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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명체들

1.

작년 여름, 정전이 되었다.

밥 먹는 중에 정전이 되어서 촛불을 켜고 밥을 먹는데

한별이가 "물 안나오니까 못 씻겠네~" 해서

"정전이 돼도 물은 나오는 거야~"라며 살짝 잘난 척을 했는데

물이 안나왔다. ㅡ.ㅡ

강화집은 모터로 지하수를 뽑아올려 쓰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받아놓은 물이 있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일찍 잤다.

원래는 애들과 함께 2차 시사회를 할 예정이었는데 그렇게 됐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때, 강화집에 와보니 

남편이 수도물은 씻는 용도로만 쓰고 먹지 말라고 했다.

그전까지 남편은 강화물이 진짜 좋다고 그냥 막 받아먹는 시범을 보여주곤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상수도 구멍에 뱀이 한마리 들어갔단다.

어떤 구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물같은 상수도 통에 뱀이 들어갔단다.

뱀이 살아서 어딘가로 나갔을리는 없으니 뱀이 빠져죽은 물을 먹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냉온수기를 들여놓기로 했다.

 

2.

그날 오후에 상수도통이 들어온다고 해서 양말서랍이 있던 자리에 놓으려고 청소를 하는데

서랍장을 치워보니...쥐똥이 있었다.

당연히도 쥐똥은 집에 쥐가 있다는 증거라서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끈끈이를 붙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주말에 강화집엘 왔더니 싱크대 위에 끈끈이 상자가 올려져있었다.

그날은 집에 손님이 오시는 날이었다.

손님을 위해 차를 끓이다가 끈끈이 상자를 발견한 나는

좀 챙피한 생각이 들어서 그걸 싱크대서랍에 넣고 다시 차 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손님이 말했다.

"집에 쥐가 있네요...."

손님은 작은 서랍장 아래를 가리키며 거기서 쥐가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식구한테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쥐가

손님한테만 모습을 보인 거다.

나는 괜히 쑥스러워져서 헤헤거리면서

사실은 우리 집에 쥐가 있어서 끈끈이를 샀는데

보이기 챙피해서 여기 숨겨두었다고 하며 서랍안에 있는 끈끈이를 보여드렸더니

손님들이 끈끈이를 설치해주셨다.

 

쥐는 아직까지 우리한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3.

다른 종의 생물들은 서울집에도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엔 개미가 무척 많았는데

개미도 개미였지만 일삼아서 개미를 손톱으로 눌러죽이는 은별이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바퀴벌레도 모습을 보였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개미가 바퀴벌레 알을 먹는다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앞으로 개미는 우리 편이니까 죽이지 말자는 약속을 했다.

 

이사를 2주일 앞두고 새로운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 전날, 연휴 준비를 하며 사무실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또 누가 다쳤나...'하는데

선생님이 놀란 목소리로 은별이 머리에 이가 있다고 지금 빨리 올 수 없겠냐고 하셨다.

설 연휴에 큰집에도 가야 하는데 어떡하나 걱정을 하다

그날 밤 나와 남편은 12시까지 목이 뻣뻣해지도록 이를 잡았다.

다행히 한별 하은은 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머리를 감겨

헤어 드라이어로 바짝 말리고 있고, 침구는 살균하고 있다.

 

4.

두밤만 자면 이사다.

강화집에는 강아지 별이, 다롱이와

대나무처럼 생긴 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관목, 얼어죽은 포인세티아 화분이 있다.

거기다 하은이가 맑은샘공부방에서 지렁이 수십마리를 얻어왔다.

아침에 하니샘한테 전화를 드려서 지렁이들을 어떻게 돌봐야하는지 배우고나니

정말 돌볼 생명체들이 한 두개가 아니다.

 

하은, 한별, 은별, 그리고...기타 지구생명체들.

1년동안 서울집에서도, 강화집에서도 항상 떠도는 듯한 느낌으로 살았는데

다음 주부터는 강화 주민이 되어 지구생명체들과 즐겁게 살아갸아할 것같다.

강화군에서는 우리 식구들의 전입을 축하하며

식구 수당 10장씩의 쓰레기봉투를 선물해주었다.

쓰레기봉투를 50장이나 받게 되다니 기쁘다,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시골로 이사가면 전입축하금같은 거 준다고 해서 강화도 그럴 거라 기대했었으니까.

하지만 강화는 워낙 귀농인구도 많고 그래서 그런 거 절대 안준다고 한다.

그래도 고마워해야지. 서울서는 이사가도 그런 거 한 개도 안주니까.

 

이사를 위해 이집저집 정리중인데 끝이 없다.

오늘은 애들과 함께 별이, 다롱이 산책을 시키다 집 근처의 구멍가게에 들렀다.

우리 집 근처(사실 근처라고 해봤자 30분 넘게 걸어야하지만)에 구멍가게가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기뻐했다.

구멍가게 주인이 개를 무서워해서 나는 멀찍이서 개 두마리를 잡고 서있었고

애들은 과자 한 개씩을 고르고 신나라했다.

강화주민이 되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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