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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 서울시내버스 임·단협 중재쇼로 합의

2006년도 서울시내버스

임·단협  중재쇼로 합의

쉬프트제도 폐지 실패,

임금 3.4%인상, 8호봉 임금체계로 개편

해마다 파업쇼로 단체행동권 포기,

올해는 중재쇼로 단체교섭권 포기

한국노총 30년 어용의 아성, 

자노련의 붕괴가 이미 시작되었다

  2월1일부터 적용되는 서울시버스노동조합의 임·단협이 2006.7.19, 이번에는 예년의 파업쇼도 없이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중재를 신청하여 2007.7.1부터 “조합원 정년은 만 58세가 되는 해의 생일이 속하는 달의 말일로 한다. 다만, 정년이 58세 이상인 사업장은 이 규정에 불구하고 종전의 정년규정을 적용한다”와 2006.2.1부터 6,494원의 시급을 2%인상한 6,624원으로, 2006.7.1부터는 통상임금의 시비를 없애기 위하여 교통비, 근속수당을 없애는 대신 1~8호봉의 평균 시급을 3.4%인상하는 내용으로 타결되었다.


지방노동위원회 중재신청은

단체교섭권을 포기하고 자본의 품에 백기투항한 배신행위

중재쇼, 임·단협 백지위임해서

노동위원회 중재 아래 공공연히 야합하곤 지부장들 농성소동

  지금까지 서울시버스노조가 해마다 벌여온  파업쇼가 단체행동권을 포기한 것이라면, 올해 서울시버스노조가 벌인 지방노동위원회 중재쇼는 단체교섭권을 포기하고 버스자본의 품에 백기투항한 행위이다. 노사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인 조정과 달리 법률적 구속력을 갖는 중재재정은 노사 쌍방이 이에 따라야 하므로, 서울시버스노조가 중재를 신청한 것은 임단협 교섭과정에서 제시한 노측 요구안을 폐기하고 임단협을 백지위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고도 서울시내버스 지부장들이 중재재정에 항의하는 지노위 농성을 벌인 것은 눈감고 아웅 하는 깜짝쇼로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지금까지의 파업쇼를 능가하는 중재쇼를 벌여놓고 류근중 위원장이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해서 이미 수명이 다한 어용노조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쟁의의 조정은 관계 당사자 일방의 신청에 의하여 개시되어 노동위원회의 조정안이 관계 당사자에 의하여 수락된 때에 단체협약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일방이 수락을 거부하면 조정이 종료된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61조【조정의 효력】).

  이에 비해 중재는 관계 당사자 쌍방의 신청에 의하여 개시되어 노동위원회의 중재재정은 중앙노동위원회에의 재심신청 또는 행정소송의 제기에 의하여 그 효력이 정지되지 아니하며, 확정된 중재재정 또는 재심결정의 내용은 단체협약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관계 당사자는 이에 따라야 한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70조【중재재정등의 효력】).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노측 요구안 

  작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쉬프트(단축근로)제도는 서울시버스노조의 ‘주5일제 쟁취’를 내건 05년 임단투가 실패로 끝난 결과인데, 올해도 노측요구 제1안으로 ‘쉬프트제 폐지’를 내걸었다가 중재신청을 들어갈 때에는 ‘격주 쉬프트 실시’로 슬그머니 후퇴하였고, 또다시 중재재정서에는 ‘근무제도에 대하여는 노·사간 성실히 협의하여 결정한다.’라고 하여 아예 쉬프트제도라는 말도 명시하지 못하고 말았다.  



구태의연한 비공개교섭, 밀실야합

  1월말인 서울시내버스 단체협약 유효기간이 끝나고 별도의 단체협약 체결 없이 보충협약 기간인 3개월이 지나는 시점인 5월부터는 유효한 단체협약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해마다 되풀이되었지만, 올 임단협 협상과정은 7월 19일에 노동위원회 중재재정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간 십수차례 있은 것으로 알려진 노사교섭의 과정과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교섭지연, 5월부터는 유효한 단체협약도 없이 임금지급해

  해마다 임단협 교섭이 지연되어 5월이나 6월경에 파업쇼를 거쳐 극적 타결되어 7월부터는 인상된 임금을 지급하고 2월분부터 6월분은 소급적용 하여왔다. 하지만 올해는 8월 중순이 지나도록 단체협약과 임금협정서가 내려오지 않아 각 사업장에서 7월분 임금도 작년분으로 지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임단협 유효기간 1년 중 절반인 6개월분 임금을 전년도분 임금으로 지급하였다가 뒤에 가서 소급분으로 추가 지급하는 사업장이 서울시내버스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중재신청,

파업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종이호랑이임을 간파한 사업조합에 덜미 잡혀

  단체교섭이 해마다 지연되는 것을 두고 사업조합의 교섭회피만을 탓할 수는 없다. 해마다 파업쇼가 되풀이되다 보니 버스현장의 파업동력이 상실되었고, 서울시버스노조는 파업에 찬성한 대다수 조합원들로부터만 불신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버스사업조합과 서울시로부터도 ‘파업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단체교섭이랍시고 나서는 꼴이라니!’라고 비웃음만 사는 거짓말쟁이 양치기소년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서울시버스노조는 파업도 한번 못하는 거세된 수컷, 어용노조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파업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종이호랑이임을 간파한 사업조합 손아귀에 덜미를 잡혀, 직권중재나 긴급조정도 노동계에서는 반대하는 마당에 어이없이 노동조합 스스로 중재신청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동조합의 죽음!

자주성을 상실한 어용노조의 필연적 귀결

어용노조의 말로는

배신과 투항, 그리고 죽음뿐이다!

  어용노조의 노동자에 대한 배신은 조합민주주의의 압살과 노동자 탄압으로, 자본에 대한 투항은 투쟁성, 파업동력의 상실로 나타나고, 그 말로는 노동조합의 죽음이다. 이는 노동조합의 생명인 자주성을 상실한 어용노조의 필연적 귀결이다. 기존의 비공개·밀실·지연교섭 행태에 더해 이번 서울시버스노조의 임단협 중재신청은 노동조합운동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백주대낮의 뻔뻔스런 공개적 노사야합 행위로서 서울시버스노조의 어용성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노동조합의 존립근거를 스스로 허물어뜨린 서울시버스노조의 2006년도 임단협 교섭결과는 한국노총 산하 30년 어용의 아성인 자노련의 붕괴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전조이다. 

  

2006년 8월


버스복수노조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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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역사인식과 노동자의 삶과 투쟁/민주노총 노동자학교

올바른 역사인식과 노동자의 삶과 투쟁 왜 역사․노동운동사를 공부하는가? 누구도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없다. 어제를 돌이켜 오늘을 살펴보고 바람직한 내일을 만들기 위해 어제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잊으면 과거 뿐 아니라 현재는 물론 앞으로 살아갈 길까지 모두 잃는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의 상실을 뜻한다. 노동운동사도 마찬가지다. 지금 노동운동의 현실(노동운동의 수준- 조직, 의식, 투쟁, 노동조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지금까지 선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의 결과이며 노동운동 전개 과정의 일부이다. 노동운동의 현실이 어떠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전망하기 위하여는 역사적인 점검과 비판적 반성이 필요하다. 또한 전체 역사, 변혁운동에서 노동운동의 역할과 위치, 자본가 지배세력들의 지배정책과 이데올로기의 본질, 숱한 우여곡절(승리.패배.침체.고양.정체.비약)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조직과 투쟁을 줄기차게 이어 온 선배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정신을 배우고, 선배 노동자들의 ‘축적된 실천’ 경험 속에서 노동운동이 가야할 미래의 중요한 내용들을 찾아 낼 수 있다. 해방의 역사는 먼저 간 선배들의 과거와 손잡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1. 조선 후기 - 한말 (1) 조선후기 조선사회는 지주제와 신분제를 두 축으로 하는 농업사회였다.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국가의 수취체제와 지주제, 신분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토지에 긴박되어 상하 수직의 신분질서로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흔들리고 서로 계약에 의해 맺어지는 고용 피고용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국가에서는 부역노동 대신 고용노동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필요할 때마다 짧은 기간 동안 인원을 모집하여 고용하는 형태였다. 우리 나라에서 자본 임노동 관계가 싹튼 시기는 18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수공업자나 농민 가운데 스스로의 자본으로 임노동을 고용하여 상품생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은 농민층 분해를 촉진시켜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층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농번기 또는 일정한 기간 임금을 받고 농업에 고용되거나 광산 또는 수공업장, 도시 여러 분야에 임노동자로 흡수되었다. 18세기 말 무렵, 수안 흘동 금점에서는 장마철이라 태반이 흩어졌는데도 550여 명의 광군이 금을 캐고 있었으며 남아 있는 초막이 700여 개이고 인구도 15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도내의 ‘무뢰배’뿐만아니라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농사를 폐하고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19세기에 개발된 갑산 고진동 광산에서는 한 갱에서 40명이 광석을 캐내면 20명 정도가 그것을 운반하고 , 2-4명은 갱을 꾸미고, 6-8명은 물을 퍼내는 등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작업을 하였다. 놋그릇을 만드는 금속가공업에서도 임노동을 고용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정주 납청에는 약 50개의 크고 작은 놋그릇 작업장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대야 양푼 바리 같은 큰 그릇을 만드는 양대점 바리점 같은 곳에서는 20명 안팎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숟가락점, 촛대점, 대통점과 같은 작은 규모 작업장에서는 서너 명의 일꾼들이 주인과 같이 일하였다. 토지로부터 이탈한 많은 농민들을 언제나 안정되게 고용할 수 있는 일터가 충분하지는 못했다. 초기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맺는 계약관계도 아직 신분적 인신적 구속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자유롭고 대등한 계약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봉건사회 해체기에 등장한 초기 임노동자들의 불안정한 고용관계와 반프로적인 성격은 국가 변란이나 농민항쟁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다. 1811년 ‘홍경래 난’ 때는 운산광산의 노동자가 반란군의 주력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평안도 지방은 잠채광업이 발달하여 광범위한 광산노동자 층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임금을 받고 생계를 꾸려가던 층이었다. 1862년 농민항쟁 때는 몰락농민인 유민과 계절적 단기 임시 고용농민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장시를 떠돌며 날품을 팔거나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층으로 품을 팔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는 노동력만 소유한 층이었다. (2) 개항이후 노동자층의 형성과 노동운동 개항이후 조선사회는 미곡 수출의 증대에 따라 지주제가 강화되고 서양 면포가 수입되면서 국내 토포산업이 타격을 받게 되었다. 봉건지배계급의 수탈도 가혹해 졌다. 그에 따라 소작농민의 경제적 조건이 악화되고 빈농이나 농업노동자층의 몰락이 촉진되었다. 개항이후 일부 근대적 공장이 들어서기도 하였으나 아직은 농공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토지에서 유리된 몰락농민들은 공업노동자보다는 농업노동자, 광산노동자, 부두노동자, 철도노동자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개항 후 제국주의가 조선에 진출하고 수탈하려는 자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노동자 계급의 형성의 특징이었다. 농업 임노동자층은 1894년 농민전쟁 과정의 집강소 기간에 무장농민군의 주력으로서 과격한 행동양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토호 요호 부민층의 재산을 빼았기도 하고, 원한 깊은 양반유생층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농번기가 되어도 돌아갈 땅이 없는 층이었다. 9월의 2차 봉기때 농민군의 주력은 빈농층과 농촌임노동자, 도시의 잡역자, 실업자 층이었다. 이들은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민란, 의병과 영학당 활빈당에 편입되어 저항을 계속하였다. 1880년대 이후 광산의 개발은 대규모화하여 1886년 영흥금광에는 광부가 5-6천에서 1만명 정도에 이르렀다. 운산광산 등 외국인의 광산소유가 많아지면서 광산노동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광업은 경영을 담당하는 덕대가 10-20명 규모의 노동자를 거느리고 자금을 대는 물주에 소속되는 물주 - 덕대 - 임금노동자의 생산조직 형태를 띠었다. 이들 광산임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항해 파업, 시위의 형태로 저항하는 경우가 빈발하였다. 1900년에는 영국 자본의 은산 금광에서, 1899년과 1901년에는 독일 자본의 금성 당현 금광에서, 1901년에는 일본 자본의 직산 금광에서 집단 저항을 일으켰다. 개항을 계기로 인천 부산 원산 목포등 개항장에서는 화물을 운반하고 포장하는 부두 노동자들이 증가하였다. 직업적인 부두노동자들의 수는 1897년에 1천여명, 1902년에 2천여명, 1903년에 3천여명, 1906년에 5천여명이었다. 비직업적 부두노동자를 포함하면 이보다도 훨씬 많은 부두노동자가 있었다. 부두노동자들은 미곡을 계량하고 포장하는 두량군, 화물 운송에 종사하는 칠통군 지게군 하륙군으로 노동하였으며, 운반 거리 무게에 따라 임금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 상인 자본가에 고용된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은 날이 밝아서 어두워질 때까지 고된 일을 하고도 점심은 굶고 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1898년에서 1903년 사이 목포 부두의 노동자들은 일본 자본가의 착취에 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임금인하에 반대하는 임금투쟁, 중간착취자인 십장에 대한 반십장운동, 거류지에서 일본패 착용에 반대하는 반일본패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국 주의의 조선 침탈을 위한 수단인 철도 건설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경인선 경부선 일부 구간 공사에 경인지방과 부산지방의 도시노동자들과 영세 농민들이 철도 건설 노동자로 참여하였다. 경부 철도 공사에 고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단순 노동자가 최고 40-50전, 전문기술자가 60전까지 받았는데 이는 일본인 노동자의 12~13 수준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기에는 철도건설에 노동력을 강제 징발하였다. 노동력 강제 징발에 반발하는 저항의식은 반일반철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04년 9월에는 경기도 시흥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폭동을 일으켜 강제 동원에 앞장선 친일 군수와 일본인 2명을 죽였다. 같은 무렵 황해도 곡산에서도 경의선 철도 공사를 맡고 있던 일본인 청부업자 8명이 주민들의 손에 죽었다. 개항기의 임노동자층은 대부분 광산, 부두, 철도건설, 농업 노동자로 존재하였으며 근대적 공업의 임금 노동자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들의 생활은 극히 불안정했으며 임금은 성과급 제도에 따라 일정치 않았으며, 한 달에 15일 정도 노동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주거도 일정치 않아 노숙하는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두노동자나 광업노동자의 투쟁은 근대적 노동운동의 출발이었다. 2. 일제 식민지 시기 (1) 1910년대 노동자의 존재와 노동운동 1910년대 일제 식민지 무단통치기 전체 산업에서 공업과 공업인구의 비중은 여전히 낮았다. 일제는 1910년 12월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상공업을 철저히 억제하였다. 조선에서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총독은 명령 하나로 회사를 해산 또는 폐쇄시킬 수도 있었다. 1919년 조선 안의 민족별 자본 구성을 보면 조선인 기업이 11.6%, 일본인 기업이 78.4%, 조일 합동 기업이 8.9%였다. 조선인 회사도 대부분 일제의 수탈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엇기 때문에 일본 경제의 재생산권에 예속되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노동자수는 1911년 1만 4천여 명에서 1919년 4만 8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제 강점기 전 기간에 걸쳐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민족 차별에 기초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12~13 정도였고 노동시간은 12~16시간에 이르렀다. 1910년대 노동자들은 아직 양적`질적으로 전체 운동을 이끌어갈 주체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으나 공장 노동자수가 늘어나고 초보적인 노동자 단체를 만들어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민족적 차별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벌였다. 이 시기 노동자 단체는 80% 이상이 자유노동자 조직이었고, 1905년부터 1919년 사이에 조직된 노동단체 수는 32개에 이르렀다. 당시 노동단체들은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직업을 알선하고 소개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노동자 권익 보호보다 노동력 공급 기구의 성격을 띠었다. 노동자 파업투쟁은 1917년까지는 연간 10건을 넘지 않았고 참가인원도 100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1918년에는 연간 50회에 4400여 명이, 1919년에는 연간 84건에 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파업투쟁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노동조건에 반대하는 생존권 투쟁이 주였으며 대상은 주로 일본 자본이었다. (2) 1919년 3.1운동과 노동자 투쟁 1919년 3.1운동은 일제 식민지 강점기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일제는 헌병의 총검을 앞세운 무단통치에서 고등경찰을 앞세운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지배방식을 교활하게 바꾼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양보와 후퇴는 조선민중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었다. 또한 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방향과 주체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일에서 4월 말까지 2개월여애 걸쳐 200만명이 넘는 민중이 3.운동에 참가하였다. 전국 232개 부군가운데 229개 부.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169여 개의 주재소, 면사무소 등이 파괴되었다. 격렬한 반일항쟁 뒤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일제가 만든 통계에 따르더라도 전국에서 학살된 사람이 8천여 명, 부상자가 1만 5천여 명, 검거된 사람이 4만 7천명에 이를 정도였다. ㅇ 노동자 만세 시위 운동 3.1운동 당시 노동자 계급은 전체 인구가운데 수적으로 많지도 않았고, 독자적인 요구를 제기하자 못했으나 초기단계부터 독자적으로 또는 대중과 결합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거나 동맹파업을 전개함으로서 투쟁의 분위기를 지속시켰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3월 2일 0시 20분 종로 네거리에서 약 400명의 노동자집단이 만세를 부르면서 종로경찰서 앞까지 시위하였는데 주모자 20명이 체포되었다. 일인측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 시위이다. 3월 8일 오후 7시 40분경 용산에 있는 조선총독부 총무국신쇄소에서 야간 작업을 하던 노동자 200명은 식당에서 시위를 결의하고 사옥앞에서 실행하자 다른 노동자도 이에 가담하여 만세를 고창하여 기세를 올리는데 급거 출동한 일본군 용산헌병분대에 의해 시위지도자 19명이 검거되고 진압되었다. 이를 계기로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전차차장과 운전수 및 수선공들이 잇따라 파업에 들어갔다. 3월 9일 오전 10시 30분 출근교대해야 할 차장, 운전수가 속속 퇴사하고 종언원이던 운전수, 수선공들도 3시경부터 차례로 전차를 차고에 넣고는 퇴사, 모두 120명이 파업에 참가하므로서 이후 3월 29일까지 20일 가까이나 서울의 전차교통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에 당황한 전기회사 당국은 내근일본인사원으로 하여금 전차를 임시 운행케 하였으나 마포선, 청량리선, 왕십리선, 의원선의 운행은 쉴 수 밖에 없었다. 회사측과 일본경무당국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시위파업행동에 회유 협박 등 방법으로 분열작용을 가하여 일부 노동자로 하여금 동맹파업에서 이탈시켜 시내중심부의 전차운전을 시켰는데 배신자에 대한 제제가 가해졌다. 3월 10일 종로 4가에서 파업에서 배신 이탈하여 전차를 운전하고 있던 한국인 운전수에게 약 300명의 시위대가 폭행을 가한 것을 시초로 도처에서 전차에 투석 또는 파괴행위로 나타났다. 3월 22일 철도기관수 차금봉은 잡역노동자와 부근의 전차차장, 공장직공 등 700-800여 명을 이끌고 만리동에서 독립문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는 27일에도 만철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의 시위를 조직하고, 서울역 앞에서 조선노동대회, 조선독립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시위를 이끌었다. 이 시위행진은 그동안 잠잠하였던 시위운동에 불을 붙였다. 23일은 새벽부터 훈련원, 동소문, 미생동, 원효로, 창덕궁 등 시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차금봉은 27일에도 만철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노동자 800여 명이 서울역 부에서 앞에서 ‘조선노동자대회’ ‘조선독립’ 등의 구호가 적힌 프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시위를 벌였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철도국 전한국인 노동자 900명 가운데 불과 85명의 탈락자를 제외한 거의 전원인 800여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3월 31일까지 5일간의 파업을 감행하였다. ㅇ 노동자 파업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노동자 파업은 84건에 9011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92%인 8,283명이었다. 전체 파업의 75%가 공장 공업이 발전하고 있던 경기도 경상남도 평안남도에서 일어났다. 파업기간은 1-3일이 대분이었으나 6 곳에서는 8일 이상 파업을 지속하였다. 파업건수로는 인쇄공 13, 제화공 12, 정미소노동자 9, 담배공장노동자 8, 운수노동자와 부두노동자가 각 4, 철공소직공 4, 전기관계 노동자 3, 토건노동자와 광산노동자 각 3건이었다. 발생건수로나 참가인원으로나 압도적인 다수가 임금인상 요구로써 전체 쟁의건수의 83%를 차지한다. 이것은 1차 대전 이래의 물가등귀로 인한 실질임금의 현저한 저하와 세계에서도 기아임금으로 유명했던 당시 일본인 노동자임금의 4-6할 밖에 안되는 민족차별적 저임금으로 말미암아 빈궁의 구렁텅이에 떨어진 한국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였다. . 쟁의형태는 공정기계시설등이 파괴, 일본인에 대한 폭력행사, 항의 연설회, 시가행진, 동맹파업, 태업, 진정등의 형태였다. 노동자들은 운동의 시초부터 학생, 시민과 함께 시위에 과감하게 참가하고 운동이 진압된 뒤에도 끝까지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의 진행과 함께 한국노동자는 참가인원과 활동역량을 증대하여 항일투쟁의 중추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운동과정에서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각성과 자각이 촉진되어 민족해방운동의 저변을 확대한 데 있었다. 1920년대 들어 민족해방운동이 발전한 것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3) 1920년대 노동조직과 노동운동의 성장 ㅇ 노동조직 투쟁을 통하여 민족적, 계급적으로 자각한 노동자들은 1920년에 일제가 소위 문화정책이라는 회유책으로 약간의 언론의 자유와 집회를 허락하자 한국최초의 합법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만들었고, 시위와 파업의 최선봉에 섰던 인쇄직공, 전차차장, 운전수, 수선공, 연초제조공들이 각기 인쇄직공조합, 전차종원원조합, 연초제공조합을 조직한 것을 비롯하여 이발직공조합, 양복직공조합 등 직종별 노동조합이 속속 조직 결성되었다. 이리하여 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에 조선노동연맹으로 개편되었다가 더욱 증가하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계속해야 한다는 취지아래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성립되었다. 1920년 4월 설립된 조선노동공제회는 최초의 근대적 노동단체인 공제회로서 노동자를 비롯하여 실업가, 의사, 변호사 같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함께 참가하였다. 노동공제회는 기관지 <<공제>>를 발행하고 노동야학, 노동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몽단체였다. 노동공제회의 이런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긴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1922년 10월 ‘신사회건설’,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내건 조선노동연맹회를 만들었다. 경성전차종업원회 등 직업별 노조와 일부 소작단체 등 13개 단체와 2만여 회원을 한데 묶은 노동연맹회는, 1923년 5월 1일 최초로 전국규모의 메이데이 행사를 여는 한편 경성여자고무직공조합과 경성양말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이들의 파업투쟁을 지원 지도하였다. 노동조직이 발달하면서 1924년 4월 전국 260여 노농단체와 5만 3천여 회원을 거느린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노농총동맹은 “우리는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의 계급의식이 높아지고, 식민지 사회에서 노동자 농민의 계급 기반과 하는 일이 달랐기 때문에 노동총동맹은 조선공산당의 노력으로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으로 나뉘었다. 이 무렵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이 늘어나고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근대적 공장이 들어서면서 각지의 노동조직도 바뀌어 나갔다. 같은 지역에 같은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이 형성됨에 따라 지역합동노조는 점차 직업별 노조로 분화하였고, 같은 지역의 지역별 노조들은 상급단체로서 지역연맹체를 결성하였다. 영흥노동연맹, 원산노동연합회 같은 지역연맹체들은 높은 단결력을 바탕으로 서로 파업을 지원하고 함께 메이데이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소작쟁의 여성운동을 연대 지원하는 등 20년대 지역민중운동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ㅇ 노동쟁의 이러한 노동조직의 발달과 함께, 1920년대 노동운동도 발전하였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최초로 대규모 연대파업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파업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21년에서 1925년 사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당시 공업이 치중되었던 경기도, 경상남도, 전라북도에서 주로 일어났다. 1920-22년까지의 파업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이 임금인하 반대와 임금인상 요구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1923년 뒤부터는 파업참가 인원도 많아졌을 뿐 아니라 노동자의 요구조건도 단체계약권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일본인 악질 감독의 추방, 대우개선 등과 같이 그 폭을 넓혀갔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자 파업은 ① 주로 남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공장과 부두 운수노동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② 20년대 이전부터 얼마간 훈련되어온 운수와 부두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의 선두에 섰고 정미 제분노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③ 많은 투쟁이 자연발생적 투쟁으로서 주로 임금인상 요구, 임금 인하 반대 등 경제적 요구에 집중되었다. ④ 23-25년의 파업투쟁에서는 노동단체들의 역할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노동자 조직의 발달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파업투쟁은 전반기보다 참가 인원도 늘었고 그 동안 거의 파업이 없었던 북부지방의 공장 광사느로 이어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26년 목포제유노동자파업과 1927년 영흥흑연광산노동자 파업은 50-7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때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만들어 일본경찰과 자본가의 탄압에 맞서기도 하였다. 20년대 후반 투쟁을 통해 조직과 계급의식을 높여간 노동운동은 1929년 원산총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920년대 후반기 파업투쟁은 ① 노동단체들의 지도를 받아 연대파업을 완강하게 벌였다. ② 20년대 전반기와는 달리 전국으로 파업이 확산되었다. ③ 광산노동자 토목건축노동자들의 파업이 활발해졌다. ④ 노동자 파업을 지키려는 투쟁단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⑤ 파업투쟁이 경제투쟁을 넘어 점차 정치투쟁의 성격을 띄기 시작하였다. ■ 자세히 보기 원산 총파업 투쟁 (1929년 1월 - 4월)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2천 여명의 노동자가 80여일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하여 우리 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큰 봉우리를 이룬 원산총파업이 일어났다. 원산총파업은 20년대 노동운동을 결산하면서 30년대 노동운동이 새롭게 시작함을 알리는 투쟁이었다. 1928년 9월 영국인이 경영하던 라이징 선 석유회사에서 악질 일본인 현장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 박준업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9월 8일 120여명의 노동자가 회사에 항의하기 시작하였고, 9월 18일 원산노련이 지도하여 감독파면과 최저임금제, 해고수당제를 실시하라며 파업을 벌였다. 회사에서는 마지못해 3개월 뒤에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석 달 뒤인 12월 28일 원산노련이 단체협약안을 만든 뒤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자, 회사 쪽은 “모든 노동단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공과 직접 해결한다”는 구실로 요구를 거절하였다. 회사측에 비열한 태도에 격분한 300여 명의 문평 석유공장 노동자들은 1929년 1월 14일 최저임금제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단체계역권의 확립, 지배인의파면, 대우개선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재차 파업에 들아갔다. 파업에 드어간 노동자들은 가두 시위를 벌이면서 기세를 올리고 수천장의 삐라를 원산시민과 각 노동조합에 배포했다. 상급단체로서 단체교섭권을 가진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는 즉시 산하의 노동조합들에 대해서 이들에 호응하여 파업을 단행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조선 각지의 사회단체와 노동대중에게 파업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한 공장에서 시작한 파업은 대규모 총파업으로 발전되었다. 공장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자유노동자들까지도 합류하여 파업노동자의 수는 약 3천여명에 달했다. 마침내 원산 일대는 파업의 분위기에 휘말리고 산업, 운수, 교통기관은 일체 정지되어 버렸다. 다음은 원산총파업의 시작과 파업 분위기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1월 23일의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 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 어디서 어떤한 일이 돌발할런지 모른다." (동아일보 1929.1. 26.). "25일의 원산 일대는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노동자의 규찰대와 경계하는 경관 사이에 때때로 충돌이 일어났다."(동아일보 1929.1.27.) "갈매기 떼 날아 설레는 원산항의 바람 쌀쌀한 부두는 산비가 오려고 누각에 바람이 가득한 것과도 같은 긴박한 공기에 휩싸였었다. 파업노동자들은 자본가측의 인원들이 화물선이나 창고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람사슬로 피케트라인, 즉 감시선을 늘이고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는 붉은기를 지킨다. 우렁차게 '적기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누비듯이 노조일꾼들이 분주히 오가고 또 규찰대들이 감시하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 번 거리며 슬슬 돌아다녔다. 자본가들의 앞잡이들과 파업방해분자들은 담장 같이 둘러선 무장경찰의 힘을 배경으로 담력을 북돋우고 들이덤빌 기회를 노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일본화물선의 선원들은 모두 다 갑판 위에 올라와 뱃전난간에 기대서서 서로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관전을 하고 있었다."(김학철 [격정시대]) 노동자들은 파업지도부의 지도에 따라 식량과 자금의 모금활동, 저축활동을 전개하였다. 파업 자금의 비축을 위해 한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며 1일 2식과 금연 금주운동을 벌여 파업기금 1만2천 원 마련하였다. (쌀 한가마에 5원) 일제 경찰과 깡패 조직에 맞서 파업을 지키기 위한 ‘규찰대’도 조직하였다. . 원산 노동자들의 파업에 나라 안팎에서 광범한 지지와 연대를 보였다. 다수의 노동조합, 농민조합, 기타 사회단체들이 파업 중의 노동자들에게 격려문과 투쟁자금을 보내주었다. 원산 부근의 농민들은 식량과 땔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중국, 프랑스,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자들이 격려 전문을 보내왔다. 외국 노동자들의 지지와 성원의 모습도 보인다. 원산총파업을 직접 본 김학철은 자전 소설 <<격정시대>>에서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갈이 그리고 있다. 원산부두노동자들이 일제경찰과 파업깨기꾼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물선 ‘쯔루마루’선원들은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그들은 스또반자이 !(파업만세 !) 교오다이찌 감바레 !(형제들, 버텨라 !)라는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일본 배에 있던 선원들도 응원시위를 했으며 여러 배들이 일제히 우렁찬 뱃고동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파업 깨기 꾼과 일본경찰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한순간 모두 멍청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유분수지, 내지인(일본인)이 불령선인의 편을 들다니 ! 이와는 반대로 파업자들은 그 뜻하지 않은 성원에 크게 고무되었다. 일제는 ‘치안’과 ‘사회안정’을 핑계삼아 경찰과 소방대, 인근 일본군 제19사단 함흥연대의 일본군 400여 명을 보내 파업 노동자를 위협하였다. 자본가들은 깡패집단인 국수회, 일본 청년당 등을 투입하여 위력단이라는 폭력조직을 결성하였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를 해고하고 실업노동자를 모집하고 인천 등지에서 노동자를 데려와 파업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또 일제는 김경식을 비롯한 원산노련의 핵심간부 42명을 구속하였다. 1929년 2월 7일 김경식 위원장을 포함하여 20명이 잡혀 들어간 뒤 원산노련은 2월 9일 원산총파업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내려온 변호사 김태영을 직무대행으로 선출하였다. 직무대행 김태영은 총독부에 진정하고 원산경찰서에 조정을 청우원하는 등 타협적인 방법에 매달렸다. 일제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말고 작업장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면서 파업 배후에 ‘공산주의자가 관련된 혐의가 있다’고 몰아부치 일제의 위협에 굴복하여 파업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일제와 자본가들은 3.1운동 10주년을 전후하여 파업이 전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3월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원산노련을 불법화하고 마침내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4월 1일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은 함남노동회를 습격하는 가두투쟁을 벌였지만, 파업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4개월에 걸친 투쟁을 마감하였다. 원산총파업은 가혹한 착취와 탄압을 일삼는 일제와 자본가의 본모습을 인식하고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노동자 대중이 밑으로부터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고(규찰대는 지도부와 달리 비타협 투쟁 정신을 보여줌), 노동운동이 한 공장, 한 지역을 넘어 지원, 연대투쟁을 벌였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사정에 따라 흔들리기는 하지만 끝내 자본가 편에 설뿐이지 결코 노동자 계급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원산총파업을 계기로 ‘혁명적’ 노조가 온 나라에 번지게 되었다. (4)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노동자들의 삶은 더 어려워지고 날이 갈수록 일제가 탄압은 더 심해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려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높아갔다. 사회주의자들은 원산총파업 뒤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고 있지만 조선노동총동맹의 지도부가 ‘개량주의’에 빠져 대중투쟁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들은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노동자투쟁을 바탕으로 개량주의 노동조합에 맞서는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비합법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을 이끈 사람들은 20년대 사회주의자 또는 코민테른과 손을 잡고 국내에 들어온 사람들, 공황을 앞뒤로 사회운동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 지방의 토박이 공산주의자들, 합법적 노조운동을 했던 사람들, 그리고 광주학생운동 뒤에 직접 생산현장으로 들어가 활동했던 학생운동 출신들이었다. 또 20년대 말부터 30년대 전반에 걸쳐 운동과정에서 성장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있던 ‘개량주의 노동조합’을 계급에 뿌리를 둔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바꾸거나, 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을 통해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가들은 옛 공업 중심지와 30년대부터 진행된 ‘병참기지화정책’에 따라 새로 발달한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벌였다. 반(班)이나 공장그룹 등의 세포조직을 기초로 분회를 두고 그 위에 공장위원회 또 그 위에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든 뒤 전국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드는 방향으로 조직을 세우려 하였다. 1929년부터 1931년 무렵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크게 보아 전국을 포괄하는 당을 세운다는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성과는 실제 그다지 크기 않았으며, 공장 안의 많은 노동자 대중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학생이나 인텔리를 중심으로 한 반제동맹 같은 모습이 더 많았다. 1931년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먼저 튼튼한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어 토대를 닦은 뒤 전국을 포괄하는 당을 만든다는 새로운 조직 노선을 실천에 옮겼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운동가들은 파업투쟁을 조직.지도하며 대중과 결합하여 그들의 계급의식을 높이는 활동을 했다. 이때 벌어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가운데 함남의 흥남 일대를 중심으로 4차에 걸쳐 추진된 ‘태평양노동조합사건’(1930-35)이 두드러졌다. 또 1933-36년 서울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재유 그룹의 운동은 “각 공장에서 노동자를 획득하여 공산주의적으로 훈련하고 화학.섬유.금속 등 산업별로 부문을 나누어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해야 한다”면서 많은 공장과 사업장에서 공장반을 조직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여주 양평 지역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서울에 있는 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을 조직하였다. 1936-38년이주하 등이 앞장서서 벌인 원산지역 노동조합운동은 적색노조 원산좌익위원회를 결성하려고 원산 시내의 철도 금속공업 화학공업 부문에 산업별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그 하부 조직으로 적로반을 결설하였다. 원산지역 운동가들은 지역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의 운동세력을 통일하려했지만, 이 운동을 충분히 벌이기 앞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성공하지 못했다. 이 밖에도 평양, 신의주, 겸이포, 여수, 마산, 부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가 만든 통계로도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혁명적 노조관련 사건이 70여 건이 일어나 1,759명이 연루된 사실에 비추어 보아 이 운동이 1930년대 전반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로 만든 조직’인 혁명적 노동조합은 노동자 정치조직과 노동자 대중조직이 뒤섞여 있었다. 의도는 혁명적 대중조직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선진 노동자들이 주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혁명적 노조가 비합법 형태를 띤 것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임무를 떠맡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일제가 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을 통하여 지나치게 비합법투쟁과 정치투쟁을 벌인 한계도 있었다. (5) 1930년대 후반 -해방 1937년부터 40년까지 430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나 약 2만5천명 노동자가 참가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주로 군수산업부문을 중심으로 벌어져 일제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자주 태업과 집단 탈주 등의 수단을 써 투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제의 ‘생산력확충 정책’에 맞서는 ‘군수 생산력 저하와 파괴운동’이었다. 1940년대 들어 1945년까지 일제가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혹독한 탄압 속에서 노동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지만 그때까지 쌓아온 투쟁의 흐름이 단절된 것은 아니다. 운동은 침체됐지만 조직운동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잠복해 있던 투쟁 역량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숱한 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몇 달만에 전국 조직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읽기 자료> 최초의 고공농성 - 을밀대 위의 강주룡 노동운동사에서 ‘고공 농성’하면 먼저 1990년 4·5월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투쟁이 떠오를 것이다. 그 보다 60여 년 전 1931년 5월 29일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지도자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고공농성을 벌인 사건이었다. 신문에서는 강주룡의 을밀대 농성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을 편 ‘체공녀(滯空女)’라고 크게 다루었다. 그때도 이미 한 여성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싸운 일을 신문이 흥미본위로 다룬다고 비판하는 글이 있었다. 하지만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사건이라 죽을 때까지도 이름과 함께 을밀대가 붙어 다녔다. 나도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 강의를 할 때 을밀대 지붕 위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강주룡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의 삶과 투쟁을 소개한다.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은 을밀대 현판 위쪽만 찍었기 때문에 높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을밀대를 가까이서 멀리서 찍은 다른 사진을 옆에 놓고 보면 “저 높은 곳에서......!”하는 반응이 먼저 나온다. 1931년 5월 평양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전까지 강주룡의 삶은 그해 6월 7일 <<동광>> 잡지의 ‘무호정인’과 인터뷰하면서 밝힌 것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말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이력을 짚어 보자. 을밀대 올라갔을 때 신문에 실린 강주룡의 나이는 30이었다. 우리 나이로 31살이었다고 미뤄 보면 그가 태어난 해는 1901년으로 짐작된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나 열네살 때까지 고향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간도로 이사갔다. 20살 때 통화현에 있는 최전빈에게 시집갔다. 남편은 그보다 나이가 5살이나 아래였다. 21살 때 남편과 같이 백광운(白狂雲)의 독립군부대에서 편입되어 6,7개월 활동하다가 ‘거치장 거려 귀찮으니 집에가 있으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지 5,6개월 지난 어느날 남편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았다. 남편이 누워있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그날밤 숨이 끊어졌다. 시집에서는 ‘남편 죽인년’이라고 중국 경찰에 고발하였다. 경찰서에 잡혀간 강주룡은 일주일 동안 꼬박 굶었다. 1924년 서간도에서 귀국해서 사리원에서 일년쯤 지나다가 1926년 평양으로 와서 고무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부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보살펴고 집안을 꾸려나가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1930년 노동조합에 들어가 평양 고무공장들의 파업투쟁에 적극 참가했다고 하나 활동 내용은 알기 힘들다. 강주룡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5월에 일어난 평양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투쟁부터이다.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에서는 5월 16일 회사측에서 제멋대로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고 이 때 강주룡이 앞장섰다. 평원고무공장은 회사들의 연합체인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제일 먼저 임금을 깍겠다고 나섰다. 동업회에 속한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고무공장의 싸움 결과는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300여 명 노동자들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였다. 5월 28일, 싸움을 시작한지 12일이 지났다.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평원 노동자들은 싸움의 강도를 높이려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을 선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은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선언하고 한 밤중에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쫒아냈다. 강주룡은 일본 광목 한 필을 사가지고 캄캄한 밤 을밀대를 찾아 올라갔다. 처음 올라갈 때 생각은 자살을 할 작정이었다. 죽음으로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비장한 결의였다. 자살하려고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았다. 살아온 30여년 세월이 떠올랐다. 죽기로 작정했는지라 미련은 없었으나 이대로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저 여자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 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었나’하는 오해를 받을 것같기도 하였다.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리고 죽어야 할텐데... 캄캄한 밤중 어둠 속에 을밀대가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옳다 죽더라도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아침에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우리 싸움의 뜻과 평원공장의 횡포를 마음껏 외치고 죽자고 마음을 바꿨다. 사다리도 없는 지붕 위로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건너편으로 던져 넘겼다. 나머지 한쪽을 기둥에 꽁꽁 묶었 힘주어 당겨보았다. 늘어진 광목을 밧줄처럼 타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5월 말, 봄이라지만 아직도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은 추웠고, 누가 밧줄을 타고 쫓아 올라올 염려도 있었다. 늘어진 광목을 걷어 올려 몸을 감쌌다. 계속 싸움을 하느라 피곤이 몰려와 을밀대 지붕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는지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와 눈을 떴다.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5시 10분 무렵이었을 것이다. 을밀대 앞 마당에 산책 나왔던 사람들이 몰려와 쳐다보고 있었다. 웬 여자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 지붕까지 올라가 앉아 있을까 궁금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강주룡은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각오를 밝히고 외쳤다. 연설을 듣던 한 예수교 장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강주룡은 자기가 외쳤던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중략)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뿐입니다.”(ꡔ동광ꡕ 1931년 7월호, 중략은 원자료에도 빠진 것임 ) 강주룡은 을밀대 꼭대기에서 온 몸으로 자본의 착취와 식민지 권력의 폭력을 폭로하였으며,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 파업투쟁이 평양 2천 3백명 고무노동자들의 생존권을 가장 앞장서서 지키는 싸움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달려오고 뒤쪽에서 소방대원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완강히 버티는 강주룡을 밑으로 밀어 떨어트렸다. 그물 위로 떨어지면서 기절했다 깨어난 강주룡은 평양서로 끌려갔다.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풀려날 때까지 밥 한술 먹지 않고 쟁의가 해결될 때까지는 굶어 죽더라도 먹지 않겠다며 완강히 버텼다.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회사측에서는 직공을 새로 모집하여 공장을 돌리려고 하였다. 강주룡의 석방으로 힘을 얻은 노동자들이 공장 담을 넘어 점거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안병식(23), 오양도(27), 고도실(18), 최용덕(28)이 체포되었다. 이들도 58시간 단식 투쟁으로 버티다 6월 3일 저녁에 풀려났다. 이 날 저녁 신직공들을 막으려고 싸우던 싸우던 강주룡과 간부 네명이 기절하여 쓰러졌다. 며칠 계속한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전차와 자동차를 가로막고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오랜 시간 진흙탕 속에서 뒹굴었기 때문이다. 6월 6일 파업단 대표로 공장측과 만난 강주룡은 “임금 감하를 반대하고 맹파하였던 우리 직공들도 환원해야 한다. 고주측에서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파업 직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명예와 일가족의 생사 문제는 전연 판이한 문제가 아닌가”하고 따졌다. 6월 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임금감하를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파업한 노동자 49명 모두를 채용 하라는 요구는 얻어내지 못하였다. 파업공 27명과 신모집공 20명을 배분하여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타결되었다. 6월 9일, 아래로부터 성장한 순수 노동자 출신 강주룡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었다. 연희전문학교를 나오고 모스크바 공산대학까지 나온 최고 수준의 엘리트이며 활동가인 정달헌, 평양의 활동가, 노동조합 간부들과 함께 1930년대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 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에 시달리다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아픈 몸이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병은 시름시름 깊어만 갔다. 어려운 형편에 병원조차 제대로 갈 수 없었다. 동료들의 처지도 어렵고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달 동안 앓아 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 13일 오후 3시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하고 설흔 두 살 한창 나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65세 된 노모, 61세 부친, 33세 오빠, 15세 동생을 뒤에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틀 뒤 8월 15일 남녀 동지 1백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그가 죽은 때는 지금까지 소개한 책 마다 다르고 확실하지가 않은데 이날이 맞다.) 강주룡의 삶과 투쟁은 대중에 앞장서서 죽기로 싸우겠다는 지도자의 꿋꿋한 모습과 함께 명예롭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그의 외침은 지금도 파업 투쟁을 벌이다 이런 저런 사정을 들먹이며 떠나는 노동자들, 연대 파업을 하다 단위 사업장 문제가 타결됐다고 손흔들며 떠나는 노동조합, 대중의 동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며 타협하다 주저앉는 간부들을 꾸짖고 있는 듯하다. 3. ‘해방공간’의 노동운동 일제가 망하고 총독부 억압기구가 무너지자 한국사회는 ‘권력의 진공상태’ 또는 ‘혁명적 정세’를 맞이했다. 이때 밑으로부터 엄청난 혁명역량이 솟아올랐다. 식민지시대부터 활동해오던 변혁운동진영이 빠르게 다시 조직되어 건국준비위원회(1945.8.15)와 인민공화국을 세웠다.(1945 9 6). 그러나 미국은 ‘점령군’으로 이 땅에 상륙하여(1945 9. 8), 남한에서 오로지 자기들만이 합법정부라고 내세운 미군정은 남한을 세계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동아시아에서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정책을 발빠르게 펴나갔다. 미군정은 친일파가 꽉 들어찬 경찰 관료 군대를 동원하여 변혁운동 진영의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을 가로 막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 노동자 자주관리운동 해방후 노동자 농민들의 가장 당면한 과제는 김순남의 ‘해방의 나라’ 2절 가사에도 표현하였듯이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았겼든 토지와 공장 정의의 힘으로 탈환”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차지했던 재산은 조선사람들을 착취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조선 사람이 접수하고 운영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이 재산을 손에 넣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밑거름으로 삼으려는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해방과 함께 시작되어 1946년 8월 무렵까지 1년여간 노동자들의 생활권 보장과 함께 스스로 공장을 접수하여 관리하려는 투쟁이었다. 해방 뒤 노동자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공장 문을 스스로 열거나 ‘그동안 땀흘려 일한 공장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면서 공장을 접수하고 관리했다. 생산하지 않으면 자신이 굶는다는 의미에서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었으며, 혁명적 분위기를 틈타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접수하여 운영하면서 일제와 친일 자본가를 몰아내고 생산수단을 노동자 손에 넣으려는 투쟁이기도 했다.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땀흐렸던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기계를 부수고 원료를 팔거나 불지르는 행위를 막고 계속 공장을 운영하여 스스로 생활을 지키려는 뜻이 있었다. 해방되자 일본인 자본가는 공장문을 닿고 시설을 처분해서 일본으로 도망갈 궁리 뿐이었고, 한국 자본가들도 생산을 멈추었다. 공장이 닫혀 일터를 일흔 노동자는 퇴직금을 요구하는 싸움과 함께 자주관리운동을 벌였다. 해방이 되자 자주관리운동이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해방이 될 때까지 명맥을 지켰던 비합법 조직이 해방 뒤에 대중조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형무소에 갇혔던 노동운동가들이 풀려나오면서 노동운동에 힘이 붙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한 뒤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장을 운영하였다. 자주관리운동은 큰 공장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운수업 상업 분야, 나아가 어장, 극장 학교까지 번진 운동이었다. 일본인 기업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조선인 사업체에서도 벌어졌다. 김연수가 주인이었던 경성방직, 방흥식의 조선비행기 회사가 대표적이었다. 1945년 11월 4일 현재 16개의 산별노조에 728개가 넘는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8만 8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였다. 대부분 노동자가 공장을 접수하여 관리하였지만 노동자와 자본가가 함께 공장을 운영하는 경우, 인민위원회가 직접 접수 관리하거나 감독하기도 하였다. 공장을 접수한 경우에도 조선인 간부나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한 것과 일반 노동자들이 운영한 것으로 나뉜다. 일반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도 자본주의 틀 안에서 기업 시설을 지키고 생산을 계속하겠다는 낮은 차원의 운동도 있었다. 주인없는 생산시설을 보호한다는 생각에서 벌인 운동이 많았으며 무너진 공장운영체제를 자본주의에 맞게 다시 세운 운동도 많았다. 자본주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혁명적 자주관리운동’도 있었다. 혁명적 자주관리운동의 영향을 어떻게 전체 자주관리운동에 미치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공장을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일제 시기보다 나은 노동 조건을 얻었고 생산 능률도 높였다.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의 경우,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야근을 철폐했는데도 12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던 일제 시기보다 생산액이 훨씬 증대 되었다. 조선피혁 영등포공장의 경우에도 노동자들이 구성한 관리운영위원회가 주1일 휴가와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병원, 이발소, 소비 조합 등 후생 시설을 정비했다. 그리고 고장난 기계를 고쳐 사용하면서, 해방 전에 비해 2-3배의 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출발했으나 투쟁과정에서 산업 민주화와 노동자 정치 참여를 요구했으며 이를 거부한 미군정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노동자들이 일본인 재산과 친일 부역자들의 재산을 접수하려하자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미군정 스스로 일본인 주요 시설을 접수하면서 1945년 10월 30일 군정법령 19호를 발표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가로막고 나섰다. 한편 1945년 11월 5일과 6일에 걸처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자주관리운동이 인민위원회의 지도로 추진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인민위원회의 감독과 지도를 받지 않는 자생적 자주관리운동은 ‘조합주의적 경제주의적 오류’ 또는 ‘극좌적 편향’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전평은 11월 30일 미군정의 정책에 협력하며, 노동자가 양심적 민족 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자제하고 생산에 협조하여 ‘정당한 자본에 정당한 이윤을 보장’하며 노동자도 ‘정당한 노력에 정당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산업건설노선을 내세웠다. 실업과 물자 부족이 심각하기 때문에 공장들을 정상조업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고 이들이 노동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는 뜻이었다. 마찰을 빚고 있는 미군정과의 관계를 변화시켜보려는 뜻도 있었다. 전평이 공장관리운동에 대하여 확실한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12월 6일 미군정은 일제의 국.공유재산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까지 접수하겠다는 군정법령 33호를 발표하여 자주관리운동을 불법화하였다. 12월 8일에는 노동쟁의를 강제 조정하려는 ‘노동조정위원회’를 설치하고, 12월 14일에는 관리인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군정관을 파견하거나 관리인을 임명하여 자주관리운동을 가로막았다. 46년 2월까지 미군정은 375명의 경영자를 임명했고, 자주관리운동을 가로막던 이들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그 회사의 소유주가 되었다. 1946년 들어 전평의 산업걸설운동 과정에도 노동자 공장 관리운동의 흐름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기업 관리권 참여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공장 내 노동자의 발언권 확보 운동, 미군정이 보낸 관리인의 불법행위에 맞서는 악덕관리인 배척운동은 계속되었다. 1년여에 걸쳐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고 사회의 주인으로 서려했던 ‘혁명적 자주관리운동’은 1946년 9월 총파업이후 극심한 탄압으로 싹을 끝까지 틔우지 못하고 말았다. (2) 전평의 조직과 활동 ㅇ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결성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자, 노동운동은 ‘해방’이라는 조건에서 새롭게 전개되었다. 노동운동은 ‘해방’이라는 ‘열려진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조직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해방과 함께 노동조건 개선을 비롯하여 공장관리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노동자 전국조직을 결성하는 움직임으로 모아져 갔고, 마침내 1945년 11월 4-5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16개 산업별 단일노조 밑에 1945년 말 남북한을 합쳐 50-60만 여명의 조합원을 포괄하였다. 남한의 조합원은 25만 여명 정도였고, 46년 5월 무렵에는 남한만의 조합원이 46만 7천 명에 이르렀다. 해방공간의 전평은 단순히 노동자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조직이었다. 전평은 전위조직인 조선공산당(조공)과 함께 노동자 대중운동의 중심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전평은 결성과정부터 좌익정당인 조선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전평의 결성이 물론 해방직후 노동운동의 발전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결성의 주도권은 아래로부터 노동운동가가 아닌 조공에 있었다. 전평 간부들은 대부분 30년대 이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들로서 조공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공이 노동운동의 역량을 당과 결합시킨다는 차원에서 전평의 결성을 진행시켰다는 점과 함께 당시 전평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전평은 한편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동일한 조합에 포괄하는 산업별 단일노동조합을 기본으로 하고, 지방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산업지대에 지방평의회를 조직하였다. 전평은 이러한 기본적인 조직체계를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당면 요구에 부응하여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비상설 조직을 구성하였다. 전평의 산업별 조직체계는 해방직후 조선 산업발전의 미숙성을 고려한 조공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곧 전국적인 수준에서 산업별 조직체계로 일원화하지 못하고, 산업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지방에는 평의회를 두는 과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일제시기 이래 노동운동의 조직적 과제였던 산업별 노동조합을 전망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ㅇ 전평의 운동노선의 변화 전평의 운동노선은 인민정권 수립을 지향하는 조공의 노선에 근거하고 있었다. 조공은 미소가 협력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인민정권 수립을 전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선은 미소와의 협력, 특히 남한에서는 미군정과의 협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조공은 미군정과 협조전술을 채택하였다. 전평은 결성 당시 ‘노동자 공장관리운동’노선을 채택했다.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은 8 · 15뒤에 노동자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공장 문을 스스로 열거나 ‘그 동안 땀흘려 일한 공장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차지해야’한다면서 공장을 접수하고 관리했다. 혁명적 분위기를 틈타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접수하여 운영하면서 일제와 친일 자본가를 몰아내고 생산시설을 노동자 손에 넣으려는 투쟁이기도 했다. 미군정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벌인 이 운동은 앞으로 세워질 사회에서 노동자가 주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자본가가 주인이 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싸움이었다. 또한 노동자가 지도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해내면서 자신감을 키운 것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런 싸움이었다. 그러나 공장에 대한 좌파의 지배를 우려한 미군정은 일인의 국공유 재산뿐만 아니라 일인 사유 재산까지 접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선정한 관리인들에게 공장의 관리를 맡겼다. 따라서 전평의 노동자 공장관리운동 노선은 미군정의 공장접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평은 1945년 11월 30일, ‘산업건설 협력 방침’을 천명하고, 1946년 초에는 ‘산업 건설 노선’을 채택하였다. 당장 물자가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여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에게는 협조하는 한편 악덕 관리인에게는 투쟁하는 전술이었다. 전평의 온건노선에도 불구하고 1946년 5월 초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고 우파의 테러 반격이 본격화되었다. 이 즈음 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급속히 악화되고 자연발생적 투쟁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 46년 7월 말경 조선공산당은 정당방위의 역공세 ‘신전술’이 채택되었고, 이 영향으로 전평 내부에서 ‘총파업 전술’이 채택되었다. ■ <읽기 자료> 105일 단식투쟁 끝에 옥사 - 이한빈 전평 위원장 허성택이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행사에서 연설할 ‘메-데-에 제하야 노동자 동무들에게’라는 기념사를 앞당겨 실은 4월 26일자 기사 (한자를 섞어 쓴 글인데 요즘 말투로 고쳤음) 우리들은 60주년 메이데이를 오늘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맞게 된 것은 연합국의 덕택과 반일 민족 혁명가들의 거룩한 희생의 선물에서 얻은 것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함남북에서 노동운동하든 혁명자들이 망명을 하면서 또는 땅굴 생활과 삼림 생활을 하면서 일제 경찰의 총칼을 방어하기 위하여 몽둥이와 칼을 유일한 무기로 하고 용감하게 싸운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함남 신흥 출생 이한빈(李翰彬) 동지는 1929년 신흥 탄광 습격 사건으로 망명하다가 1936년 검거되어 5년형을 마치고 강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정치 예방 구금소에 구금됨으로부터 ‘정치 운동자를 내놓아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등 7개 요구를 들고 두 번 단식 투쟁에 적지 않은 승리를 하였으나 놈들은 제일로 미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온갖 모략, 위협, 00 무고와 테러를 하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1943년 3월 1일에 단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단식한지 20여일 후에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반역자임으로 죽이라고 말로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단식한지 백 오일 만인 6월 13일에 39세를 최기(最期)로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뼈만 남았던 그는 죽기 삼일 전에 나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지 못하고 오늘 이 기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하여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1929년부터 1936년까지 7년 동안 망명생활, 5년 동안 감옥생활, 그 뒤의 예방 구금소 생활,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단식. 그를 이렇게 버텨나갈 수 있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허성택이 소개한 것을 보면 조선 독립이 이루어진다는 희망이었으리라. 그러면 왜 조선의 독립을 그토록 희망했나? 주위의 고통받는 피압박 민중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역사가 변화 발전하는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3) 1946년 9월 총파업 조공의 협조전술이 대중운동을 지배하면서 당과 노동운동은 분리되고 있었다. 조공이 대중운동에게 강요하던 협조전술은 미군정의 탄압때문에 현실적인 방안이 되지 못하였고, 효용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조공은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과의 협조전술을 철회하고 미군정을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였다. 이는 그 동안 협조전술로 억제되어 왔던 대중운동을 열어놓는 계기가 되었는데, 9월 총파업도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전개되었다. 9월 총파업은 1929년 원산 총파업 이후,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동자 투쟁이었다. 9월 총파업은 미군정이 그것을 ‘전쟁 상황’으로 인식하고 대응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했던 파업이었다. 9월 총파업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공간에 그토록 강력하고 역동적인 노동운동의 힘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며, 3.1운동이래 최대의 민중봉기였던 ‘10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6년 미군정의 민중탄압과 미곡정책에 항의하는 민중의 불만과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남한 민중과 미군정의 대립은 조공의 신전술의 영향을 받아 9월 총파업으로 발전하였다. 미군정은 강력한 조직적 주체 역량을 가진 전평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전평 내에서 가장 강력한 공공부문 단위 노조인 「철도노조」를 파괴하려 하였다. 미군정청 운수부는 9월 초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산업합리화 정책을 운수부 종업원의 25%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철도국 서울 공장 노동자들 3천7백 여명은 1946년 9월 13일 ‘노동자대회’를 열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 반대, 임금인상 등의 경제적 요구를 제시하고, 21일까지 회답이 없으면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통보하고 태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청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하다”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거절하였다. 이에 분노한 부산 철도 노동자 약 7천여 명이 23일 오후 1시부터 가장 먼저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같은 날 전평은 철도 총파업을 전국의 모든 공장과 사업체의 총파업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파업을 지도하였다. 전평이 총파업선언서에 제기한 요구사항은 이렇다.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전재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공장 폐쇄,해고 절대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일체 반동테러 배격!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민주주의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를 즉시 철회하라! 검거 투옥중의 민주주의 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중의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 을 석방하라! 25일에는 출판노조가 파업에 돌입했고, 같은 날 대구우편국 종업원 4백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23일 철도노조에서 시작한 파업은 10월 초까지 출판, 금속, 체신, 섬유, 전기, 해원 등 각 산별노조 조합원들이 참가하여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확대되어 25만여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다. 9월 총파업은 이렇게 대규모 총파업으로 발전했지만 철도 노조를 제외한 다른 산별 노조들의 행동은 그다지 조직적이지 못했다. 출판노조는 다른 산별 노조의 파업을 충분히 보도 선전하고 가장 나중에 파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두번째로 파업함으로써 선전을 스스로 포기하는 혼선을 빚기도 했다. 또한 부산지역에서는 파업을 가장 먼저 시작하였지만 이를 적극 밀고 나가지 않았다. 미군정은 이 파업을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조선이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믿도록 할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곧바로 탄압하였다. 미군정은 9월 30일 새벽 2시부터 장택상 수도청장으로 하여금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3천여 명의 경찰, ‘대한노총’ ‘대한민청’ ‘대한독청’ 등의 노조원과 서북청년회, 대동청년회를 비롯한 극우 청년테러단을 동원해서 용산 철도공장에 농성 중인 철도노동자 총파업단 본부를 공격했다. 그 결과 파업단 간부 16명과 1200명 이상이 검거되었고 2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 ‘장군의 아들’ 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환의 ‘영웅담’ 나는 일본도를 빼어들고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 여러 곳에 숨어 있던 전평원을 색출, 창고에 몰아 넣고 점검해보니 2천여 명이나 되었다. ····· “너희들 중에 이번 파업 간부를 뽑아 내어라. 안 그러면 할 수 없다. 개솔린을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 그리고 개솔린을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창고 주변에 부었다. “자, 5분간의 시간을 준다. 내가 새솔린에 실탄만 쏘면 그만이다. 튀어나오는 놈은 모조리 쏴 죽인다.” 나는 기관청 2대를 그들 앞에 정조준 시켰다. 시계를 내어 놓고 시간을 쟀다. 4분이 경과하니 그들 중에서 “나가겠습니다.”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평 간부 8명이 내 앞으로 뛰어나왔다. ····· 그리고서 화부와 기관사를 뽑아내고, 기관차를 수리시켰다. 모든 철도 종업원들에게 즉각 취업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직장에 복귀 안하면 그들의 가족까지도 몰살해 버리겠다고 말한 후 서약시켰다. 미군정의 강력한 탄압으로 철도노조의 파업은 해산되었지만 지방으로 확산되어 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민족독립에 대한 절망, 특히 식량난에 의해 극한적인 생활상태에 몰려 있던 농민들의 투쟁과 결합하면서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졌다. ■ 대한노총(1946.3.10) 산업별 노동조합을 전평에게 빼앗긴 우익계의 노동운동은 반공청년운동을 모체로 하여 출발하였다. 불교청년회, 기독교청년회, 국민당청년부 등 우익계 청년단체의 연합회로 조직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1945.11.21)은 노동부를 두고 일부 공장에 조직을 침투시켰다.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독립된 우익 노동운동단체의 필요성이 있다 하여 마침내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결성했다.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의의 원칙으로 건국을 기함” “혈한불석(血汗不惜)으로 노자간의 친선을 기함” “전국 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함” 등을 강령으로 내세운 대한노총은 애초 노동자나 노동단체가 아닌 반공 청년단체를 모체로 하여 결성되어 그 산하 노동자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우익 청년단체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전평 산하의 노동조합에 침투하여 그것에 맞서는 ‘노총분회’를 만들어 갔다. 미군정시기의 노동운동 조직은 좌익계의 전평과 우익계의 노총으로 크게 양분되어 1946년의 메이데이 기념행사부터 따로 개최했다. 이후의 노동운동 과정에서도 그 대립이 점점 격화되다가 전평은 결국 불법화되고 대한노총이 합법노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4) 1947-1948년 총파업 투쟁 ㅇ 1947년 3월 총파업 변혁운동진영은 몰아닥치는 미군정의 탄압에 위기를 느껴 3.22총파업을 벌였지만 24시간 동안 파업으로 자신들의 요구조건이 이루어질 전망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사후 대책없이 총파업을 벌여 많은 노동자가 희생되었다. 물론 노동자들이 현실을 변화하려는 열망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총파업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계획된 전술’ 없이 미군정의 탄압에 어떻게든 반응해야 한다는 실용적 판단에서 3월 총파업을 벌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때는 투쟁 국면을 잘 헤아린 뒤, 노동자계급 전체를 동원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고 풍부한 정치선동과 아울러 투쟁을 통해 조직을 확대 강화해야 했다. 또 어떤 중대한 정치 국면에서도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요구조건들을 함께 내걸어 여러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나서게끔 하는 일이 필요한 것임을 떠올릴 때, 3 22총파업이 실제 투쟁과정에서 정치파업으로 기울어버린 것은 잘못이었다. ㅇ 1948년 2· 7총파업, 5 ·8총파업 교통 통신의 주요 산업부문노동자 파업을 앞세워 모든 산업부문과 모든 지역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각 생산기관을 마비시킴과 아울러 교통 수송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고 다리를 폭파하였으며 철도에서는 기관차까지 부수었다. 농민, 사무원, 학생,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국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총파업과 대중시위 그리고 학원에서는 맹휴를 벌였다. 농촌에서는 농민 시위대가 미군정 경찰 기구와 극우파 테러 단체 사무소 따위를 습격하는 투쟁을 벌였다. 좌익쪽 발표에 따르면 2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동안 벌어진 2.7구국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148만 정도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으로 3일 동안 사망 57명 부상 146명에 검거된 사람이 1만이 넘었다. 2월 7일부터 며칠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싸움들이 조금 사그라진 뒤에도 이곳 저곳에서 투쟁이 일어났으며 무장을 한 작은 집단이 일종의 게릴라 전술을 써 투쟁을 계속했다. 2월과 3월에 걸쳐 일어난 ‘구국투쟁’은 조직적인 폭력투쟁이었다. 2. 7 구국투쟁을 계기로 남로당은 이제까지 해왔던 대중 시위와 봉기에서 벗어나 야산대 등 무장조직을 만들어 경찰서 극우파 단체와 사무소, 극우파 사람을 습격하는 무장 투쟁 형태로 나아갔다. 2.7 구국투쟁은 제주도 4.3항쟁과 5.10 선거반대투쟁으로 이어지는 무장투쟁의 계기가 되었다. 2.7 구국투쟁은 분단과 남한 단정을 이루려는 미군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무장투쟁은 공장을 중심무대로 삼는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주로 농촌에 뿌리를 둔 투쟁으로 바뀌었으며 대중의 토대를 빠르게 무너지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4. 이승만 정권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ㅇ 1953년 노동관계법의 제정 - 노동조합법 : 근로자의 자유로운 단결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며,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유지함으로써 그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함 - 노동쟁의 조정법 : 노동자의 단체행동 자유권을 보장하고 노동쟁의를 공정히 조정하여 산업의 평화가 유지되도록 함 - 노동위원회법 : 국민경제의 발전과 근로행정의 민주화를 기하기 위하여 - 근로기준법 :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시키며,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하기 위하여 ㅇ 대한노총 -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은 정치적 반대파를 대한노총에서 몰아내고 자유당의 기간단체로 만듦 - 1954년 대한노총 제7차 전국대의원대회는 결의문에서 “이대통령 각하의 외교정책을 절대 지지한다”는 항목을 넣음 - 1956년 ‘4사5입’ 개헌을 강행한 후 선거 불출마설을 흘렸을 때 우마차를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하면서 그의 재출마를 염원 ㅇ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설립준비위원회(1959.8.11) - 전국 37개 노동조합연합체 중 24개 연합회 대표 32명이 대한노총 상층부의 부패와 어용화, 파벌투쟁을 비판하면서 노동조합 전국 연합체 준비 ㅇ 노동쟁의 - 대한노총 철도연맹을 존속시키기 위한 운동, 조선전업 노동조합 결성운동 - 부산조선방직회사 파업(1951) - 이승만 정권이 강권으로 임명한 사장의 파면, 자유노동운동의 보장, 노동자의 인권 옹호등을 요구하며 1천여 명의 여공들이 피난지 부산 국회 앞에서 농성하며 3개월 동안 계속. 노동자 1천 여명이 해고되고 약 500명이 자퇴한 채 끝남 - 부두노동자 파업(1952.7.17) - 전국 부도노동조합 연맹체인 대한노총 자유연맹이 임금 280%를 요구. 군수물자 하역작업. 미군측이 일고노동임금 200%, 청부노임 100%를 인상하며 파업 종결. - 석탄공사 산하 노동자 파업(1954.12) - 체불임금 청산 요구, 7천여 명. - 부산 미군부대 한국인 종업원 파업(1954.8) - 임금인상과 한국 근로기준법 적용 요구, 1만 2천 명이 파업. - 수입비료 하역 노동자 파업(1954.8) - 임금인상 요구, 1만 7천여 명 - 서울 자동차노동조합 파업(1954.9) - 8시간 노동제 확립과 단체협약 체결, 성공 - 대구 대한방직 노동자 쟁의(1956) - 부당해고 항의, 단체협약 체결 - 석탄광노동조합연합회 쟁의(1956) - 임금인상 - 삼척시멘트 노동자들의 쟁의(1956) - 체임 지불 요구 - 남성전기회사 노동자 쟁의(1958) - 4천여 명, 보상금 지불 요구 - 대한조선공사 노동자 쟁의(1958) - 6천여 명체불임금 청산, - 전국섬유노조연맹 3만 6500명의 노동시간 단축 쟁의(1959) 5. 4월 혁명 공간 ㅇ 대한노총 민주화 운동 - 집행부 개편 ㅇ 전국노동조합협의회 - 기아임금과 임금체불 규탄, 대한노총 간부의 사퇴, 기업주와 야합한 노조간부의 사퇴, 노동조합의 민주적 개편, 경찰의 노동운동 간섭 반대, 노동행정 책임자의 사퇴. 4.19 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그 조직을 확대해서 170개 단위노동조합을 개편 포섭하고 16만 명의 조합원을 흡수. ㅇ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1960.11.25) - 대한노총과 노동조합협의회의 통합운동, 두 단체와 무소속 노동조합의 대의원 723명이 결성 - 5.16 군사쿠테타의 발발로 해산. ㅇ 노동쟁의 - 1957년에 45건 발생한 노동쟁의가 4.19가 일어난 1960년에 227건으로 증가, 참가 인원도 9천명에서 6만 4천 명으로 증가. 4.19 후 1년간의 쟁의 발생건수가 282건. ㅇ 공무원노조(철도.전매.체신)의 활동 강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전국은행노동조합연합회 결성(1960.7.23) ㅇ 실업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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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삶과 철학/민주노총 노동자학교

노동자의 삶과 철학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1.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2.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3. 노동자의 인간관 4. 노동자의 세계관 5. 노동자와 경제 6. 노동자와 역사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1.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노동자의 철학이 따로 있나 ‘노동자의 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칫 ‘노동자의 철학’이 따로 있고 ‘자본가의 철학’이 따로 있고 ‘권력의 철학’이 모두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중에서 ‘노동자의 철학’을 선택하겠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노동자의 철학’이란 ‘노동자가 알아야 할 세상의 가장 올바른 철학’이란 뜻이다. 누구의 관점이 옳은가 똑 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자본가는 자본의 관점으로, 권력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사실은 하나인데 설명이 세 가지이니 그 중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관점이 옳은 것일까? 이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일 테니 당연히 노동자의 관점이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옳은 것이 아니다. 80년 9월부터 이런 활동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으니 내가 노동문제와 관련된 일을 해온 지 20년이 넘었다. 20년이란 세월은 개인의 인생에서는 꽤나 긴 기간인지 모르나 장구한 역사 속에서는 점에 불과할 만큼 짧은 순간이다. 그런데, 20년 동안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을 지켜 본 알량한 경력만으로도 나는 노동과 자본과 권력이 하나의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르게 주장하다가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면 신기할 정도로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밝혀지는 경우를 수 없이 봤다. ‘전교조’ 의 합법화가 그랬고 ‘위험작업중지권’도 그랬고, ‘제3자개입금지’도 그랬다.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거의 모든 문제가 그랬다. 처음에는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릴지라도 몇 년이 지나면 대부분 노동자의 주장이 옳았다.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되는 데에는 15년의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고, 박정희의 그릇된 경제 정책이 우리나라를 빈 깡통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는 예언은 24년 후에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하, 이래서 노동자가 진보세력이라는 것이로구나’ -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현실이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자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관점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의 지식과 교양과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숲에 보면 키가 큰 나무가 있고 키가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그 나무의 품성이 아무리 훌륭해도 키가 작은 나무에게는 햇볕을 가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가 공평하게 햇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키를 크게 키우거나 키가 큰 나무의 햇볕을 가리는 가지를 쳐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이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지 못하도록 훈련시킨다. 개인의 성실한 노력만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뚫고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기 혼자만 아름답고 고운 생각을 품고 ‘자아 발견’을 하면 그것이 가장 가치 있고 올바른 삶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노동자 계급의 특권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구조가 노동자의 관점이 본능적으로 옳을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노동 해방’을 주장하는 우리의 관점이 옳은 것은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관점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던 것이다. 가치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고 그 상대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는 축소되는 과정 - 그것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다. 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길게 봐도 결국은 올바른 관점을 가진 사람만이 올바른 전망을 세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만이 가지는 특권이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자본가가 자신과 가족만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신문을 매일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이 대부분 그런 노력의 결과들이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사익’이 모여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노동자들이 노력하는 과정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촉진시키는 것이 바로 노동조합이고 구체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그 활동이 추동되는 것이다. 조합원 개인이 하는 작은 활동일지라도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역사의 기관차’이다. 2.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밝을 - 哲, 배울 - 學)’이란 단어는 본래 영어 'Philosophy'의 발음을 본따 만든 단어로 본 뜻에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Philosophy'는 '지식을 사랑한다'는 어원에서 온 단어로서 엄밀한 의미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동양에서는 철학을 '도(道)'라고 표현했다. '머리카락을 날리며 걸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철학이란 막연하고 신비롭고 골치 아픈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직접 발로 걸으면서 깨달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노동자의 철학이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활동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단순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라도 어떤 문제에 대해 입장, 가치, 판단, 태도 등을 결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의 철학이다. 철학의 세 가지 영역 철학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을 갖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석도 이 영역에 속한다. 둘째는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나 자신과 사회와 자연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는 ‘실천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그러한 인식 위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 자신의 삶의 내용을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설명하는 노동자 철학의 명제들도 모두 위의 세 가지 영역 중 하나에 속하는 것들이다. 3. 노동자의 인간관 인간은 자주적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예속에 저항하여 자주적인 삶을 살고자 원한다. 그래서 억압된 삶 속에 처하게 되면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짐승과 인간의 중요한 차이점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자주적인 정신이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인간은 노예적인 삶으로부터 만인이 평등해지는 삶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사회의 노예보다 중세사회 농노는 그 권리와 자유가 보다 확대되었고 중세사회의 농노보다 자본주의사회 노동자의 권리와 자유가 보다 확대된 것은 모두 인간이 억압에 대하여 저항하고 보다 자주적인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모두 당연히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 역시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예속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해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식민지의 해방을 위해, 독재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다양한 투쟁이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났던 것도 인류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비인간적 억압과 굴종에 대항하여 권리와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싸우는 ‘노동운동’이나 ‘노동해방’도 물론 이러한 인간의 자주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집단을 이루며 서로 협력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표현 역시 그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이지만, 인간관계를 떠난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친목 모임, 하다 못해 버스를 같이 타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 내가 먹을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과 떨어져서 고립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즉, 더불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것도, 다른 어떤 짐승들보다 뛰어난 사회를 만들고 이를 유지시켜 나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발전을 꾀할 때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하는 것 역시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결국, 사회가 발전하면 개인도 그만큼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면 개인도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즉 인간다운 삶은 개인적인 노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문제를 그 주변의 사회적 관계와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을 ‘구조적 인식’이라고 한다. 인간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권력과 자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 내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호도하고 사람들이 주로 인간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조장한다. 4. 노동자의 세계관 사회에는 서로 대립하는 존재가 있다. 사회는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세력과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져있다. 인간은 위 두 세력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게 마련이고, 이 집단은 크게 보아 대립되는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지배/피재배계급, 자본가/노동자계급, 보수세력/진보세력으로 나누어진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집단의 대립과 갈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는 발전해나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가지고 이윤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가 집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비를 버는 노동자 집단의 대립이 기본 축을 이룬다.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한다. 어떤 집단도 갈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노동자와 기업주들처럼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집단들 속에서 갈등과 대립,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갈등 때문에 분쟁과 저항이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보다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집단이 승리할 때 그 사회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갈등은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갈등이 있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라는 속담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 나약해지고 시들어 버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변화가 없는 삶과 사회는 침체된다. 모든 것은 항상 다른 것으로 변화하면서 흘러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한다는 것이야말로 실로 변할 수 없는 만물의 실상”이라는 사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고대의 자연철학 시대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란되어 온 철학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운동과 변화의 문제'였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변치 않은 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만물은 다 생성(生成)한다. 만물은 흐를 뿐 어떠한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만물은 이루어진 것이며,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직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삶은 변화하고 있다.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변화에는 어떤 규칙이 있다. 대립물 간의 갈등이 그 법칙의 바탕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운동을 일으키며, 만가지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투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투쟁이야말로 변화의 원동력이다. 투쟁을 통해 갈등은 새로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 이처럼 “만물은 대립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사상 역시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물은 대립을 통하여 발생한다." "병이 있기에 건강은 좋은 것, 악이 있기에 선은 좋은 것,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이 좋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좋은 것이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만물은 투쟁을 통해서 생긴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조화가 아니라 실은 그 조화 속에 들어 있는 대립물 사이의 긴장이고 투쟁이다." 이처럼 사물의 존재는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가치를 갖게 된다. 변증법 철학에서는 이를 '상반(相反)되는 양자간의 융합(融合)'이라 한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대립에 기인"한다. 자연은 이 대립으로부터 조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깊은 내면에서는 그 대립되는 것들이 하나가 되어 있다. 생성의 내면에는 대립물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물은 자기 혼자 독단적(獨斷的)으로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자기에 반대되는 것, 반대되는 현상과 대립하거나 때로는 서로 섞이기도 한다. 투쟁이 필연적임은 이 세상에서 대립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5. 노동자와 경제 경제를 알아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 노동자가 경제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를 알아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를 모르면, 권력과 자본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고임금 망국론’이 어째서 새빨간 거짓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왜 잘못된 정책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경제를 모르면, 노동자의 월급봉투가 매년 두꺼워져도 어째서 우리의 삶은 매년 더 가난해지는 것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어째서 인류의 역사가 원시시대부터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역사와 경제 지금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많은 노력의 결론은 “경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호사나 유복한 상인이나 시골 귀족의 상처받은 허영심이라든가 말 많은 철학이 아니라, 2천5백만의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괴로움... 이런 것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혁명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룩한 이념은 굶주림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문제에 뒤따라 나온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역사와 경제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을 애써 부인하려는 노력이 최근까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중세시대에는 역사는 초월적 존재인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에 불과했고, 20세기초까지도 역사는 ‘위인의 전기’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탁월한 한 역사학자조차 그들의 동료 역사학자들이 “역사상의 위인을 사회적 및 경제적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그 위인들에 대한 대량살육을 자행했다”고 비난했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경제적 조건이다. 역사는 훌륭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 인간들이 생활해 온 모습이고,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반영되어 온 과정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매년 하나씩 출현한 통치 이데올로기들... ‘신경제’ ‘국제화’ ‘세계화’ ‘신노사관계구상’ ‘신자유주의’ 이 모든 통치이념들이 모두 경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경제를 분석하고 전망한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현재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그 특성은 우리나라 국민, 특히 우리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세계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그 특성은 어떻게 변화 발전할 것인가를 옳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으나, 우리 노동자 활동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똑 같은 한국 경제의 실태를 자본가는 자본가의 입장으로, 노동자는 노동자의 입장으로 보게 된다. 사실은 같을지라도 그 평가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장래의 전망을 옳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관점에서 정확하게 이해한 쪽만이 사업의 방향을 옳게 세우고, 그 전망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객관'은 ‘객관'대로 파악해야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그럴 때 ‘노동자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장기적으로 역사 변화를 바라보는 눈, 궁극적으로 민중의 승리라는 믿음에서 집어내는 현실 변화의 맥락 잡기... 이런 것일 수 있다. 6. 노동자와 역사 역사 발전의 법칙 선사시대를 빼고 실증적 기록이 남아있을 때부터 따지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얼마나 되는 것일까? 성경까지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경우 기독교의 출발이 되었던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2800년경이었으니 모두 5천년쯤 되었다고 본다. 5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역사는 신기할 정도로 한쪽 방향을 진행되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인류역사도 줄기차가 한쪽 방향을 지향했다. 그 방향은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자. 다만, 고대의 노예는 잘게 부숴져서 연못의 붕어밥이 되기도 했고, 중세의 농노는 결혼 첫날밤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는 권리를 영주에게 받쳐야 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아두자. 그 시대에는 그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고대 노예의 생활에 비하여 중세 농노의 생활은 한결 그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었고, 중세의 농노에 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생활 역시 그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어 온 것에 비하면 중세의 영주는 고대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오히려 축소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 역시 중세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축소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는 사회 계급은 그렇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을 진행되었다. 그 방향이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바로 “역사는 담당 주체의 세력 확대 과정이다”라고 표현한다. 그 시대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체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진행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 진행 방향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문명사회에서 철폐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똑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 나타나면 역사가 잠시 수십년쯤 뒤로 후퇴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지금은 신자유주의라는 망령 때문에 역사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역사 담당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과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가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의 강물을 밀고 가는 활동에 자신감을 준다.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끝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노동자의 인생을 보람있게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역사와 경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철학이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합법칙성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것이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언제나 동일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비를 겪으면서, 마치 고개를 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불만과 요구는 언젠가 반드시 표출된다. 침체 가운데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쉬임없이 고양․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반드시 비약적 발전을 준비한다. 축적된 불만은 다음의 고양국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장명국 씨 같은 이가 오래 전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에 “어려울 때는 버티는 쪽이 이긴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침체국면을 지나 노동운동이 비약하고 고양되는 시기가 되면,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고, 투쟁전술이 광범위하게 구사되며, 정치적인 투쟁의 수준이나 이념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87년, 88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96년말과 97년초를 뜨겁게 달군 총파업투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이끌고 가는 기관차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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