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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김 준 태(버스노민추 정책국장) ◎ 어용에서 어용으로 … 여전히 바뀌지 않은 버스현장 코오롱고속을 비롯해 고속버스 노동조합들, 나아가 서울시내버스 및 전국의 버스현장 노동조합들이 어용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과거의 수많은 야당 활동가들도 어용노조를 바꾸자고 했지만 여전히 어용노조 판도는 변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민주버스나 민주노총(한성여객)으로 조직변경한 노동조합의 총 조합원 숫자도 3000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나머지 9만여 조합원들이 있는 버스현장들은 여전히 암흑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이미 지난 전국버스노동자협의회 시절에만해도 50여명이 넘는 야당활동가들이 집행부를 장악했으면서도 최소한 이들 사업장들이 민주적인 노조로 거듭나지 못하고 아직도 어용의 아성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결과 많은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은 당연히 “똥 누러갈 때 마음틀리고, 똥 누고 나올때 마음 틀리다”면서 누가 집행부 되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민주노조에 대한 패배주의만 확산시키게 되고,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노조집행부의 노조민주화 사업에 한 발 떨어지게 만든다. 나아가 이런 민주노조를 건설하기까지의 힘들고 지루한 일상 현장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지 않도록 만든다. ◎ 과연 어용을 민주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제대로 했던가? 처음에 열의를 가지고 버스현장에서 의욕적으로 노조를 민주화시켜보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면 대번에 기존의 야당 선배들은 “너무 강하면 부러져”, “조합원들 정서는 그게 아니야, 아직은 일러”라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온 경험들을 통해서 버스현장의 변화가 상당히 오랜 시일이 흘러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얘기한다. 심지어는 ‘바뀌기 힘들다, 나아가 바뀔 수 없다’는 비관적인 얘기들도 많이 한다. 시내버스보다도 고속버스 현장은 더욱 그 정도가 심하다. 과연 버스현장은 다른 현장들에 비해서 가능성이 희박한 곳인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변화를 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과거의 수많은 야당활동가들의 잘못된 활동방식에서 나타났다. 버스노동자의 근무 방식이 “운전 나가면 혼자 독고다이이고, 자기가 왕이다. 이에 따라 개인주의적인 성향들이 강하다”라는 것은 가장 대표적으로 버스현장의 조직화가 어렵다는 근거이다. 거기에 더해 고속버스현장의 경우는 시내버스, 시외버스, 관광버스 등을 해 오다가(굴러먹다가) 들어오고, 들어올때 브로커들에게 얼마 건네주고 들어오는 식으로 코끼고 들어오는 사슬이 복잡하게 되어 있고, 전국 사업소들이 있다보니 자주 보기 힘들고, 모이는 것도 지역별, 연고지별로 모이게 될 수밖에 없는 조건들 때문에 더욱 조직하기 힘들다고 얘기한다. 상당부분 맞는 얘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다. 예를 들어 혼자서 일하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든지 간에, 각 현장별로 여러 가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현장문제들은 호남지역이든, 서울이든, 경남지역이든 마찬가지 이다. 친목계 중심으로, 연고지, 인맥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의 경우에는 앞에서 얘기한 대로 지역별 한계들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한 사업장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사안들을 중심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지역의 조합원들과도 공통된 문제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 질 수 있다. 현장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많은 야당 활동가들이 과거 십 수년 이상을 활동하면서 잘못된 활동방식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인맥, 개인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친목계’ 수준의 활동을 할 것인가? 현장 내의 현안문제를 가지고 개인적 관계를 넘어서는 ‘현장조직’ 수준의 활동을 할 것인가?가 그 갈림길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부분의 야당활동가들은 법적인 활동, 그것도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법적인 활동에 집중해 왔다. 재미있는 것은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은 ‘개별적 노동법’인 근로기준법에는 빠삭하다. 그러나 ‘집단적 노동법’인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에 대해서는 그만큼 잘 모른다. 민주노총의 현대자동차의 현장조직 활동가들을 본다면 그 반대로 근로기준법에 대해서보다는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에 대해서 빠삭하다. 이 차이가 왜 나타나는 것인가? 그건 지금까지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은 ‘개별적’인 활동 중심을 해왔다는 것이고, 선진적인 다른 사업장에서는 ‘집단적’인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개별적인 노동법인 근로기준법에 따라서 회사를 상대로 임금체불, 휴게-식사시간 등 조합원들 누구나 겪고 있는 현안문제를 야당 활동가 자신만 ‘걸고’ 받아내는 방식은 일단 자신의 권리는 찾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야당활동가는 곧 바로 사측에 찍혀서 요주의 인물로 견제되고, 그 조합원과 함께 뭔가를 하려는 다른 조합원들은 회사와 어용노조의 서슬이 무서워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한다. 쉽게 말해 개별적인 법적 투쟁을 하면서 자신의 권리는 찾지만 다른 조합원들과의 조직적인 활동을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자신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저 기사 보니까 법도 많이 알고 참 똑똑해”라는 ‘명성’을 얻을지 모르지만 그걸로 끝이 되어 버린다. 이미 사측과 어용에 찍혀서 뒤늦게 조합원들과 뭔가 해보려 해도 그때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 사이 선거는 다가온다. 여전히 이 야당활동가는 의욕을 가지고 어용을 바꿔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조직은 별로 없지만 ‘한 방에’ 뭔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선거’에 있다고 생각하고 선거에 뛰어들게 된다. 선거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당연히 최대한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하는 큰 사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선거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선거 또는 집행부 장악하는 것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고, 그것이 가장 크다고 보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선거자체에 매몰되게 한다. 선거, 집행부를 활용할 큰 기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선거, 집행부만이 뭐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반드시 ‘선거주의’에 빠지게 된다. 앞에서 과거 야당활동가들이 집행부를 무수히 장악했으면서도 여전히 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예들은 선거주의가 실제로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최근에만 김포교통 김상영 지부장, 우신버스, 보영운수 등에서도 야당활동가들이 당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아는 놈이 더 한다고 오히려 더한 어용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제 우리는 과거 야당활동가들이 중심에 두어왔던 활동방식의 전부를 간략하게 보았다. 즉 ‘개별적인 법적투쟁, 그것의 결과 선거주의에의 경도’가 수많은 버스현장의 야당활동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적인 잘못된 활동방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순수한 마음으로 출발을 하든 위원장이 되고 싶은 욕심에 출발은 하든 과학적으로 활동의 체계들을 계획하고 만들어가고 평가하는 과정없이 무대포로, 계획없이 진행하는 이런 활동방식이 결과적으로는 현장 내에서의 변화를 이뤄내기는 커녕, 조합원들을 더 침체시켜왔다는 것이다. 활동가가 무식한 것은 개인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그 현장의 변화의 원동력인 조합원들을 패배주의에 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가의 무식과 비과학성은 현장을 말아먹는다. 어용노조를 끝장내야 한다라고 마음으로는 다짐하면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활동방식에서도 일관되지 못한 방식, 법적투쟁과 선거투쟁에 매몰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다보면 잘 되어봐야 집행부의 아무개 조합장 갈아 치우고 다시 어용이 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 민주노조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은 어용노조를 몰아내자고는 얘기하면서 정작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만들어 나가야 할 ‘민주노조 건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조합원들의 정서가 아직은 아니다”, “우리가 아직 힘이 없는데 민주노조를 걸어버리면 회사로부터 탄압이 더 거세진다”는 게 대표적인 이유다. 그러나 이는 핑계일 뿐이다. 정서를 외치지만 사실 조합원들의 정서는 현재의 어용노조 하에서 말만 못할 뿐 속으로 쌓여있는 다양한 불만들이 농축되어 있다. 그 어용에 대한 불만의 정서를 풀 수 있는 방법 역시 민주노조로 가는 길 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힘이 없다는 것 역시 핑계일 수밖에 없다. 그 힘이 얼마만큼 갖춰져야 민주노조로 가겠다는 것인가? 항상 우리가 과거 수많은 선진적인 현장들, 과거 역사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조직의 힘은 오히려 조직만 하고나서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힘으로 투쟁으로 돌파하는 가운데서 조직이 강화되고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수많은 친목계들이 있어왔지만 그 친목계에 계원들을 늘리기 위해서만 작업을 했고, 기껏해봐야 선거에서 몰표를 얻기 위해서 작업해 왔다. 문제는 친목계의 계원들 중 사측이나 어용노조를 상대로 실제적인 현장투쟁을 시작하게 되면 그 친목계의 쪽수가 10명이든 30명이든 규모에 상관없이 낱낱이 흩어지고 나아가 투쟁하는 계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피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조직하고 그 다음에 뭔가 해본다? 이 말처럼 기만적인 얘기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민주노조 건설이라고 얘기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민주노총으로의 조직변경이다. 사실 내용적으로 민주적인 절차들을 갖춘다고 하는 것도 민주노총으로의 조직변경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내용 자체를 갖추기가 힘들다. 즉 내용과 형식이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으로 간다고 곧 바로 민주노조의 내용이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다. 내용을 만드는 것, 형식을 바꾸는 것 모두 바로 그 현장의 핵심적인 활동가들이 꾸준히 부딪치면서 일궈나가야 하는 투쟁의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의 활동가들은 어떠한 핑계를 대든 민주노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어용노조를 바꾸자는 것으로만 소극적으로 일관하면서 다시 그 활동가들이 어용노조의 길을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어용노조를 바꾼다는 목적과 그것을 바꾸어서 민주노조로 가야 한다는 전망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절름발이 투쟁만을 하는 것이다. 어용노조를 몰아내자고 하면서 한 편에서는 민주노조를 가야 한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민주노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활동가들이 민주노조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민주노조로 갈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단지 지금의 어용노조가 문제이니까 어용노조의 반대로 구호만 민주노조를 얘기할 뿐, 민주노조의 내용을 빠삭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조란 무엇인가? 민주노조의 역사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들 속에서 수 많은 활동가들이 정립한 몇 가지 원칙을 봐야 할 것이다. 선배들보다 후배들이 좋은 이유는 선배들의 수십년의 경험을 후배는 단 한순간에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조는 기본적으로 민주성, 자주성, 투쟁성, 변혁지향성 등의 말로 정리된다. 민주성이란, 노동조합의 다양한 결정 및 집행의 절차 등이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다수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예를 들 것 없이 현재의 어용노조에서 민주적인 절차란 찾아 볼 수 없다. 대의원대회가 집행부의 따까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 선거 때 자행되는 갖가지 부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는 대의원대회, 상집회의 등 각종 회의체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나아가 이런 회의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그 공개된 내용을 조합원들 토론을 부치거나 여전히 쟁점으로 남을 경우 교육, 공개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의견을 한군데로 모아간다. 이 과정이 한번에 지시를 내리는 어용노조보다는 시간은 많이 걸린다. 또한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나오고 논쟁이 벌어지는 과정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토론, 각종의 공개적인 회의 등을 통해서 나타난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투명하다보니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참가와 결합을 통해 보다 힘있게 추진되게 된다. 민주노총 사업장이 한국노총 사업장보다 그래도 더 단호하고 강력한 투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민주성을 통해서 조합원들을 한데 묶고 조합원들의 힘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성은 사측과 정부에 대한 자주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현재의 어용노조들은 사측으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떡고물을 받아먹고 있다. 이미 집행부 장악 전부터 사측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측의 노무부서 역할을 자처하다보니 당연히 사측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할 수 없다. 특히 버스현장에서 사측에 대한 투쟁이 곧바로 어용노조에 대한 투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용노조가 사측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하고 하부부서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조는 당연히 사측에 대해 자주적이다. 노조사무실에 관리자가 기웃거리지 못하게 함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매수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역으로 사측의 그런 시도를 조합원들에게 공개하면서 사측의 입김을 미연에 방지한다. 한번 코끼면 계속 사측에서 당기는 대로 갈 수 밖에 없다. 단 한번도 코 끼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그래야만 노조의 자주성이 보장될 수 있다. 민주성과 자주성이 담보되는 것과 함께 노조는 투쟁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민주노총의 처음 출범 역시 투쟁을 통해서 쟁취된 것이다. 오죽하면 투쟁없이 쟁취없다라고 하겠는가? 다만 투쟁의 수위와 방식은 사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앞서서 지금까지 민주적이지 못하고 사측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해왔는데, 그 관행을 바꿔나간다고 생각해보자. 알박해왔는데, 알박은 불법이며 그래서 알박을 노조차원에서 막으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사측은 노조의 지침에 따라 알박을 제일 처음 거부한 조합원을 상대로 징계 등의 탄압을 가해올 것이고, 그에 맞서서 노조에서는 선전물을 뿌리든, 공고문을 부치고 법적대응을 하든지 간에 어떤 식으로든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투쟁의 수위는 달라질지 몰라도 민주적인 노동조합은 사측에 맞서 투쟁성이 있어야만 조합원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변혁지향성이란 노조가 단지 자기사업장의 이익에만 국한되어서 자기 울타리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코오롱노동조합이 민주적으로 가려고 노력을 한다면 당연히 고속지부 및 자동차노동조합연맹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 들어오려 한다. 현재 버스어용노조들은 서로 간에 단합이 잘되고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단위 사업장 하나가 전체 자노련과 맞서 싸우는데는 힘이 많이 드는 것은 뻔하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성여객노조 투쟁을 죽이기 위해 지난 번 서울버스노조에서 서울시내 각 버스사업장의 어용들을 착출해서 500명이 구사대로 동원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다. 즉 현재의 한성여객만 보더라도 사실은 한성여객 사측과 한성여객노조의 1대 1 싸움이 아니라 사실은 한성여객노조 대 서울시내 모든 버스사업주(서울버스사업조합)와 서울버스노조(50개 사업장 어용노조)와의 투쟁인 것이다. 어용과 사측은 서로 연대하고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데 우리는 다른 사업장은 외면하고 우리사업장만 바라보고 있다면 질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이처럼 자기 사업장의 테두리에만 갇힌 소위 우물 안 개구리를 ‘조합주의’라고 한다. 현재 조합주의는 각 민주노조들의 연대투쟁을 가로막고 나아가 자기사업장의 문제마저 제대로 풀기 힘들게 만든다. 결국 버스현장에서도 한 단사의 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은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그 사업장이 제대로 민주노조로 우뚝 서고 끝까지 민주노조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버스현장의 투쟁들이 활발해지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용과 사업주들의 연대보다 더 강력한 각 사업장별, 사업장 내의 소수 핵심활동가들의 투쟁들이 긴밀하게 연대되고 상호간에 지원되어야만 거대한 어용 버스노조들을 바꿔낼 수 있다. 즉 조합주의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전망을 가지고 투쟁을 해 가는 것이 바로 변혁지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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