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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삶과 철학/민주노총 노동자학교

노동자의 삶과 철학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1.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2.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3. 노동자의 인간관 4. 노동자의 세계관 5. 노동자와 경제 6. 노동자와 역사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1.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노동자의 철학이 따로 있나 ‘노동자의 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칫 ‘노동자의 철학’이 따로 있고 ‘자본가의 철학’이 따로 있고 ‘권력의 철학’이 모두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중에서 ‘노동자의 철학’을 선택하겠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노동자의 철학’이란 ‘노동자가 알아야 할 세상의 가장 올바른 철학’이란 뜻이다. 누구의 관점이 옳은가 똑 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자본가는 자본의 관점으로, 권력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사실은 하나인데 설명이 세 가지이니 그 중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관점이 옳은 것일까? 이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일 테니 당연히 노동자의 관점이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옳은 것이 아니다. 80년 9월부터 이런 활동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으니 내가 노동문제와 관련된 일을 해온 지 20년이 넘었다. 20년이란 세월은 개인의 인생에서는 꽤나 긴 기간인지 모르나 장구한 역사 속에서는 점에 불과할 만큼 짧은 순간이다. 그런데, 20년 동안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을 지켜 본 알량한 경력만으로도 나는 노동과 자본과 권력이 하나의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르게 주장하다가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면 신기할 정도로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밝혀지는 경우를 수 없이 봤다. ‘전교조’ 의 합법화가 그랬고 ‘위험작업중지권’도 그랬고, ‘제3자개입금지’도 그랬다.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거의 모든 문제가 그랬다. 처음에는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릴지라도 몇 년이 지나면 대부분 노동자의 주장이 옳았다.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되는 데에는 15년의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고, 박정희의 그릇된 경제 정책이 우리나라를 빈 깡통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는 예언은 24년 후에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하, 이래서 노동자가 진보세력이라는 것이로구나’ -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현실이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자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관점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의 지식과 교양과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숲에 보면 키가 큰 나무가 있고 키가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그 나무의 품성이 아무리 훌륭해도 키가 작은 나무에게는 햇볕을 가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가 공평하게 햇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키를 크게 키우거나 키가 큰 나무의 햇볕을 가리는 가지를 쳐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이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지 못하도록 훈련시킨다. 개인의 성실한 노력만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뚫고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기 혼자만 아름답고 고운 생각을 품고 ‘자아 발견’을 하면 그것이 가장 가치 있고 올바른 삶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노동자 계급의 특권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구조가 노동자의 관점이 본능적으로 옳을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노동 해방’을 주장하는 우리의 관점이 옳은 것은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관점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던 것이다. 가치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고 그 상대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는 축소되는 과정 - 그것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다. 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길게 봐도 결국은 올바른 관점을 가진 사람만이 올바른 전망을 세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만이 가지는 특권이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자본가가 자신과 가족만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신문을 매일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이 대부분 그런 노력의 결과들이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사익’이 모여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노동자들이 노력하는 과정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촉진시키는 것이 바로 노동조합이고 구체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그 활동이 추동되는 것이다. 조합원 개인이 하는 작은 활동일지라도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역사의 기관차’이다. 2.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밝을 - 哲, 배울 - 學)’이란 단어는 본래 영어 'Philosophy'의 발음을 본따 만든 단어로 본 뜻에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Philosophy'는 '지식을 사랑한다'는 어원에서 온 단어로서 엄밀한 의미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동양에서는 철학을 '도(道)'라고 표현했다. '머리카락을 날리며 걸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철학이란 막연하고 신비롭고 골치 아픈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직접 발로 걸으면서 깨달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노동자의 철학이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활동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단순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라도 어떤 문제에 대해 입장, 가치, 판단, 태도 등을 결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의 철학이다. 철학의 세 가지 영역 철학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을 갖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석도 이 영역에 속한다. 둘째는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나 자신과 사회와 자연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는 ‘실천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그러한 인식 위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 자신의 삶의 내용을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설명하는 노동자 철학의 명제들도 모두 위의 세 가지 영역 중 하나에 속하는 것들이다. 3. 노동자의 인간관 인간은 자주적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예속에 저항하여 자주적인 삶을 살고자 원한다. 그래서 억압된 삶 속에 처하게 되면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짐승과 인간의 중요한 차이점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자주적인 정신이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인간은 노예적인 삶으로부터 만인이 평등해지는 삶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사회의 노예보다 중세사회 농노는 그 권리와 자유가 보다 확대되었고 중세사회의 농노보다 자본주의사회 노동자의 권리와 자유가 보다 확대된 것은 모두 인간이 억압에 대하여 저항하고 보다 자주적인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모두 당연히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 역시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예속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해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식민지의 해방을 위해, 독재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다양한 투쟁이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났던 것도 인류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비인간적 억압과 굴종에 대항하여 권리와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싸우는 ‘노동운동’이나 ‘노동해방’도 물론 이러한 인간의 자주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집단을 이루며 서로 협력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표현 역시 그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이지만, 인간관계를 떠난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친목 모임, 하다 못해 버스를 같이 타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 내가 먹을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과 떨어져서 고립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즉, 더불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것도, 다른 어떤 짐승들보다 뛰어난 사회를 만들고 이를 유지시켜 나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발전을 꾀할 때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하는 것 역시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결국, 사회가 발전하면 개인도 그만큼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면 개인도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즉 인간다운 삶은 개인적인 노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문제를 그 주변의 사회적 관계와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을 ‘구조적 인식’이라고 한다. 인간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권력과 자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 내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호도하고 사람들이 주로 인간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조장한다. 4. 노동자의 세계관 사회에는 서로 대립하는 존재가 있다. 사회는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세력과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져있다. 인간은 위 두 세력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게 마련이고, 이 집단은 크게 보아 대립되는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지배/피재배계급, 자본가/노동자계급, 보수세력/진보세력으로 나누어진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집단의 대립과 갈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는 발전해나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가지고 이윤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가 집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비를 버는 노동자 집단의 대립이 기본 축을 이룬다.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한다. 어떤 집단도 갈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노동자와 기업주들처럼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집단들 속에서 갈등과 대립,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갈등 때문에 분쟁과 저항이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보다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집단이 승리할 때 그 사회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갈등은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갈등이 있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라는 속담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 나약해지고 시들어 버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변화가 없는 삶과 사회는 침체된다. 모든 것은 항상 다른 것으로 변화하면서 흘러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한다는 것이야말로 실로 변할 수 없는 만물의 실상”이라는 사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고대의 자연철학 시대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란되어 온 철학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운동과 변화의 문제'였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변치 않은 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만물은 다 생성(生成)한다. 만물은 흐를 뿐 어떠한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만물은 이루어진 것이며,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직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삶은 변화하고 있다.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변화에는 어떤 규칙이 있다. 대립물 간의 갈등이 그 법칙의 바탕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운동을 일으키며, 만가지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투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투쟁이야말로 변화의 원동력이다. 투쟁을 통해 갈등은 새로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 이처럼 “만물은 대립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사상 역시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물은 대립을 통하여 발생한다." "병이 있기에 건강은 좋은 것, 악이 있기에 선은 좋은 것,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이 좋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좋은 것이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만물은 투쟁을 통해서 생긴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조화가 아니라 실은 그 조화 속에 들어 있는 대립물 사이의 긴장이고 투쟁이다." 이처럼 사물의 존재는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가치를 갖게 된다. 변증법 철학에서는 이를 '상반(相反)되는 양자간의 융합(融合)'이라 한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대립에 기인"한다. 자연은 이 대립으로부터 조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깊은 내면에서는 그 대립되는 것들이 하나가 되어 있다. 생성의 내면에는 대립물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물은 자기 혼자 독단적(獨斷的)으로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자기에 반대되는 것, 반대되는 현상과 대립하거나 때로는 서로 섞이기도 한다. 투쟁이 필연적임은 이 세상에서 대립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5. 노동자와 경제 경제를 알아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 노동자가 경제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를 알아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를 모르면, 권력과 자본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고임금 망국론’이 어째서 새빨간 거짓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왜 잘못된 정책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경제를 모르면, 노동자의 월급봉투가 매년 두꺼워져도 어째서 우리의 삶은 매년 더 가난해지는 것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어째서 인류의 역사가 원시시대부터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역사와 경제 지금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많은 노력의 결론은 “경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호사나 유복한 상인이나 시골 귀족의 상처받은 허영심이라든가 말 많은 철학이 아니라, 2천5백만의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괴로움... 이런 것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혁명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룩한 이념은 굶주림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문제에 뒤따라 나온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역사와 경제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을 애써 부인하려는 노력이 최근까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중세시대에는 역사는 초월적 존재인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에 불과했고, 20세기초까지도 역사는 ‘위인의 전기’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탁월한 한 역사학자조차 그들의 동료 역사학자들이 “역사상의 위인을 사회적 및 경제적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그 위인들에 대한 대량살육을 자행했다”고 비난했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경제적 조건이다. 역사는 훌륭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 인간들이 생활해 온 모습이고,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반영되어 온 과정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매년 하나씩 출현한 통치 이데올로기들... ‘신경제’ ‘국제화’ ‘세계화’ ‘신노사관계구상’ ‘신자유주의’ 이 모든 통치이념들이 모두 경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경제를 분석하고 전망한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현재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그 특성은 우리나라 국민, 특히 우리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세계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그 특성은 어떻게 변화 발전할 것인가를 옳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으나, 우리 노동자 활동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똑 같은 한국 경제의 실태를 자본가는 자본가의 입장으로, 노동자는 노동자의 입장으로 보게 된다. 사실은 같을지라도 그 평가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장래의 전망을 옳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관점에서 정확하게 이해한 쪽만이 사업의 방향을 옳게 세우고, 그 전망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객관'은 ‘객관'대로 파악해야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그럴 때 ‘노동자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장기적으로 역사 변화를 바라보는 눈, 궁극적으로 민중의 승리라는 믿음에서 집어내는 현실 변화의 맥락 잡기... 이런 것일 수 있다. 6. 노동자와 역사 역사 발전의 법칙 선사시대를 빼고 실증적 기록이 남아있을 때부터 따지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얼마나 되는 것일까? 성경까지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경우 기독교의 출발이 되었던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2800년경이었으니 모두 5천년쯤 되었다고 본다. 5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역사는 신기할 정도로 한쪽 방향을 진행되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인류역사도 줄기차가 한쪽 방향을 지향했다. 그 방향은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자. 다만, 고대의 노예는 잘게 부숴져서 연못의 붕어밥이 되기도 했고, 중세의 농노는 결혼 첫날밤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는 권리를 영주에게 받쳐야 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아두자. 그 시대에는 그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고대 노예의 생활에 비하여 중세 농노의 생활은 한결 그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었고, 중세의 농노에 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생활 역시 그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어 온 것에 비하면 중세의 영주는 고대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오히려 축소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 역시 중세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축소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는 사회 계급은 그렇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을 진행되었다. 그 방향이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바로 “역사는 담당 주체의 세력 확대 과정이다”라고 표현한다. 그 시대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체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진행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 진행 방향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문명사회에서 철폐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똑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 나타나면 역사가 잠시 수십년쯤 뒤로 후퇴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지금은 신자유주의라는 망령 때문에 역사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역사 담당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과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가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의 강물을 밀고 가는 활동에 자신감을 준다.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끝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노동자의 인생을 보람있게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역사와 경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철학이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합법칙성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것이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언제나 동일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비를 겪으면서, 마치 고개를 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불만과 요구는 언젠가 반드시 표출된다. 침체 가운데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쉬임없이 고양․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반드시 비약적 발전을 준비한다. 축적된 불만은 다음의 고양국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장명국 씨 같은 이가 오래 전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에 “어려울 때는 버티는 쪽이 이긴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침체국면을 지나 노동운동이 비약하고 고양되는 시기가 되면,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고, 투쟁전술이 광범위하게 구사되며, 정치적인 투쟁의 수준이나 이념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87년, 88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96년말과 97년초를 뜨겁게 달군 총파업투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이끌고 가는 기관차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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