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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컴 포맷을 했다.

최신 디스켓을 준에게 받긴 했는데 도무지 어디에 둔 지 몰라서 찾다가

결국 늘 쓰던 2007년판 블랙 에디션을 썼다.

내가 블랙에디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어서이다.

포맷을 끝내고 드라이버들을 깔고나서 애들 밥을 차리는데

애들이 대기화면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애들이 좋아하던 화면이었고....그리고 너무나 오랜만의 화면이었으니까.

 

예전에는 포맷을 자주 했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컴은 자주 느려졌다.

하지만 강화로 이사를 오고 작년에 내 메인 컴이 번개를 맞아서 파워가 나가고...

무엇보다 하루하루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동안 포맷은 꿈도 꾸지 못했다.

메인컴을 고치는 대신 임시로 다른 컴을 구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메인 컴을 꺼낸 건, 대학원 수업에서 피피티 발표를 하느라 usb를 쓴 후

임시 컴이 무지막지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서이다.

지금은 이름을 잊었지만 그 바이러스는 모든 파일들을  안보이게 했다.

화들짝 놀라 검색을 해보니 하드에서 사라진 건 아니라고 했다.

usb까지는 어찌어찌 복원을 했는데 용량이 늘어나면 복원이 안되었다.

처음으로 집에 전문가를 불렀다.

아는 분이 소개해준 전문가 분을 홍대앞에서 만나 강화로 모셔왔다.

 

그 때 집에 있는 모든 컴을 다 손을 봤다.

낙뢰에 맞았던 컴은 파워를 교체하니 살아났다.

하드에 대한 불안함을 토로했으나

전문가 분은 태국인가 어딘가의 홍수 때문에 하드 값이  두 배로 올랐으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했다.

그리고 바이러스 치료를 위해 포맷을 했다.

예전엔 밥먹듯이 하던 포맷이었는데 오래 안하니 엄청 귀찮았던 걸

전문가분이 해주어서 편하긴 했지만.... 회당 4만원이라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엄청 많은 돈을 벌고 있었던 거다...^^

 

다시 포맷을 했다.

몇년 전 사무실 moon은 내게

자기가 아는 여자 중에서 가장 컴을 잘 다룬다고 얘기해주었다.

처음엔 칭찬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이게 칭찬 맞나....하고 아리송해지긴  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푸른영상에서 첫번째로

스스로의 힘으로 넌리니어편집을 시작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랩터가 나오기 전에도 사무실 비디오머신으로 디지타이징을 하긴 했지만

완전 넌리니어편집을, 누군가의 도움없이 혼자 했던 그 기억이 한동안 자랑스러웠다.

지금은 시네마달에 있는 이피디에게 하나씩 물어가며 배우고..

(나중에 이피디는 한 번 물어본 걸 다시 물어보면 500원씩 벌금을 물린다고 해서

 나는 500원짜리 여러개를 준비해놓곤 했었다.)

 

그러다 아이를 낳았다.

시간은 쫓겼고 그래서 늘 버스가 끊길 때까지 작업을 하다가 랜더링을 걸어놓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작업의 막바지에 이를수록 아침이면 다운이 되어있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출산은 사고처럼 다가왔다.

엄마의 스트레스 때문에 아이가 태변을 보았고 나는 응급수술을 해야 했다.

나는 그 스트레스의 원인을 알았다.

그 스트레스는 지금도 생각난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 어떤 건지를 그 때 생생하게 느꼈으니까.

 

출산휴가를 끝내고 돌아왔더니 사무실의 가장 나이  많은 선배도 나보다 프리미어를 더 잘 다뤘다.

한때 테크니션이 되고 싶어서 모든 강좌를 다 들으러 다니던 나는

어느 순간 테크닉에 대한 열망을 꺼버렸다.

몇년간의 공백을 끝내고 돌아오면 매번 카메라는,  편집툴은 새로워져있었고

나는 점프를 해가며 그것들을 배워야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편집할 때, 나는 오로지 컷 편집까지만을 내 몫으로 남겨두었다.

믹싱과 색보정과....그 모든 과정을 다른 이에게 맡긴다는 전제 하에

나의 영역은 컷 편집,  오직 내용에만 한정시켰다.

오디오는 전혀 만지지 않았다. 오히려 만지는 게 방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편집실에 가보니 오디오 데이터가 다 있어서

연출자가 만지는 게 오히려 더 작업의 질을 높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번 편집 때에는 오디오까지 세밀하게 만져야겠다, 라고 다짐을 했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포기해가자 컴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졌다.

어느새 나는 포맷 조차도 하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가 최초로 혼자 힘으로 넌리니어편집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하던 것이

이제 혼자만의, 그리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랑스러움이 되어버린 것처럼

'moon이 아는 여자 중에 가장 컴을 잘 다루는' 그 사람은 아주 옛날에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식의 호명에 으쓱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능한한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포맷을 했다.

오늘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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