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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8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2)
    burma
  2. 2007/09/18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1)
    burma
  3. 2007/09/18
    Kaew이야기
    burma
  4. 2007/09/18
    2005년 8월 후원금 송금내역
    burma
  5. 2007/09/18
    [펌]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burma
  6. 2007/09/18
    Doh-A-Yeh(2)
    burma
  7. 2007/09/18
    하이텍알시디코리아 농성장에서
    burma
  8. 2007/09/18
    Doh-A-Yeh
    burma
  9. 2007/09/18
    타이의 고산족(4-끝)
    burma
  10. 2007/09/18
    타이의 고산족(3)
    burma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2)

Name  
   류은숙  (2005-08-16 21:12:19, Hit : 317, Vote : 30)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2)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등록 절차
-배경
지난 몇 년에 걸쳐 타이 정부는 농업, 어업, 공장, 건설, 가사 도우미 등 타이 경제 부문에서 이주 노동자의 고용을 합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등록에 있어서의 이런 노력들은 다수 이주 노동자가 직면하는 핵심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인신매매범, 고용주들 또는 지역 경찰의 수중에서 착취에 매우 취약하며 특히 금품강요와 신체적 학대에 취약하다.

2001년 8월, 타이정부는 이웃 국가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등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결과 56만여 노동자들이 등록했다. 2002년 말에는 원래 등록했던 노동자들은 재등록을 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단지 281,162 명이 재등록했다. 왜 재등록을 선택한 수가 그렇게 적은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2003년 8월, 타이 노동부는 4십만명 이상의 기등록 이주 노동자들에게 1년 더 타이에서 계속 일할 것을 허용하기로 내각이 결정했다고 했다. 2003년 9월 동안에는 기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재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등록절차를 밟아본 적이 없는 노동자나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은 자격이 없었다. 더욱이, 농업, 공장 일, 어업 등 특정 경제 부문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만 재등록이 허가됐다.

등록 절차에는 몇가지 결점이 있었다. 이주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일주일 후에는 "불법 이주자"가 되어 체포, 벌금, 추방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이것은 특히 이주자들에게 지독한 것이다. 왜냐하면 농업, 어업, 의류공장 또는 서비스업이건 무엇이건간에 이주노동자들이 하는 일의 특성 자체가 계절 노동자로만 고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된 사람에게만 등록이 허가될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가족을 데려왔다. 이주 노동자의 가족들은 타이에서 어떤 법적 지위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버마로 추방될 항상적인 위험에 처해있다. 이들 대다수는 추방이나 거부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병원도 학교도 찾으려 들지 않는다. 더욱이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은 정부의 의료 보호나 교육에 대한 자격이 없다. 버마 Mon 주 출신의 36살 여인은 자기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남편은 배에서 고기를 잡기 때문에 항상 바다에 있지요. 한달에 4천바트(약 12만원)을 받아요. 아들들은(15-16살) 남편과 같이 일해요. 아이들이 그런 힘든 조건에서 일하는 것이 슬퍼요. 아들들은 한달에 2천바트에서 2천5백바트(약 6만원-7만5천원)를 벌어요. 5살, 12살 난 딸들은 나와 같이 있어요. 애들은 학교에 가지 않아요." 일반적으로 복지기관의 지원을 받는 이주노동자의 가족들만이 공중보건과 교육 시스템에 접근하려 시도한다.

등록노동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체포나 추방을 면할 수 있지만, 등록카드를 몸에 지니지 않고 발견된 사람들은 여전히 체포에 취약하다. 현실적으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등록카드를 갖고 있고 노동자들에게는 복사본만 주는 경우가 있다. 이런 복사본으로는 체포를 방지할 수 없다. 고용주들이 고용허가증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일을 관둘 수도 없다. 더욱이 버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의 경찰은 흔히 등록노동자건 미등록노동자건 잡아들이고 풀어주기 전에 뇌물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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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1)

Name  
   류은숙  (2005-08-12 13:22:27, Hit : 287, Vote : 34)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1)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쓰나미

동남아시아의 2004년 12월 26일의 쓰나미는 타이의 Satun, Trang, Krabi, Phang Nga, Phuket, Ranong 지역을 강타했고, 알 수 없는 숫자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들은 그 지역의 접객, 농업, 건설, 어업 등에 고용돼 있었다. 쓰나미 액션그룹(TAG, 타이와 지역 이주노동자 지원 집단들로 구성)과 the Law Society of Thai 는 700명에서 2,500명사이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실종됐다고 추정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타이 정부에 등록돼 있지 않아서 어떤 공식 사망자 명단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타이 당국의 사망 추정자는 약 5,400명인데 여기에는 타이 국민과 관광객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버마 이주 노동자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000여구의 신원미상의 외국인 노동자 시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됐지만, 타이 당국의 실종된 버마 이주 노동자들을 추적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쓰나미의 결과 타이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몇가지 주요한 문제에 노출됐다. 지역의 노동활동가에 따르면, 한가지 주요한 문제는 2004년 7월의 등록 정책을 이행하기 위한 지방차원의 지원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등록 정책은 임시 신분증, 보건 카드, 노동허가증 발급을 포함하는 것이다. 일부 73,000여 이주 노동자들이 쓰나미 영향 지역에서 2004년 7월에 시작된 노동을 위한 등록을 했고, 1년간의 임시 노동허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뢰할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러한 등록은 “에이전트”나 “브로커”가 이주노동자들을 타이에 데려와 지역 정부와 직접적으로 교섭했을 때만 가능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이주 노동자 1명당 약 5,000바트를 부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쓰나미가 지역을 강타한 후에 이들 중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서류를 파도에 잃었다. 후속조치로서 버마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민간단체들의 협조로 등록 이주자들의 서류를 재발급하기 위한 타이 당국의 시도가 있었다.

수천명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타이 보안 세력의 체포와 위협을 두려워하여 쓰나미 직후 몸을 숨겼다. 보고에 따르면 일부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체포됐고, 실종가족을 찾으려하거나 원조를 구하려는 이들은 위협을 받았다. 또한 이주 노동자들은 쓰나미가 강타한 후에 타이 공중보건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거나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2005년 2월 14일의 타이 노동부의 고용과장의 정보에 따르면, 쓰나미 이후 정부는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버마로 돌아가도록 도울 것을 지시했다. 적어도 2천여 이주자들이 2005년 초반에 버마로 돌아갔다. 버마 지원 활동가들은 사망하거나 다치거나 실종되거나 버마로 돌아간 이주노동자의 숫자가 결코 밝혀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 중 상당수가 등록돼 있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등록을 한 사람들도 쓰나미 이후 타이 당국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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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ew이야기

Name  
   류은숙  (2005-08-06 00:31:40, Hit : 350, Vote : 34)
Subject  
   Kaew이야기
‘국경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Kaew는 39살로 Suratthani 주 출신이다. “공부해서 자본가들에게 봉사”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졸업한 후 10년간 치앙마이에서 인권활동을 했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가 되어 지역 풀뿌리 운동에 결합했다. 다음은 Kaew와 대학생 자원활동가 모임과의 대화이다.

-학생 활동에 결합할 때까지는 난 뭘 몰랐어요. 사회와 인생 그리고 우리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도전이었어요. 그로 인해 나는 매일 축구하던 습관이 깨졌지요(웃음). 나는 그때 깨달았어요. 교육은 학위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요. 교실밖의 교육은 더 많은 의미가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사회가 어떻게 부자와 빈자로 구성되며, 어떻게 착취가 있는지 등에 대해 이해하게 됐어요. 그건 마치 내가 체제에 대항하는 반역의 정신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나는 그걸 포기할 수 없었죠(웃음).

Kaew; 반역의 정신은 어떤 운동의 성장에나 매우 중요해요. 그당시에 우리는 국가가 운영하는 시스템보다 우위에 있는 우리 자신의 교육을 조직하는 것 같았어요. 운동은 농민, 토지, 작물 가격 등에 관한 것이었어요. 우리의 목표는 정치적이었죠. 우리는 사회 변화를 목표했어요. 어쨌든 우리의 목표는 컸지만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분석해야 할지 몰랐어요. 우리에겐 단지 결심밖엔 없었어요. 나는 ‘사회가 공정치 못하고 우리는 구조적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너무 쉽고 거칠쟎아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우리는 강한 결심-자유롭고 순수한 힘-을 갖는 걸 자랑스러워 했어요.

-나는 배우는 걸 좋아하는 것이 또한 우리 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나는 항상 읽고 공부해요. 이건 단지 의지만을 갖고 가는 활동가들과 다른 점이에요.

Kaew; 또한, 우리의 삶은 불의에 맞선 투쟁의 지속적인 역사와 같아요.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시간 보내기나 경력으로서가 아니에요. 그건 자진하여 기꺼이 하는 마음이에요. 우리의 정신이예요. 요즘에 보면, 학생운동은 열중이 약해요. 학생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덜 기울여요. 일부 학생들은 단지 경험을 얻으려고 우릴 찾아요. 어떤 정신도 없어요. 하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오늘날의 교육제도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요. 사회조건과 소비주의가 그들의 반역 정신을 죽이고 있어요. 어쨌든, 나는 여전히 학생들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Kaew; 나의 희망은 젊은 농민이나 소수민족집단 같은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요. 그들 앞에는 문제가 놓여있고 그들은 싸워야 해요. 소수민족 젊은이들이 사회변화를 가져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분명한 목적을 가진 그들 자신의 교육 제도를 조직해야 해요. 그래야 젊은이들이 알기 위해 공부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일하고 살아가는 법을 사랑하기 위해 공부할 거예요. 더불어 일할 줄을 모르면 사회를 변화시킬 방법도 알 수 없어요.

-지금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제거하고 하나의 동질의 문화를 추구하고 있어요. 우리의 소수민족 형제 자매들이 국가 자본주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자녀들을 그 체제 내에서 교육시킬 것이고, 그들의 정체성은 완전히 상실될 거예요.

Kaew: 이것을 또한 버마 국경지대의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70년대 타이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구세대와 다르게 생각하는 새롭고 진보적인 세대가 없다면 운동은 죽을 거라는 겁니다. 나는 현재의 버마의 운동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사람들이 도처에 흩어져있고 각 집단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거지요. 70년대의 타이 학생들은 도망쳐서 정글속의 공산당과 머무를 뿐이었어요.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젊은 투사들이 분해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들이 공유한 투쟁 정신은 약화될 수 있어요. 특히 그들이 소비주의에 직면했을때요. 일부는 해외에 공부하러 갔다 돌아오지만, 일부는 전부를 포기할 수도 있어요. 나는 국제영역에서 싸울 이유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버마 내부에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지만....우리가 우리 땅의 변화를 원한다면 궁극적으로 할 노력은 외국의 압력에 대응하기 보다는 우리의 고향 내부의 운동을 향해 가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Kaew; 내부의 조건이 미래를 결정하죠. 외부의 조건은 원조를 하는 거구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인생은 또다른 상품이나 새로운 패션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인생의 가치를 찾아야만 해요.

Kaew; 이 사회는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준비해야만 합니다. 타이와 버마 정부가 우리에게 읽히는 교과서에는 감춰진 정치적 아젠다가 있어요. 권력에 복종하라는 아젠다죠. 부당한 체제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걸 추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에 충실한 것이고 젊은 정신에 걸맞는 자유와 용기를 갖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역사의 바퀴를 돌릴 사명을 갖고 있는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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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후원금 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5-08-03 11:15:30, Hit : 343, Vote : 48)
Subject  
   2005년 8월 후원금 송금내역
이번달에는 200달러를 송금했습니다. 100달러에서 150달러로 이제 200달러로 후원금이 늘었는데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달에 250달러면 한 사람의 활동가가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임이 1명의 활동가를 책임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6월 잔액 231,054원

7월 1일 조대* 1만
        김태* 1만
        유해* 1만
7월 11일 이윤* 1만
7월 22일 황수* 1만 5천
7월 25일 최은* 6만
7월 26일 이민* 1만
7월 27일 김재* 1만
7월 31일 류은*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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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000원

8월 3일 송금 200달러+수수료 5천원=210,200원

잔액 165,854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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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Name  
   류은숙  (2005-07-26 19:12:03, Hit : 364, Vote : 42)
Subject  
   [펌]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우리 만원계의 일원이신 유해정씨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해서 퍼왔습니다. 올해 안식년으로 아시아 인권현장을 누비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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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유해정(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고 싶어 라디오 방송국을 차렸다는 유리코의 사무실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위치해있습니다. 동티모르 4대 방송국 중 하나라고 하기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있게 방송국 이름을 외쳐봅니다. 하지만 택시는 한참을 헤맨 뒤에야 락카로 ‘라캄비아(RAKAMBIA)’라고 쓰인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섭니다. 방송국으로 사용되는 단층 건물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던진 폭탄 흔적이 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커다란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고, 창문은 성한 것보다는 깨진 것이 더 많습니다. 방송국 기자재라곤 1평 남짓한 작은 방송실 하나와 문서작업만 되는 컴퓨터 2대가 전부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로 기억하는 탓에 총리의 종교적 신앙마저 그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종교차별해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와르의 사무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식당 겸용으로 쓰고 있는 작은 회의공간과 컴퓨터 한대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할 뿐입니다. 빠듯한 단체 운영에 안와르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99년 해방이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대학생들은 버려진 건물은 사무실 삼아 아동과 여성인권을 고민합니다.

한국의 가난한 단체도 이들보다는 호사스럽다 느껴질 만큼 열악함에 고개가 흔들어지지만 이들은 국제연대를 꿈꿉니다. 지원받기위한 연대가 아니라 지원하기 위한 연대를. 63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국민의 1/10이 죽어나간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들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읍니다. 한 시간 사용료가 하루 수입에 맞먹을 만큼 비싼 지출을 감수하며 인터넷 방에서 정보를 모으고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수고를 감수합니다.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에서 독립해 정부와 국가를 갖게 된 지 이제 3년. 해서 과거청산부터 사회재건까지 구석구석 해야 할 일엔 끝이 없지만 국제연대를 터부시하진 않습니다. 항상 ‘국외’보다는 ‘국내’사안이 우선이고, 국제연대는 몰라서가 아니라 ‘여력’의 문제라며 뒷전으로 미뤄왔던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유리코가 말합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가 없었다면 독립은 요원했을지 모른다고.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에서 아버지와 친구들을 잃은 닌도가 덧붙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 문제와 정치적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그래도 죽음의 공포에선 벗어나 있다”고. 그러면서 묻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은 무엇을 할 거냐”고.

필리핀 분쟁지역에서 만났던 이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25살의 평화운동가 빙은 “언제든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죽을 수 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런 빙에게 외부세계의 ‘연대’란 활동의 방패이자 삶을 지탱시키는 힘입니다. 거듭된 교전으로 농사지을 땅과 가축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에모다스에게도 ‘연대’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공포에 떨며 살아온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어디에 있었냐”고 절규하더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한국은 인권의식이나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발달해있지만 국외 문제에 대해선 인색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명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긴 해도 물적, 인적 자원을 쏟아 부으며 긴 호흡으로 이들과 동고동락 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인권운동’을 해왔다는 저 역시 공포에 질린 그들의 눈을 보기 전엔,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기 전엔 ‘조건’만을 탓하며 ‘국제연대’는 특별한 사람, 단체의 몫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언제쯤이면 ‘국가’라는 공간을 넘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절규와 공포에 어깨를 걸 수 있을까요?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그래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사용해달라는 사람들의 호소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동티모르 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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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A-Yeh(2)

Name  
   류은숙  (2005-07-19 13:45:23, Hit : 329, Vote : 39)
Subject  
   Doh-A-Yeh(2)
Doh-A-Yeh (이말은 버마 학생들이 투쟁할 때 쓰는 구호인데, “우리의 목표” 또는 “우리가 원하는 바”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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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친구들’에서 보내온 글입니다. 쓴 사람 이름은 Mayachon이네요. Yain이라는 버마 운동가와의 인터뷰입니다.


“우리는 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어요. 우리 학생조직은 선거에 누구도 내보내지 않았어요. 그렇게 되면 투표가 분산되고 군부가 이길 것이란 걸 알아서죠. 또한 우리는 NLD에 가입하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여전히 지하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일부는 이미 정글로 갔고 우리는 그들을 비밀리에 지원했어요. NLD가 투표의 82%를 확보하면서 승리했을 때, 나는 ”아, 자유가 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군부는 굴복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그들은 더욱 폭력적이 됐죠. 나는 Kachin주와 중국간 국경지대로 도망쳤어요. 처음에는 거기에 5-6달 있으면 될줄로 알았는데 그보다 더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이 곧 들게됐죠. 나는 Kachin 독립군이 하는 군사 훈련에 6개월간 참가했어요. 하지만 93년 경 Kachin 독립군은 군부와 휴전협약을 맺었죠. 그 이후 그들은 정권으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국경을 건너 중국 쪽으로 가야했어요. 그후 얼마돼지 않아, 여학생들은 버마여성연합(Burmese Women's Union)을 결성했고, 우리의 첫 번째 회의가 타이-버마 국경에서 열렸어요. 나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고, 그래서 지금까지 여기 머물고 있어요.”

“군대이기 때문에, 버마 학생군은 일종의 권위주의적 규칙하에 있어요. 여성들은 오직 의료, 교육, 공급, 오락 서비스에만 참여할 수 있어요. 나는 무엇이건 많이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 내가 버마여성연합에 가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목적에 대해 배우고 더욱 선명히 알게됐죠. 처음에는 군부정권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우리는 영웅이 되고, 모든 분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알았어요. 사람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 수 있고 존엄하게 살 수 있으려면 해야 할 일이 그보다 더욱 많다는 것을.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면, 각 소수민족들의 동등한 권리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 시민사회가 있어야 해요.”

“3-4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자신을 학생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졸업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죠? 졸업은 영원히 연기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날 나 자신을 바라보니 거의 40살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에게는 아이들이 있고, 함께 일하고 책임져야 할 젊은 동료들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죠. 대학 때의 수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성숙해야 한다고.”

“망명한 청년 집단은 매우 영리하고, 강하고, 용기있고, 의지가 굳어요. 그들은 우리보다 더많은 교육 기회를 가졌고, 그들은 사물을 분석할 줄 알고 창조성으로 가득차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강점이 또한 그들의 약점이기도 해요. 그들이 가진 기회로 인해 그들 중 일부는 끝없이 공부만 하려 해요.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할 새로운 피가 부족하고 영원히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요. 나는 사람들은 공부만이 아니라 일에서도 배울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답을 구하려고 공부할 것을 기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답을 발견할 수 없을 거예요. 젊은이들은 지금 국제정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요. 나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나라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것을 장려하고 싶어요. 제말은, 타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만 당신의 지식이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나는 제 3국에 망명처를 구할 계획이 없어요. 여기에 할 일이 많아요. 버마의 정의는 깊은 뿌리를 가져야만 해요. 어느날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해도, 나는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증진하기 위해 이 일을 계속할 거예요. 나는 10년 이상 부모님과 어떤 연락도 갖지 못했어요. 부모님은 내가 이기적이어서 가족을 떠난 것이라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모국을 위해 싸우는 자유의 투사인 딸을 자랑스러워 하실거라 희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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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텍알시디코리아 농성장에서

Name  
   조대환  (2005-07-14 13:15:09, Hit : 399, Vote : 52)
Subject  
   하이텍알시디코리아 농성장에서...
하루 자고 왔습니다.
(약칭)하이텍은 사측의 심각한 감시와 감독, 왕따, 각종 폭력행위 등으로 조합원들이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여 왔습니다.
2002년부터 민주노조사수를 포함한 노동쟁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들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정신질환 판정을 받았지만 정작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며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고 요양신청을 불승인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농성투쟁 중입니다.

농성장을 지킬 사람이 부족해서 1주일에 하루라도 가서 있기로 했습니다. 밖에서 자는 것은 역시나 힘들군요.ㅜㅜ


참 중요한 것은 이걸 말하고자 하기 보다는 그 곳에 있으면서 느낀점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하이텍도 실재 대부분의 생산라인은 국외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필리핀이 주요한 생산라인이라는 군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만원계 운동이 다른 방식과 연결되면 또 다른 국제주의 운동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이곳 만원계에도 있는 필리판 한국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과 같은 것을 좀더 계획적이고 연계성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타이 모임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그냥 어제 들었던 고민입니다.

요점은 우리에게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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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A-Yeh

Name  
   류은숙  (2005-07-14 11:11:10, Hit : 360, Vote : 27)
Subject  
   Doh-A-Yeh
Doh-A-Yeh (이말은 버마 학생들이 투쟁할 때 쓰는 구호인데, “우리의 목표” 또는 “우리가 원하는 바”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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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친구들’에서 보내온 글입니다. 쓴 사람 이름은 Mayachon이네요. Yain이라는 버마 운동가와의 인터뷰입니다.

“제가 10․14 항쟁 비디오를 봤을 때 처음 받은 느낌은 젊은 사람들의 순수한 힘과 용기에 대한 동질감이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이 다르고 시간과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죠. 10․14 타이 학생 봉기는 독재는 부당하므로 인민의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부 세계와 오랫동안 봉쇄돼온 버마 학생들의 각성은 우리 삶에 밀접한 일들-우리의 친구들을 향한 불의와 잔인성-로 인해 촉발됐습니다. 우리는 봉기하고 나서야 불의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인권침해의 구조와 싸울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20년 전에, Yain은 랑군 대학의 경제학부에 입학하게돼서 기뻐한 여느 소녀들과 같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으로는 학비의 1/5밖에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Yain은 한가지 목표는 성공적으로 학위를 끝내고 빨리 Kachin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는 기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학생이 의학, 공학, 임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남학생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랑군 대학의 경제학의 경우에는 똑같았지요. 그래서 저는 거기를 선택했지요. 입학 전에는 랑군에 가본적이 없어요. 가족 중 누구도 가본적이 없지요. 저는 수도에 가보고 싶었지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내가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언젠가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하고 싶어하듯이 선생님이 되거나 회계사가 되는 것이었어요.”

“1988년은 나의 마지막 학년이었어요. 처음에 저는 단지 기분이 매우 안좋았고 뭘 해야할지 몰랐어요. 군부가 대학문을 닫고 학생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했거든요. 그때 저는 옛 친구들을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우리들은 ‘뭔가 해야만 한다’, ‘이건 정의에 관한 일이다. 많은 친구들이 죽었다’는 얘기를 나눴어요. 하지만 어떤 친구들은 말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부모님을 생각해야지’라고요. 우리는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때까지 논쟁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도시의 학생 그룹을 조직했고, 다른 도시의 그룹들과 연결했지요. 우리는 큰 도시의 데모와 고향의 운동에 물품들을 보냈어요.”

1988년 8월 8일 8시 8분, 학생, 승려,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총력 시위에 모여들었다. 군부는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엄청난 탄압과 더불어 군부내에 “자기-혁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당 체제를 끝내겠다고 공포하고 1990년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약속하게 됐다.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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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고산족(4-끝)

Name  
   류은숙  (2005-07-11 19:47:47, Hit : 360, Vote : 26)
Subject  
   타이의 고산족(4-끝)
타이의 고산족(4-끝)
아시아의 선주민-많은 민족들, 하나의 투쟁(Indigenous People in Asia: Many peoples, One struggle)
Asia Indigenous Peoples Pact에서 96년 발간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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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족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산림부의 소유이다. 공공복지부에 고산족 발전센타가 있기는 하지만, 정부 부처간에 적절한 조정은 전혀 없다. 산림부는 특정 지역들을 지정구역으로 분리해왔고, 고산족들은 그런 지역에서 내쫓겨났다. 때때로 자본가들이 부패한 정부 관료들과 손잡고 고산족들에게 헐값에 땅을 팔도록 강제했다. 고산족들이 땅을 팔기를 거부하면 정부 관료들에게 시달렸다.

산림을 보존하려는 정부정책으로, 고산족들은 철거되어 저지대로 옮겨가고 타이민이 될 것이 장려됐다. Kampangpeth 지방에서 대부분이 몽족에 속하는 5천여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해야 했다. 이주민들은 거의 석달 동안을 길거리에서 살아야했다. 콜레라가 돌았고, 그로 인해 그들 중 일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고산족들은 오랜세월 타이에서 살아왔지만, 어떤 고산족들은 정치적 혼란 때문에 라오스나 버마로부터 최근에 온 사람들이다. 이러한 고산족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무장세력을 이용해 타이에서 내모는 것이었다. 이들은 진정한 난민으로 고려돼야만 한다.

고산족들에게 채소나 기타 작물을 기르도록 한 정부 정책은 또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즉, 중간상인의 착취와 시장의 불안정성이다. 또한 정부가 도로를 건설하면서, 고산족들은 평지 사람들과 더 가깝게 접촉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됐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많은 고산족들은 도시에서 매매춘, 구걸, 또는 소규모 공장에서 착취받는 노동자의 운명을 맞게 됐다.

오늘날, 고산족들은 많은 문제에 직면에 있다. 그들을 타이 사회의 골칫거리로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고 있다.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관심을 보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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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고산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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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07-06 22:03:07, Hit : 277, Vote : 23)
Subject  
   타이의 고산족(3)
타이의 고산족(3)
아시아의 선주민-많은 민족들, 하나의 투쟁(Indigenous People in Asia: Many peoples, One struggle)
Asia Indigenous Peoples Pact에서 96년 발간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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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족에 대한 정부의 정책
1956년 정부는 국경 경찰을 보내 고산족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게 했다. 1959년에 내각은 “고산족에 대한 지원위원회”를 임명했다. 1965년, 타이의 공산당이 고산족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에 내무부는 공산주의 운동을 종식시키기 위한 대응 계획을 제기했다.

1973년, 정부는 고산족 발전을 위한 이대 계획을 고안했다. 하나는 단기 계획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강력한 지지를 획득한 민감한 지역에 들어가 공산주의자들을 괴멸시키고 공무원과 군부로 하여금 그 지역을 개발하도록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장기 계획으로, 고산족들이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찾도록 돕는 것이었다. 토지개발을 하고, 아편대신에 채소를 기르고, 산림을 파괴하지 않도록 고산족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1976년, 정부는 고산족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려 했다. 또한 “국가 고산족 위원회”를 설립했다.

현재 정부는 3대 정책을 채택했다. 첫째는 고산족들로 하여금 정부 정책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 법률을 준수하고,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아편을 심는 것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셋째는 의료서비스와 가족계획조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고산족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시민권
많은 고산족들은 타이에서 태어나서 성인이 됐다 할지라도 시민권을 증명하는 서류를 얻는데 심각한 문제를 경험한다.

국가신분증은 타이 시민권의 증명물이다. 흔히 타이에서 태어난 고산지대 거주자들은 그 부모 역시 타이에서 태어났으나 시민권 서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정부는 수년간 아주 느리게 그들에게 카드를 발급해왔다. 관료제의 성격 때문에 잘못된 신분증 발급은 번창하는 사업이 돼왔다. 등록을 빨리 시키는 것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데 바쁜 이들 공무원들에게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신분증을 갖지 못한 고산족은 여행을 하려면 자기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복지관서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토지소유나 사업 허가도 시민권 신분증을 필요로 한다. 신분증 소지는 또한 투표와 고등교육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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