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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1.

남편의 해외출장이 일주일을 넘어가면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어제 낯선 남자 둘이 왔길래 누구시냐고 했더니

온수기 고장난 거 보러 왔다고 했다.

나는 어제 고구마를 얼른 보내고 글을 쓰려고 하던 중이었다.

누구신데 그러냐고, 린나이 AS기사가 왔다갔다고 했더니

바깥어른이 언제든 다시 와서 봐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기분이 상한 나는 "저한테 먼저 무슨 말씀을 하셔야 하는 거 아니예요?"
했더니 바깥어른께 할 말은 다 했다고 했다.

아저씨, 이 집의 구성원이 그 사람만 있나요?

지금 열흘째 세탁이 안되서 손빨래를 하고 있고 

온수기도, 정수기도 고장나서 불편한 건 말로 다 못하는데

그리고 모래가 섞여나와서 물을 받아서 가라앉힌 다음에 쓰느라

제가 정말 고생이 많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낯선 남자 두 분이 이렇게 찾아와서

아침에 할 일이 태산인데 이러시는 것도 경우가 아니구요

그리고 아저씨가 저지른 잘못으로 이렇게 피해입고 있는 저한테

최소한 사과 한 마디는 해야되는 거 아닌가요?

 

그 남자는 말하기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사과를 하냐?"

라고 해서 

"이 집에 제가 왜 있을까요?"

그랬더니

자기는 사과 못하겠다 한다.

같이 왔던 남자는 뭘 잘못 건드렸는지

온수기에 물이 쏟아져나와 내 겨울신발이 젖었다.

나는 국제전화를 걸어 남편에게 물었다

"아무 때나 그냥 찾아와도 된다고 그랬어?

 

남편이 밖에서 뭘하고 다니는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신경쓸 겨를이 없지만

이런 식으로 나한테 피해가 돌아오면 나는 남편에게 따질 수밖에 없다.

결혼생활 16년.

나는 남편에게서 가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는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집안에만 들어오면 폭군으로 변했다.

아버지는 어느 날, 모내기를 도와준 마을사람에게

내 고양이를 줬다.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의 가족이 관절염으로 고생하는데

고양이가 특효약이라고 해서 그랬다 한다.

무서운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는 고양이를 찾으러 그 집에 갔다.

장애인 자녀들이 많아서 아이들이 무서워하던 집이었다.

뙤약볕에 달궈진 뜨거운 양철대문을 용기를 내어 조금 밀어본 다음,

문 틈으로 집 안을 살피며 내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누구냐고 뭐하냐고 그래서

저기 어디에 사는 누구네 집 딸인데 우리집 고양이를 찾으러왔다고 했더니

그런 건 없다고 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니 언니가, "네 고양이는 벌써 죽었을 거다"라고 했었다.

 

결혼하고 두번째 만난 강아지 다롱이.

챠우챠우 다롱이는 내가 만난 개 중에서 가장 교감이 안되었다.

먹는 걸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힘이 셌다.

일주일에 한 번 산책을 시킬 땐 힘이 너무 세서 끌려다니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심하게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고 바지가 찢어졌는데 그 찢어진 바지는 지금 나의 작업복으로 쓴다.

남편은 몇 번 다롱이를 다른 집으로 보내려 했는데

나는 몇 번이나  말했다.

"다롱이는 다른 집 가면 죽어. 이제사 우리들을 알아보는데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해"

어느 날 다롱이가 없어진 걸 발견했다. 수요일이었다.

끈이 풀려서 나갔나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다니다가 금요일, 지방강의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다롱이가 없어졌다고 하니

자기가 다른 데 보냈다고 했다.

어디에 보냈냐고 했더니 인천 식당에서 잔반처리 개가 필요하다고 해서 보냈다고 했다.

빨리 찾아오라고, 걔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하니 남편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결국 내 말이 맞았다. 다롱이는 일요일에 끌려갔고 수요일에 죽어서 먹혔다고 한다.

남편과의 신뢰는 그 일로 깨졌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이혼장을 썼고 남편은 코웃음을 쳤다.

개 한마리 때문에 가족을 버리냐고 그랬다.

개 한마리?

다롱이의 죽음을 둘러싸고 남편과 나+아이들3으로 편이 갈렸다.

남편은 그제서야 심상치않다는 걸 느꼈나보다.

그는 무릎을 꿇고 빌었으나 그건 단 둘이 있을 때 뿐이었다.

 

어제 사고친 남자랑 같이 온 남자가 누구랑 통화를 하는데

수화음이 너무 커서인지 들렸다.

"걔 또라이야"

아마도 나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다롱이가 죽고 나서 나는 그 구역 미친년, 공식 또라이가 되었다.

남편은 나와 단 둘이 있을 때에는 무릎을 꿇었지만 문 밖에서는 다르게 행동했다.

내가 밥을 못 먹고 앓아누웠다가 동물자유연대에 법률자문을 해본 결과

다롱이를 먹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답을 얻었다.

개는 물건으로 취급되는데 남편이 자의로 소유권을 넘겼기때문에 

개를 먹은 사람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

도의적으로 사과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정말 도의적일 뿐이다,

소송을 원하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그 때 소송을 원했다.

그리고 이혼도 원했다.

나는 말했다.

"이 사건은 유명해질거야.

당신 유명해질거야.

아마 나는 이 구역 미친년을 넘어서 온나라의 미친년이 되겠지.

그래도 괜찮아.

어쨌거나 키우겠다는 개를 먹어버려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는

이 문제적 상황이 여론화는 되지 않겠어?

혼자라도 할 거야.

당신이 개를 맡긴 사람의 연락처를 내게 줘.

주지 않으면 내가 찾아낼건데

어쨌든 그걸로 우리는 끝이야.

용서를 빌고 내 편이 될지, 아니면 저쪽 편이 되어서 나랑 싸울지 결정해"

 

남편은 내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우리 오빠한테 일렀다.

그는 늘 그랬다. 

오빠와 언니들, 엄마까지도 늘 나를 한심해한다는 걸 남편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안되면 가족의 힘을 빌려서 나를 막으려 했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를 타이르고 나한테 뭐라고 할 때

내 옆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 그는 그런 연출을 잘했다.

 

다롱이가 죽고 나서 나는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았다.

온 가족들이 나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미쳤다는 욕을 먹더라도

나는 혼자라도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롱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가족들의 반응이 달랐다.

나의 긴 이야기를 들은 새언니는

"아가씨가 더 성직자같아. 이혼하려면 해. 나는 끝까지 아가씨 편이야"

늘 부드러운 우리 새언니는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강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내게 힘을 주곤 했다.

 

남편이 개를 맡긴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남편은 그 때 우리마을 원장이었고 개를 맡은 사람은 우리마을 버스 운전사였다.

버스 운전사는 사과는 했지만 자기가 개를 넘긴 사람의 연락처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 남자는 수박을 사들고 용서를 빌러 우리 집에 왔었다.

어쩌면 그 남자도 함께 다롱이를 먹었을 것이다.

내가 그 남자에게 개를 가져간 사람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며

소송을 거론했을 때 그 사람은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용서해달라고, 하지만 그건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고.

그 남자는 아내가 집을 나가서 혼자 애 셋을 키우는 딱한 처지의 사람이었다.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연민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연민 때문에 언젠가 넘어지고 말 것이다.

 

2.

2개월 후 남편은 직장을 잃었다.

2013년 10월 1일. 다섯번째 영화의 첫 촬영이 예정되어있던 날,

남편은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대기발령이 났다고

집을 비워야하고 차를 반납해야 하고 월급을 더 이상 가져올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그 1주일 전에, 교회에서 나랑 친한 a 본부장님이(나중에 본부장이 또 나오니 이 분은 a를 붙임) 

갑자기 내 손을 붙들고

"우리 사모님. 잘 지내셔야 해요. 힘내세요"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그 얘기를 남편에게 전하면서

"참 안부인사도 독특하게 하시지? 내가 알아야할 일이 있는 거야?" 물었을 때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는 얼굴로 아무 일도 없다고 말했는데.

대기발령을 받았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a본부장님께 전화를 해서

1주일 전 그 말씀이 무슨 의미였는지 물었을 때

본부장님은 "제가 알면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거예요" 하면서

이미 2개월 전부터 온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했다.

"어떤 소문이요?"

본부장님은, "사모님, 다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했다.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본부장님, 정말 저는 몰라요. 전혀 몰라요. 오늘 아침, 방금 처음 알았어요"

본부장님은 애써 말을 고르며 전해주었다.

"신부님이 사람을 잘못 써서 더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소문이요" 

그러니까 다롱이가 죽던 그 시기에 이미 소문은 퍼져있었던 거다.

남편은 그냥 감봉정도의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단다.

 

남편이 잘릴 거라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있을 때

그 소문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나는 전혀 몰랐다.

남편은 알았을까. 남편도 몰랐을 거다.

온수리에는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사람들이 싫다.

마을유지입네 하면서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지 남편이 잘리게 되었는데

(나는 그들이 남편을 자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의심을 여전히 하고 있다)

방글거리며 웃고 다니는 그 이상한 여자에게 또라이라는 별명을 서슴없이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개 한마리' 때문에 소송을 하네 마네 하는 그 여자를

참 많이 비웃었을 것이다.

 

2010년 1월, 갑작스런 발령 때문에 강화를 찾아서 둘러보는동안

나는 내내 윤태호의 <이끼>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 곳은 <이끼>의 배경이 되던 그 마을 같은 곳이다.

남편은 내 예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마을의 유지라도 된듯 교만했다.

내가 보내는 경고를 남편은 "참 걱정도 많다"라며 무시했다.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술을 안마시던 남편이 강화에 오면서부터 술을 마셨다.

나는 늘 남편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다.

술을 마시더라도 운전은 절대 하면 안된다고 했다.

온수리에서 우리 집은 5분 내외, 그 거리에 대리를 부르면 대리기사들이 

"그냥 운전해서 가세요. 이 마을은 다 그래요" 한단다.

나는 그래도 계속 경고했다.

음주운전 하지 마라. 독립영화감독과 성공회 사제에게는 좀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된다.

만약에 너나 내가 음주운전하다가 걸리면 우리는 신문에 나게 된다....

그는 내말을 듣지 않았다.

2012년의 어느 날, 집에서 대학원 숙제를 하고 있는데 벌금고지서가 도착했다.

320만원이 넘었다. 그 때에도 남편은 음주운전이 적발된 사실을 숨겼다.

그 고지서 덕분에 나는 남편의 음주운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 때 끝났다고 생각했다. 끝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끝내지 않았다.

주교는 그때 그냥 어깨 툭툭 치고 "앞으로 조심해라" 하고 넘겼다.

나는 가부장들의 그 협잡이 한심했다.

나는 성공회 사제의 아내이지만 동시에 성공회 신자이다.

내가 성공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성공회 신자라는 걸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데.

주교라는 인간이 그딴 식으로 행동한다는 게 참 한심했다.

조직은 남편을 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벌금은 니가 니 돈으로 내.

너의 주교가 그딴 식으로 넘어갔다고 니 죄가 사해지는 건 아니니까.

 

남편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편의 두번째 실수였다. 

그 때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고 b본부장이라는 사람의 말을 들었다.

우리마을 직원 중에 갑자기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유산 중 일부를 직원들의 서유럽여행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했다.

b본부장은 그 기금 중 남편 몫을 떼어서 음주운전 벌금을 냈다.

그리고 1년 후, 인사이동에 불만을 품은 b본부장은 투서를 한다.

투서내용은 세가지.

1. 음주운전

2. 공금횡령

3.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결정으로 우리마을에 해를 끼침

 

그게 2013년 7~8월 즈음의 일, 그리고 2013년 10월 1일에 남편은 대기발령을 받는다.

남편은 내게 참 많은 거짓말을 했다.

특히 음주운전 벌금의 경우, 일시불로 빌려서 내고 자기가 매달 조금씩 갚아가고 있다 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거지.

10월 1일의 전화를 받고 투서내용을 확인한 후 

적금을 깨서 음주운전 벌금 만큼을 유산받은 이에게 돌려주었다.

2번과 3번은 사실과 달랐다. 유산받은 이는 남편과 함께 서유럽여행을 가고 싶어했고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그 경비를 남편이 내면 되는 거였기에 공금횡령은 명백히 아니다.

공금횡령이 아니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돈을 전화를 받은 그 날 갚았다.

3번의 우리마을에 끼친 해악, 부분은 주관적이었다. 

3천만원 정도 되었던 콩나물매출을 남편은 2억 가까이 끌어올렸다.

남편은 여러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중 어떤 사업은 성과를 남겼고 어떤 사업은 손해를 끼쳤다.

그 중 일부의 손해만을 가지고 3번의 책임을 묻기에는 성공회 교단도 염치는 있었겠지.

 

문제는 1번이었다. 1번은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2012년 그 때, 내 말대로 벌금을 내고 자진해서 정직이라도 받았어야 했어.

나는 그러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때 그렇게 어깨 툭툭 치고 넘어갔던 일을 한 해가 지난 후, 댓가를 치렀다.

내 말대로 정당한 댓가를 치렀다면 떳떳했을 일을 그렇게 오명을 뒤집어쓰고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음주운전과 관련해서는 지금도  의혹이 있다.

2012년 음주운전 벌금고지서를 받고 내내 나는 궁금했다. 

온수리에서는 음주측정을 안하는데 어떻게 음주운전으로 처벌을 받게되었는지

그건 정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2013년 10월 이후 쏟아지는 소문과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우리마을 원장 사모의 자리에서 불쌍한 또라이로 전락하자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놓고 내 인사를 안받았지만

나를 멀게 느끼던 사람들이 다가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2012년의 음주운전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알려져있다 한다.

1. 남편이 온수리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운전해서 집에 가다가

홈마트 지난 사거리에 주차되어있던 정육점 차를 박고 그냥 도망갔다.

2. 뺑소니사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집에서 자고있는 남편을 연행했다.

3. 성공회온수리교회 김00 시의원이 영향력을 발휘해서 풀려났다. 

 

그러니까 2012년 가을부터 온 동네에는 그런 소문이  퍼져있었던 거다.

나와 남편만 그 소문을 몰랐다. 소름끼쳤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다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남편도 놀랐다.

남편이 말해준 건 이거다.

1. 온수리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운전해서 집에 돌아와서 자고 있었다.

2. 경찰이 음주운전 신고를 받고 왔다며 연행해갔다.

3. 경찰서에 가서 음주측정을 하고 면허취소 및 벌금 330만원 책정.

 

온수리에서는 음주측정을 안하는데 왜 음주운전에 걸렸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제사 풀렸다.

쟁점은 단순음주운전이냐, 뺑소니냐인데 거기에 대해서 경찰기록을 다시  확인해서

성공회 교단에 제출했다.

투서에는 소문대로 내용이 적혀있었고(그러니까 뺑소니범으로)

교단 관계자는 무고죄로 고소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남편은 됐다 했다 한다.  무고죄로 고소를 했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남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남편에게 심정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관계는 성공회 교단에게 확인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뺑소니범이라는 오명은, 그 소문은 지금도 온수리 사람들에게 다 퍼져있을 것이다.

투서를 쓴 b본부장, 그리고 b본부장과 같이 투서를 작성한 김** 신부를

무고죄로 고소했어야 했다. 

나는 지금도 그러고 싶다.

왜냐하면 내 아이들의 아빠가 뺑소니범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게 너무 싫기 때문이다.

 

내게 2012년의 소문을 알려준 이(편의상 D라고 하자)에게 나는 아니라고 했다.

나:아니예요. 제가 벌금을 냈어요. 만약에 뺑소니를 쳤다면 죄도 죄지만

손해배상이 당연히 있을텐데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D는 내게 이렇게 반론했다.

D:그렇다면 사모님! 온수리 시내에서 사모님네 집까지는 대리도 안가는 거리예요.

온수리 사람들 다 그렇게 운전해서 다녀요. 다 하는 음주운전인데 왜 신부님만 걸렸어요?"

나:제가 듣기로는 우체국 맞은편 수퍼 할머니가 신고했대요.

D:말도 안돼요. 그 할머니는 치매끼가 있어서 차번호 보고 외울 정신도 없고

그럴 능력도 안돼요.

 

경찰서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결과가 그렇다는 내 말을 듣고 D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 것일 확률이 커요.

그 할머니는 정말 능력이 안돼요"

 

이건 정말 <이끼>다. 멍청한 남편은 세상 다 얻은 줄 착각하고 교만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은 다큐멘터리를 찍어보자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남편은 말렸다.

"우린 천주교같은 큰 교단이 아니라서 잘못하면 성공회 욕 먹어"

나는 그 후로 여러 버전으로 추리를 해보았다.

 

추리의 기반이 되는 사실

1. 온수리 유지 R과 김** 신부는 언니-동생 할만큼 친하다.

김** 신부는 남편과 사이가 안좋았고 결국은 우리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그만 뒀다.

R 또한 유지임을 알아봐주지않고 뻣뻣한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다

2. 음주운전 신고를 사주했다.

3. 교단에서 별 반응이 없었다.

4. 한 해 뒤, 인사이동에 불만을 품은 b본부장이 김**신부를 찾아온다.

이 때까지는 투서가 없었다.

5. 김**신부는 b본부장에게 문서를 작성하라고 해서 투서화한다.

 

궁금증

1. 음주운전 사주는 누가 했을까? 나는 R의 측근일 거라고 생각한다.

2. b본부장의 불만을 투서화하는 데 김**신부만이 관여했을까.

 

 성공회 사제들은 새로운 임지로 발령받는 순간, 전임지와의 모든 인연을 끊는 게 철칙이다.

  그런데 김**신부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관여했음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2013년 10월 1일, 남편이 대기발령 소식을 전하며 만나자고 했을 때

  온수리 어느 찻집에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방송국에 투서 안한 걸 다행으로 여겨.

    교단에서는 당신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교단을 지키는 게 당연하다고 봐.

    대기발령은 불가피한 것같다. 

    만약에 징계의 수위가 낮으면 그 사람이 이번엔 방송국으로 투서를 보낼 수도 있잖아

    그러면 성공회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교단은 교단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감봉 정도의 징계를 거론하던 교단이 갑자기 대기발령을 내린 것에 대해서 

남편은 충격을 받은 듯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었다.

나는 교단을 믿었다. 나는 성공회를 사랑했다. 지금도 나는 성공회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후의 조처들이 정말 이상했다.

주교는 사회복지 경험이 전혀 없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자신의 비서를 우리마을로 보냈다.

그리고 전임지에 관여한 김** 신부에게는 아무런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

처음 남편의 징계를 조직적으로 정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그 후의 상황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동안 성공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그 때 나의 판단은 너무나 순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리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해지느냐 아니냐는

교단 지도자들의 정치력에 의해 판가름날 것이다.

다만 성공회 교단이 내가 믿는만큼 정당한 조직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다시,  'b본부장의 불만을 투서화하는 데 김**신부만이 관여했을까'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가진다.

남편은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가진 게 없어서일 거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일 수 있는 것은 잃을 건 쇠사슬 뿐이니까,

라는 말을 남편을 보며 떠올린다.

남편은 교단 내에서 투사였으며 선배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불의한 일이면 나섰다.

그래서 적도 많았는데 남편을 제거한 후(교단을 박차고 나올 때 더 의연하게 나왔어야 했어....)

주교의 전횡은 나날이 횡포해져갔고

맘에 안드는 신부들은 발령으로 보복당했다.

현 주교 하에서 면직 사제가 가장 많을걸 아마.

남편에게 "지금 주교 하에서 면직당한 사람들끼리 모임 가져봐~" 

라고 할 만큼 면직이 많았다.

그리고 주교는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발령을 아예 안냈다.

 'b본부장의 불만을 투서화하는 데 김**신부만이 관여했을까'에 대해서

여러 버전으로 추리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후에 벌어지는 상황들 때문이다.

 

내가 지금 주교가 정말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고 내가 존경하는 신부님들을 함부로 모욕해서이다.

우리 신부님들을 발령을 빌미로 초라하게 만들었다.

탐욕스럽고 천박한 인간이 조직의 리더가 되면

조직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를 그 사람 덕분에 보게 된 것같다.

그는 나를 존중했다.

왜냐하면 그가 CBS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첫회 방송에서 내가 초대손님이었거든.

그는 참 진행을 못했고

나는 그보다는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진행을 잘 못하는 그를 잘 이끌었다.

나는 그 사람이 참 싫었다.

결혼한다고 인사하러 갈 때 그는 교무부장인가 그랬는데

그때부터 싫었다.

그는 남편에게

"가난한 사람들한테만 신경쓰지 마. 부자들에게도 사제의 손길이 필요해"

라고 말하며 빈민사목하는 남편을 이기적인 사람인양 책망하는데 참 재수없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몸 안에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이 사람은 가까이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느낌의 빨간 불.

현직주교는 첫 만남 때부터 그랬다. 

......

주교를 생각하게 되면 창작의욕이 강렬하게 타오른다.

어제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말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섭외가 절반을 차지할만큼 중요한데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섭외하지 않아.

 고발을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지. 

그래서 두번째로 어려운 점이 취재방해야"

 

 

3.

이 글의 제목이 또라이지.

또라이라는 단어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또라이적인 면모로 마구마구 쓰고 있다.

나는 어제 또라이라는 말을 두 번 들었다.

어제 네 명의 학생들을 처음 만나서

수업을 하다가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밖에 몰랐거든.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어" 하니

한 학생이

"선생님, 또라이였네요" 했다.

"맞아 나 또라이였어."

지금도 나 동네에선 개또라이 취급받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애한테 듣는 또라이라는 말은 나를 기분좋게 만들었다.

그 애는 못 배웠고 적극적이었고 어떻게든 내게 호응하고 싶어했다.

그저 소년원같은 데 있던 애들이라는 말만 듣고 가서

아이들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어디서 왔어?

집은 어디야?

이런 얘기를 해가다가 나중에야 알았다.

이 아이들은 모두 고아였다.

미혼모가 낳고 수녀들이 키운 아이.

그 중 한 아이만 엄마의 얼굴을 아는데 

엄마가 시립병원에 왔다가 아이를 두고 떠났다 한다.

사전에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게 좋았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그저

그래서, 너 지금은 어디있는데?

거기가 뭐하는 곳인데?

너는 거기 왜 있는데?

이런 질문들 끝에

상습절도로 재판을 받고 보호치료시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는 뭘 훔치니?

했더니 마트에서 여러 번 여러 물건을 훔쳤는데

수녀님들이 더이상 막아주지 못해서 서울까지 왔다고 했다.

영화 보면 cctv같은 거 보면서 조심하고 그러던데 너는 안 그랬어?

(이 물음을 하다가 '어어어....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좀 혼란스러웠음)

그렇게 물었더니 "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했다.

 

남편도 부모가 없긴 하지만 10대 후반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고

이 아이들은 부모라는 존재를 모른 채로 18살이 된 거다.

2005년에 게이를 처음 만나고 당황해서 보던 만화책을 가지라고 줬던 것처럼

나는 어제 당황했다.

나는 고아들을 생전 처음 만나본 거다.

그냥 아이들이 내 말을 잘 들어줬고

네이버에 내 이름 나온다고 "네이버에 프로필 나오는 사람 처음 만나봐요" 하길래

야, 네이버에 너 이름도 쳐보면 나와! 라고 말해줬을 뿐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 거다.

'아, 내가 고아들을 정말 생전 처음 만나본거구나'

한달동안 여덟번의 수업.

나랑 만나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 (863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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