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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03
    스머프에게 주는 상(2)
    말걸기
  2. 2007/03/02
    이러고 산다(5)
    말걸기
  3. 2007/02/28
    일하게 되었다... ㅠㅠ(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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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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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지켜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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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2/22
    하루살이(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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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2/15
    겪어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르지
    말걸기
  9. 2007/02/15
    저 산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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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2/14
    '성매수' 사건으로 둔갑하다(3)
    말걸기

스머프에게 주는 상

 

한심한 스머프...님의 [10년...] 에 관련된 글.

 

 

'천성을 버리고 여기까지 온' 스머프에게 주는 상

 


@ 06-07-06 11:29 | NIKON D200 | Nikkor 24-50mm F/3.3-4.5D| 50.0mm | 1/125s | f/8.0 | ISO 100

 

 

자욱한 안개 속처럼 묘연할지라도 이 풍경처럼 평온한 세월 보내길...

 

 

이러고 산다

 

1.

 

며칠 전 파란꼬리와 버스 정류장에서 얘기를 하다가 실제 대화를 바탕으로 문제 하나 만들었다.

 

- 말걸기 : 운전면허 주행 시험 코스가 어디야?

- 파란꼬리 : 학원에서 나와서 이쪽으로 와서 저쪽으로 돌아서 가.

- 말걸기 : 못 알아 듣겠다.

- 파란꼬리 : 아, 가방에 코스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구나.

- 말걸기 : 지도 보여 줘.

- 파란꼬리 : ㉠

 

[문제] 위 대화에서 ㉠에 들어갈 알맞은 문구는?

 

① 버스에 타서 보여 줄께.

② 물에 타서 보여 줄께.

③ 볕에 타서 보여 줄께.

 

 

2.

 

또 어느 날 있었던 실제 대화.

 

- A : 남자를 애완동물처럼 키울 수는 없을까?

- 말걸기 : 그런 끔찍한 짓을!

- A : 일본 만화를 읽고 있는데 그게 남자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얘기야. 실제로도 그럴 수 없을까?

- 말걸기 : 남자들이 길바닥에서 고양이들이랑 쓰레기 봉투 뒤지는 거 보고 싶어?

- A : 그게 끔찍한 거구나.

 

이 대화를 전해 듣고선 파란꼬리는, 남자는 애완동물처럼 키우면 더 힘들 것이라 했다. 손도 많이 가고 돈도 많이 쓰게 되고...

 

 

일하게 되었다... ㅠㅠ

 

다음 주부터 매일 나가야 하는, 그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백수, 전망 없는 것 빼고는 다 좋았는데... 슬프다 ㅠㅠ.

행여 말걸기에게서 은근히 '속' 빼먹을 궁리를 하고 있던 모든 이들에게는 죄송하다.

 

파란꼬리의 충언도 있고 해서 조금은 빨리 선택했다.

파란꼬리 말대로 일을 하지 않으니까 건강을 더 해치는 것 같고...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술 쳐먹고 그러면 건강이 뷁 하겠지만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면 정기적인 일이 좋기는 하지.

 

걱정이 앞서긴 한다.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에휴~ 몰라.

 

 

고독한 비행

 

과연 저 갈매기는 고독하게 날고 있을까?

 

 

@ NIKON D200 | Nikkor 18-200mm F/3.5-5.6G ED | 200.0mm | 0.001s | f/5.6 | ISO 400

 


우중충한 하늘. 앏은 구름은 석양 빛에 물들기 시작한  늦은 오후 한 마리의 갈매기가 낮게 활강을 하고 있다. 탁한 화면 안에 홀로 날개를 편 갈매기는 웬지 고독해 보인다.

 

 

사진이란 건 확실히 '뻥'인데 저 갈매기 주변에는 '개떼'보다 많은 갈매기들이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 마리 갈매기만 화면에 놓아 실제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건 사진이고, 또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사람은 이토록 사물을 자신의 감정으로 포장하는데, 사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지도 포장한다. 사람은 스스로 '고독'하길 바라나 보다. '고독'해 보이길 바라나 보다. 행여 주위에서 관심 한 번 더 받아볼까 해서...

 

 

차라리 '언니'가 어떨까?

 

말걸기[호칭과 지칭, 그리고 존칭과 존댓말] 에 관련된 글.

 

 

말걸기네 지역위원회의 위원장은 말걸기의 대학 후배이다. 같은 학과는 아니지만 대략 96년 말인가 97년부터인가 함께 활동했던 일군의 무리에서 만났다. 이 일군의 무리는 서대문-마포-은평의 민주노동당 지역조직의 바탕이 되었다. 어쨌거나. 말걸기랑 파란꼬리는 고양시로 이사가려고 준비 중인데, 지역위원장은 섭섭한 지 다른이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이 동네에서 오빠, 언니로 부르는 유일한 사람들인데... 가네..."

 

말걸기 동네 지역위원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교적 어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이 참으로 짧다.' 그러니까 상대 나이야 어떻건 간에 존댓말 별로 안 쓰고 호칭도 대체로 '동지' 아니면 '씨'다. 사람이 뻣뻣하고 오만해서가 아니고 '관계는 평등해야지'라는 생각과 그런 심성의 표현이다. 말걸기는 그게 좋다. 대접받고 싶어하는 것들이 '싸가지 없게' 느끼는 행동은 다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칭에 있어서 말걸기와 파란꼬리에게는 오빠, 언니를 사용한다. 아마도 10년 전 학교에서 만난 사이라서 그런가보다. 말걸기가 다니던 학과와 단과대학에서는 선배들에게 대체로 '형', '오빠', '누나', '언니'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한테 '형' 또는 '선배'란 호칭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오빠'라는 호칭이 갖는 부정적 요소를 몰라서 그랬다기보다는 아마도 여학생의 수가 남학생의 수에 비해 적지 않았고 지위의 차별이 두드러지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오빠' 교육이 잘 되있었거나.

 

이런 문화에서 함께 지냈으니 지역위원장이 말걸기더러 '오빠'라고 부르는 건 그다지 어색한 건 아닌데, 한 여성 당원이 그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었다고 털어놓았다. 남성의 욕망에 근접한 호칭 아니던가. 그러면서 '형'이나 '선배'라고 부르는 자기의 문화를 들려주었다. 뭐, 다 아는 얘기.

 

 

그런데 몇 일 생각해 보니까, '형'이라는 호칭에 부여한 '무성성' 혹은 '남성 욕망의 제거'가 오히려 환상이겠구나 싶었다. '학형', '학부형' 등과 같이 '형'의 쓰임새로 보아 '형'이 단지 나이 어린 남자가 그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말에 그치지 않는 게 확실하다. 선배나 나이 많은 사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존중을 표현해야 할 상대 일반을 호칭 또는 지칭할 경우에 '형(兄)'을 사용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형'을 호칭으로 사용할 경우 '형'의 '일반성'을 '무성성'의 의미로 해석한 듯하다.

 

면밀히 따져보면 언어에서도 '무성성' 혹은 '성의 중립'을 찾기 쉽지 않다. 특히, 호칭과 지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형'의 일반적 용법이 과연 '무성성' 내지는 '성의 중립'일 수 있을까? 오히려 남성을 지칭하는 말(man, he)이 인간(human)을 대표하듯이, 존중받을 남성 상대를 지칭하는 '형'이 일반성을 획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여성들이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오빠'라는 말이 갖는 성격-성별 관계의 확정-을 피하려다가 '형'이란 말에게 일반적 지위만 부여해 준 꼴이다. 또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인간을 대표하게 되는 언어 현상에 '투항'한 꼴이다.

 

'인간도 생명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는다.'는 문장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두번째 '인간'이라는 단어는 'human' 혹은 'man'이라고 하기보다는 아마도 'he'라고 할 것이다. 영어권 사람인 어떤 페미니즘 언어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처럼 보통 'he'라고 써야 할 단어를 죄다 'she'로 바꾸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이걸 '그녀'라고 번역했는데, 어떤 의도로 단어를 달리 선택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얼마나 어색했던지(물론 그 어색함은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의 특성을 약간은 무시한 번역도 이유일 것이다).

 

그 어색함을 그 언어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천년 동안 여성들이 느낀 그 어색함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언어에서는 '성성'을 제거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성별이 무엇이고 간에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건 어떨까. 물론, '씨'나 '동지' 따위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비교적 사적인 관계가 섞인 경우에 말이다. '언니'의 현재 기본 용법은 손 아래 여성이 손 위 여성을 부르는 말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생이 손 위 동성을 부르는 표현이었다. 예전 용례에 성별을 교차해서 사용했던 흔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름의 현대적 용법을 만들어도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언어에서 '일반성'을 가장한 '무성성'은 사기에 가까운 것이니까 '형'이라는 말에 포섭되기보다는 아예 현재의 상식에 반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도발적이니까 어렵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멋지기도 할 것 같다. 왜냐면 호칭에 있어서 '무성성의 사기'를 고발하는 행동이기도 하니 '전복'이 아니겠는가.

 

 

 

말걸기보다 5살 정도 어린 한 인간은 말걸기를 '선배'라고 부르는데, '선배'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는 말걸기는 차라리 '~야'로 부르라고 했건만 절대 못 고친다. '형'도 싫고 '오빠'는 더더욱 싫은 모양이던데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면 그것도 싫다 하겠지? 하기야 뭐라 하든 자기가 좋은 게 좋은 거지.

 

 

지구를 지켜라~

 

퇴직 선물을 퇴직한 지 1년이 지나서야 받았다.

함께 일했던 부서에서 국장 빼고 돈을 모았단다.

말걸기가 지구본 갖고 싶어한다는 걸을 잊지 않고, 목언니가 선물 증정을 추진했다.

사다리 국장을 제외한 옛동료들에게 감사. 특히 목언니!

 

 

@ NIKON D200 | Nikkor 18-200mm F/3.5-5.6G ED | 200.0mm | 1.0s | f/5.6 | ISO 100

 

 

@ NIKON D200 | Nikkor 18-200mm F/3.5-5.6G ED | 105.0mm | 1.0s | f/5.3 | ISO 100

 

 

@ NIKON D200 | Nikkor 18-200mm F/3.5-5.6G ED | 60.0mm | 0.769s | f/5.0 | ISO 100

 

 

심심해서 선물 자랑도 할 겸 몇 장 찍었다.

 

첫 사진을 보면 작년에 다녀왔던 하바로프스크와 이르쿠츠크, 바이칼호수와 울란바타르가 보인다. 그리고 동경도. 아~ 지구본은 보면 볼 수록 가고픈 곳이 생겨~

 

두번째 사진을 보면 먼지까지 찍힌 게 보인다. 이래서 아직 아마추어야... 세번째 사진은 세워 놓고 찍었지만 눕혀놓으니 분위기도 나고 한 화면에 볼 수 있으니 좋아서...

 

 

하루살이

 

언젠가 영화에서였나, '너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냐?'는 질문을 접한 적이 있다. 말걸기와 파란꼬리는 이런 유치한 소재로 유치하게 잘 논다. 그래서 이런 대화를 했더랬다.

 

- 말걸기 :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냐고 물어봐줘.

- 파란꼬리 : 말걸기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냐?

- 말걸기 : 하루!

- 파란꼬리 : 뭐얏!

- 말걸기 : 매일매일 신선한 사랑을 주려는 거지!

- 파란꼬리 : 오홋! 헤헤.

 

 

하루짜리 유효기간을 좀 응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삶의 목표'!

 

삶의 목표라는 건 아주 거대하기도 하지만 잘게 쪼개져서 그때 그때 달성해야 할 과제가 되기도 한다. 단기적으로는 이번주(혹은 다음달 몇 일)까지 무엇을 해야 하고, 중기적으로는 올해 안에 뭘 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몇 년 새 무엇을 이루고 등등. 무슨 일이건 간에 이런 식으로 달성해야 할 내용과 마감을 정해 놓고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자꾸 뒤로 미루게 되고 목표한 날이 다가올수록 부담만 왕창왕창 커진다.

 

오늘 할 일은 요만큼이라고 정해 놓고 그것만 해내면 삶의 목표가 달성되는 상황을 만들면 어떨까. 내일이나 모레, 그 다음날이고 언제고 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말걸기가 인생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은 다 끝낸 것 아닌가. 즐겁고 행복할 것 같다. 성취감도 아주 클 테고.

 

그리고 밤에 잠이 들면 모든 게 새로 시작하는 거다. 하루짜리 인생.

 

 

 

겪어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르지

 

무엇이든 경험하게 되면 깨닫는 바가 있다. 그렇지만 같은 경험이라도 사람마다 깨닫는 바가 다르긴 한 걸 보면 경험했다고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쁜 경험'은 피하는 게 좋다는 게 말걸기의 평소 생각이다. 실패를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은 아니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경험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한-미 FTA 체결 같은 것 말이다.

 

한-미 FTA를 적극 찬성하거나 추진한 인간들만 나락으로 떨어지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하자는 놈들만 그 쇠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리고, 핵무기 찬성하는 놈들만 핵폭발과 낙진과 방사능에 뒈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상의 이치라는 게 그러하지 않으니 '파국'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최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게 '최악'일 수는 있지만, 따져보자면 당장 그걸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지 않은가. '최악을 피하자'는 생각이 하나의 '이념'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조바심과 두려움을 부추기는 관념덩어리로서.

 

올 대선을 앞두고 결국 비판적 지지의 새로운 버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손호철이 '두려움의 동원정치'라고 했다. 말걸기는 비판적 지지의 전통은 '최악은 피하자' 이념과 큰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 전통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운동권들의 주장이, 정치하는 자들의 주장의 일체가 '최악은 피하자'주의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다.

 

우파들은 '비판적 지지'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고 좌파들은 '우파가 잡으면 다 망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비판적 지지'의 어떤 버전이든 그것이 주장하는 근본적인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는 게 명확하다. 그리고 민주노총이고 민주노동당이고 간에 다 우파가 잡았지만 망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안돼!'라는 말은 자주 들었고 말걸기 또한 자주 뱉었던 말이긴 한데, 지나고 보면 나빠진 건 사실이지만 그 상황에서도 다 살아지긴 한다. 상황, 처지가 나빠지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싫다. 괴롭기도 하다. 그래도 결국은 살아갈 방법을 찾길 마련이다. 억울하게도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도 생기고 인간들은 더욱 이기적으로 변하고 세상은 뒤숭숭해져도 다 살아진다. 어떻게 보면 언제나 '최악'에 적응을 하면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념적 지향, 가치 판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상황 변화가 살아가는 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변화에 예민한 '운동'이라는 것이, 그 예민함 때문에 오히려 조바심과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래서 판단을 흐리는 경우가 생기지는 않은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이해관계든 이념이든 자신이 원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감정적 불만을 과대하게 이론적, 논리적으로 포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의 변화, 현실을 따져보는 비중은 줄어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단호하고 원론적으로 '쎈' 주장이 '좌파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블랙 코메디일 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건 대단히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현실적'으로 파악해서 '현실적'인 변화의 경로를 찾아내서 현실로 만들고 있느냐가 좌파의 척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물론 여기서 평등의 이념을 빼서는 안된다).

 

 

그래서 요즘은 차라리 겪어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도 그냥 허무한 바람일 수 있다. 비판적 지지는 20년 동안 되풀이 되었지만 여전히 두려움을 팔고 있으니 겪는다고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대선에서 '개혁적 후보'를 단일화하고 민주노동당도 이에 올인하면 어떨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면 어떨까. 이렇게 되면 민주노동당도 분당될 가능성이 높은데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분당되면 좌파의 각 정파들이 자리 하나 더 먹을라고 아주 쌩지랄들을 할 텐데 우파 빼고 당 만들어 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게다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비판적 지지파는 어차피 다시 좌파당 안으로 기어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조삼모사꼴이라는 걸 깨달을지도 모른다.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반복해서 경험했다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경험을 하고 나면 경험 전의 감정 상태를 돌아보게 되긴 한다. 너무 긴장했다거나 과도하게 걱정했다거나. 반면 지나치게 우습게 알았다거나. 이렇게 경험이 쌓이면 자기 감정 조절도 하게 되고, 예민함 때문에 생기는 조바심과 두려움도 조금씩은 떨치지 않을까.

 

 

저 산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아래 사진을 보다가 문득

저 산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 NIKON D200 | Nikkor 24-50mm F/3.3-4.5D | 25.0mm | 1/320s | f/8 | ISO 100

 

 

궁금하다는 게 미지에 대한 설레임이나 신비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진을 보면서 든 생각은,

살아가는 목표는 저 산만큼이나 멀리 있고

저 산을 넘어야 할 것 같긴 한데 넘어가 봐야 무엇이 있겠냐는 거다.

그렇다고 나무 그들 하나 없는 황량한 초원에서,

바삭 말라버린 입술만 깨물고 있을 수도 없고 말이다.

마지못해 터벅터벅 걸어가고만 있는 건 아닌지.

 

 

사진은 몽골의, 잠깐 동안의 옛수도 하라호린 동네에서.

 

 

'성매수' 사건으로 둔갑하다

 

2005년도 민주노동당 당직선거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서울의 모지구당의 중앙위원인 U씨는 또 다시 중앙위원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중앙당 성폭력대책위원장이 이 사람을 불러서 출마 포기를 종용하였다.

 

U씨에게는 성폭력 2차 가해를 해서 지구당 운영위원회의 결의로 공개사과를 했던 전력이 있었다. 지구당 행사 뒷풀이에서 어떤 당원이 무슨 얘기를 했는데 합석하고 있었던 여성 당원에게 심히 성적 불쾌감과 모멸감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여성 당원은 강한 문제제기를 했고, 당시 지구당 위원장이기도 했던 U씨는 나름이 분위기 유지를 위해 갈등을 '무마(?)'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 일로 그 지구당 운영위원회는 발언 당사자는 당기위에 제소를 했고, U씨에게는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U씨는 공개사과를 이행했다.

 

그런데, 선거철이 다가오자 U씨의 반대파였던 피해 여성 당원은 U씨의 전력을 중앙당 성폭력대책위원장 등에게 비공식적으로(!) 알렸고, 당시 성폭력대책위원장이자 여성위원장이었던 박씨(현최고위원)는 U씨를 조용히 불렀다. 중앙위원 출마를 포기하지 않으면 성폭력대책위에서 과거의 그 일을 조사한 후에 당기위에 제소하겠다고 했다.

 

U씨는 중앙위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성폭력대책위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U씨가 결국 공개사과하게 되었던 그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중앙위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일까? 그가 그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회피했다면 중앙위원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면? 이는 '정치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징계를 받았음에도 과거 전력을 충분히 반성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중앙위원 출마를 강력하게 비판할 수도 있다. 또한 징계 자체가 충분치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반면 징계를 이행했다면 과거의 잘못은 참고 사항에 불과하다고 보고 지지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는 각각의 사례마다 그 조직(지구당/지역위)의 당원들이 실질적으로 가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성폭력대책위원장은 몰랐을까? 알고 있기때문에 조용히 불러서 '협박'을 했고 선거 후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민한 성폭력·성차별 문제를 선거에 악용하여 반대파에게 타격을 입히고자 했던 시도는, 단지 정치적 권리를 억압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성폭력·성차별이 제대로 규율되지 못하도록 한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민주노동당만 하더라도 수많은 성폭력·성차별 행위가 항상 적대적 정파 대립으로 왜곡된다. 심지어는 없던 일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지난 10-11일 양일 간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이날은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건 진보정치연구소 건이다. 진보정치연구소의 K씨가 연구소의 공금을 유용한 것이다. 모가지 짤릴, 터무니 없는 일을 저지른 게 예결산위원장에 의해 보고되었다. 과거에 수백만원의 당비를 유용하고도 여전히 뻣뻣하게 중앙당에 남아있는 놈도 있다는 말로 봐주자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공금유용 사건'이 '공금으로 성매수 사건'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K씨는 평소 늦은 술자리가 잦았고 사무실 근처 L호텔 사우나에서 여러차례 잤던 모양이다. 그 사우나의 스포츠마사지를 받았는데 세 번을 연구소 법인 카드로 결재했던 것이다. 어처구니가 날라가는 모양새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김 예결산위원장은 중앙위원회에서 공금유용 사실을 보고한 후에, 처음에는 그 내역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말 못한다', '기자들 내보내야 한다', '이거 공개되면 큰 일 난다'는 말로 시작해서 결국, '내가 그곳에 확인차 직접 가봤는데 차마 말을 못하겠다', '남자들이 팬티만 입고 돌아다닌다' 따위의 말로 세간의 '안마시술소'로 둔갑을 시켰다. 그는 결코 '성매수', '성매매업소', '안마시술소'란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공금으로 성매수를 했다'고 받아들였다.

 

 

김 예결산위원장은 정치적으로 빚을 진 이들이 있다. 그는 경기도의 모지역위원장이기도 한데 그가 그곳에서 지역위원장을 오래 지낼 수 있는 것은 최씨와 정씨의 '배려'이기도 하다. 최씨는 진보정치연구소의 이사인데 연구소 소장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로비를 해왔다. 연구소 이사회는 지난 가을에 이사회를 열어 새 소장을 임명제청했어야 했음에도, 권영길 이사장이 이사회 소집을 미루어온 것은 최씨의 로비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최씨의 오른팔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또 다른 최씨(최2)로서 예결위원이다. 최2씨는 진보정치연구소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3일 내내 연구소의 회계자료를 분석했단다. 공금유용을 밝혀낸 것은 '꼬투리'가 아니라 훌륭한 감사의 결과였다. 감사 과정에서 예결산위원회는 연구소로부터 소명 공문도 받았고 결론은 명백했다.

 

어쨌든 예결산위원회의 감사 결과가 중앙위에 보고되기 전에 김 예결산위원장은 권영길 이사장 등을 만났다. 권영길 이사장에게는 무난하게 해결하도록 하겠다고 했단다. 문성현 당대표도 연구소 간부의 공금유용 건을 알고 있었다. 김 예결산위원장이 중앙위원회 자리에서 '말 못한다'고 했을 때 문대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 예결산위원장은 이 건에 대한 어떤한 소명도 받은 적이 없다고까지 중앙위에서 거짓 발언을 했다. 게다가 김 예결산위원장이 보고할 순서가 임박하자 연구소의 재정관리를 담당하는 김 부소장은 중앙위원회장에서 사라졌다가 결산 보고 건이 처리 된 이후에 나타났다. 김 부소장은 그 자리에서 소명을 했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이다. 김 부소장은 최씨가 연구소 소장이 될 수 있도록 나름 노력했던 사람이다. 미리 짜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여의도 L호텔의 사우나에서 운영하는 스포츠마사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당 간부들이 알고 있다. 소위 고위 당직자들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래서 연구소 K씨의 공금유용 건이 '성매수 사건'은 아니라는 것도 그들은 잘 안다. 이 건의 내막을 밝히기 위해, 김선동 사무총장, 김기수, 김성진, 홍승하 최고위원으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는 '진실'을 당대회에 보고할 것이다.

 

그러나 '공금유용 사건'은 '공금으로 성매수 사건'으로 둔갑한 채 전국의 당원들에게 지금도 회자되고 있듯이 당대회 후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범죄'로 연구소와 K씨는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보고는 당대회 대의원이나 당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은 여타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성폭력·성차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정파 간 싸움으로 변질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성폭력·성차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구성된 당의 기관은 언제나 정의로운 당원들로부터 부족함을 지적받았다. 당의 공식 기관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권위를 지년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한시적으로 구성된 '일개' 진상조사위원회가, 그것도 최고위윈들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가 '정치적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길 것이다.

 

 

성폭력·성차별 문제를 귀찮고 짜증스러운 사건으로 치부하는 조직의 문화에서는 이런 식의 조작 사건은 필연적이라 믿는다. 가장 혐오스러운 범죄라는 정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권위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불신. 이를 잘 알고 있다면 정파 싸움에서 '좋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이번도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다면, 성폭력·성차별 사건은 죄다 문제 제기에서부터 해결 과정, 결과까지 온통 음모와 의혹 투성이라는 인식이 확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