춘과 가정부로 인신매매됐습니다. 많은 여성이 임금도 없이 집이나 공장에 갇혀서 노예처럼 매여 지냅니다. 더욱이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불법이주자이기 때문에 체포돼서 그들에게 위험한 버마로 송환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인신매매범의 피해자임에도 그들 자신이 범죄자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렌 여성 조직은 이 문제에 대한 지역사회의 인식을 향상하고 교육과 타이 법률을 제공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경없는 친구들'이 이 프로그램의 과정과 실무집단을 돕기 위해 거기에 갔습니다.

이 워크샵은 4만여 명이 있는 난민 캠프의 각 섹션에서 온 20명의 여성들로 진행됐습니다. 각 지역사회가 참가자를 선출했는데, 일부는 20대였고 일부는 50대나 60대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사고했습니다. 워크샵이 끝날 무렵, 우리는 다양한 유형의 활동을 계획하게 됐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바깥 세계의 사람들, 얼마나 많은 타이 사람들이 난민을 나약하고 게으른 사람들로 생각하는가, 단지 캠프에 머물면서 인도주의적 원조(공짜 식량과 의약품)를 받아 먹는 사람들로 간주하는가를 떠올렸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말해야만 합니다. 이들 여성이 얼마나 강한 사람들인지 저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들인지를 말입니다.  20여년 간을 이동의 자유, 노동의 권리, 정보와 표현의 자유가 부인된 폐쇄된 캠프에서 살았지만, 그들은 존엄하게 사는 길을 스스로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앉아서 꿈만 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움 없이 실천을 합니다.

지난 6주동안 이 두가지 활동으로 저의 몸은 지쳤지만 저는 훨씬 더 힘을 받고 강해졌습니다. 한국의 여러분들도 이 얘기를 듣고 기뻐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핍박받는 사람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는 여러분의 후원에 대해 기뻐하리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또 소식전하겠습니다.

국경없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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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립니다

Name  
   조대환  (2005-05-06 11:39:09, Hit : 355, Vote : 20)
Subject  
   비가 내립니다
참 촉촉하게 비가 내리고 있네요.

전 예전에 시골 생활을 할때는 비 맞는 걸 좋아 했는데 서울 생활이후로 웬만하면 잘 안 맞으려고 합니다.
고등학교까지는 거의 시골, 대학생활은 중소도시에서 지내다보니 비가 별도 지저분하지 않았는데 서울 비는 산성비는 둘째치고 너무 지저분해서요.

사실 특별한 낭만보다는 그냥 우산피기가 귀찮은 것도 있습니다. 우산은 갖고 다니면서 솔솔하게 내리는 비에는 잘 피지 않으면서 제가 가끔하는 농담이 있는데 "우산에 비 맞추면 집에가서 혼난다" 였습니다.

또 썰렁한가요~

아무리 지저분한 비라도 차소리에만 섞이지 않으면 참 좋을텐데, 서울은 그마저도 힘들어요. 그래도 비소리는 참 듣기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비소리 즐겁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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