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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잠이 깼는데 다시 잠들 수가 없다.

알러지로 가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왜 그렇지? 요즘 매일 밤 그래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네...)

좀더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마음이 많이 상해있어서 그런 것같다.

마음이 상했다. 아주 많이.

패스하려고 노력을 해도 계속 뱅뱅 도는 이유는 상한 정도가 가볍지 않기 때문.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하는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지금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잊지 말 것.

 

나는 다큐멘터리감독이다. 

영화로 생각하고 영화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선배들은 가끔 농담처럼 "말하는 반 만큼이라도 영화를 만들어보지"라는 말을 던지곤 하는데

영화에 관련되서 말하는 것까지 삼가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제같은 자리에는 앞으로 가지 말아야겠다.

처음부터 내 자리가 아닌 데에는 가지 않았어야 했다.

 

2011년부터 2013년 8월까지 공부,라는 걸했다.

공부야 평생, 맨날 해야하는 거긴 하지만 

나는 돈 내고 공부하는 데, 그러니까 대학원이라는 데 갔다.

그리고 어제 처음 학회라는 데에 '토론자'로 참여했다.

학회에서 발표했던 게 어제 처음은 아니었는데

어제 비로소 차이를 알았다.

몇년 전 부산 무슨 호텔에서 했던 발표는

다큐멘터리감독으로, 미디어활동가로서 나의 활동을 말로 정리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어제의 나는 연구자로서 발언해야했던 것같다. 

사실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모호하고 혼란스럽긴 했다.

나는 '무엇'으로서 발언하는가 대해 계속 고민 중이긴 했지만

학회 발표회라고 한다면 행사 전에 미리 발표자들의 자료가 오고

토론자는 그걸 검토한 후에 토론내용을 준비해가면 될 걸로만 알았다.

하지만 행사 바로 전 날 자료집이 오긴 했지만

내가 맡은 세션은 아예 공란이었다.

발표자들에게 연락을 해서(다행히 지인들이라서) "무슨 내용으로 발표를 할 건가" 물어보니

오히려 발표자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야?" 내게 물었고

심지어 발표자 중 한 사람은 자신을 토론자로 알고 있었다는....

나름 리서치를 해서 토론문을 만들긴 했지만

기조발제를 들으면서 내가 맥을 잘못 짚었다는 걸 알았고

발표자들이 시간을 많이 써버려서 스탑워치 보면서 9분만에 토론을 마쳐야했다.

이후에 진행되는 양상을 보면서

우리 세션의 감독들이 다른 세션에 비해 덜 배려받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나의 감독님한테 미안해졌다.

그 때, 할까말까 할 때, "그냥 해요~"라며 하자고 했던 게 나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 앞으로 그런 데는 가지 마요" 문자를 보내긴 했지만

내내 기분이 안좋다.

 

어제의 그 총체적 불편함과 그 원인이 되는 구체적 양상은

사실 2년 반동안 공부를 하면서 늘 느꼈던 열패감의 축소판이라고나 할까.

첫학기에는 공부라는 게 무척 재미있었고 눈이 환히 열리는 것같은 기쁨에 들떴지만

곧이어 이런 저런 환멸스러운 상황들을 겪으면서 지난 여름에는 다시는

소위 '학계'라는 곳엔 가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되었다. 

그 다짐을 지켰어야 했다.

그 다짐을 지키지 않았으니 어제같은 상황에 빠져버리고 만 거다.

 

끝나고 자리 정리를 하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다른 세션 토론자들에게

"회비 내야하나요?" 했더니 

"그건 정규직 교수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해서

그래, 여긴 그렇지...

소수의 정규직 교수와

정규직 교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강의하고 

끊임없이 프로포절을 쓰는 비정규직 연구자들이 있는 곳이지...

 

영화 잘 만들어보겠다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고

NGO대학원에서 일반대학원으로 전과를 했고..

그리고 공부를 위해 발표회를 하거나 세미나를 하면서 

나는 늘 내가 부족하다는 열패감을 느껴야했다.

20대에 미리 진로를 정해서 공부할 수 있는 몸을 가진 이들과 내가 선 자리는 달랐으니까.

내가 서있는 곳은 변방, 아웃사이드.

 

끝나고 나오는데 우리 세션 발표자 감독들이 그랬다. 

"다음엔 더 내용을 준비해서 우리가 하자"라고.

그래, 아마도 그 자리에서라면 

지난 2년간의 경험이 유의미했다는 것을

애초에 공부라는 걸 하고 싶어했던 그 마음이 왜 필요했던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필요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출 수 있었다고

2년여의 시간을 정리하자.

선생님들, 고맙습니다,라는 말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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