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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몇 주 전에 고구마를 깎아먹는데
싹이 났길래 좀 안쓰러워서
윗부분을 자른 후에 물그릇에 담가두었다.
싹은 순이 되고 잎이 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물에 담근 부분이 썩기 시작했다.
 

 

둘째언니가 고구마를 물에 담그지 말고 컵에 올려놓은 후

실을 늘어뜨리는 방법으로 인공 뿌리를 만들어주라고 했다. 

고구마에 바늘을 꽂는 게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언니가 시키는대로 했더니
고구마로부터 수많은 줄기와 잎과 생겨나기 시작했다.
너무 무성해져서 자르지 않으면 자꾸 엎어졌다.
남편이 순을 좀 자르라고 해서
나는 못하겠다고 하니
자기는 뭔 죄냐,
면서 순을 잘랐다.
지금 상태는 두 번 정도 자른 거다.

 

 

나는 아직도 강화집-서울 사무실,
이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고구마는 실 몇 가닥에 의지해
이토록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는 자꾸 허청허청 비틀거리는 것같다.

 

 

김연수의 소설에는
다른 이들의 글들이 자주 인용되거나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오늘 병원 대기 시간에 책을 읽다 새삼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나처럼 돈을 벌기 위해
송도로, 파주로, 서울로,
길에 시간을 뿌리지 않을 거고
또 교육준비를 위해 강의안을 짜느라 
긴 시간을 보내지도 않을 거고
영화제 일에 시간을 쓰느라 밤을 지새지도 않겠지.
오로지 자기 작업을 위해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강화집- 서울 사무실 구도도
송도며, 파주며,서울이며 왕복 4시간을 길에서 보내는 것도
다 나한테 주어진 환경이니
그 상황을 숙명인 양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보자.
시간의 모래알을 세는 느낌으로 1분 1초를 아껴가며
기능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영혼에 물을 줄 수 있는
글들을 챙겨 읽으면서
살자.

 

 

고구마처럼
나의 이 생활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자,
라고 생각했다.

 

 

목요일에 누군가와 밥을 먹다가
윤이형님의 <루카> 이야기를 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서
이미지를 검색하고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그런데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라서 실망하고
뭐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좋아서 웃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 사람은 여고시절에 자신이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내내 그것을 혼자만의 비밀로 끌어안고 살아가다
얼마 전 처음으로 입밖에 내어 말을 했고
지금은 처음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다.
<루카>를 외우도록 읽었다고 해서
나는 <루카>를 필사하는 중이라고 해서
또 둘이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나에 대해 이야기할 힘을 얻었어요."
나는 지난 주에 그녀가 커밍아웃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 
나는 그날 그녀를 처음 만났다.

 

 

아침에 고구마에 물을 주다가
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도 생각했다.
고구마는 스스로 뿌리를 만들어서
이제 실은 필요없다.
하지만 처음 늘어뜨린 네 줄기의 실로
고구마는 이만큼 살아왔다.
봄이 오면, 5월이 되면
고구마 모종을 심으면서
이 고구마 순들을 심어야겠다.

 

 

그리고
나도 뿌리를 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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