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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

1. 10월 27일 구로

상영회가 있었다.
상영이 끝나고 전철역까지 걸어가는데
걷다보니 그 거리는 20대를 보낸 곳.
집에서 늘 버스로 구로디지털단지 전철역까지 갔고 신촌이든 어디든 2호선을 타고 다녔다.
23살부터 서른까지 그 곳에서 보낸 시간들.

2. 10월 29일 제주
 참 이상하게도 시간의 블랙홀처럼
제주행은 늘 아슬아슬하다.
한별이 아기 때 
전국으로 강의를 다닐 때가 있었다.
늘 한별을 업고 다녔는데
많은 짐과 아기 덕분에
걸음이 느려
아무리 서둘러도 탑승마감 시간에 비행기를 타곤 했다.

오늘 11:20분행 비행기.
아침 7시에 일어나 강의자료들을 최종점검하고
두 개의 USB에 카피를 했다.
경기 복지관에 원고를 보내고
밥을 먹고 짐을 챙기니 8시 30분.
그 때 일찌감치 집을 나갔어야 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한 권 챙겼는데
(통풍때문에 해고당한 보디가드가 주인공)
가는동안 다 읽을 것같아서
휴대전화에 <아수라>를 담아가기로 했다.
맥북이 아이폰을 인식 못해서
IOS를 업그레이드했는데
그래도 인식불가 메시지가 뜨길래 포기.
아이패드에 담으려는데
역시나 업그레이드가 필요했고
또 그렇게 시간을 보냈으나 결국 실패.
그러고나니 9:50분.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11:00까지는 탑승수속을 완료해야하는데
개화역 도착예정시간이 10시 52분.
레이싱에 가까운 운전으로 10:36분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력질주를 했으나
바로 앞에서 기차를 놓침.
다음 기차가 무려 9분 후에 출발!!!
마음 졸이며 제주항공에 문의를 하니
11시까지 탑승수속을 완료하지 않으면
비행기에 탈 수 없다 함.
10:54분에 김포공항역에 도착해서
죽어라 뜀.
제주항공 카운터에 10:59분 도착.

그런데 가방 안에
한약 두 팩과 가위가 있어서 물어보니
한약은 괜찮은데 가위는 검색대에서 압수된다고.
그래서 가방을 짐으로 부쳤다.

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내 걱정은
가방 지퍼를 안 잠가서
짐을 싣고 내리고 하는 동안
내 소지품들이 다 쏟아질 것같다는 걱정.

3.
대학동창이 페북에다가 대학시절 사진들을 올리고 있다. 나는 주로 없다. 입학식에도 안갔고 졸업여행도 안갔다. 졸업여행은 안 간 게 맞지만 입학식은 못갔다. 이렇게 헐레벌떡 뛰고난 다음엔 늘 자책에 빠지는데 헐레벌떡은 내 인생의 키워드인 듯.

학력고사를 보는데 아침에 차 막힌다고 하루 전날 고대 앞 언니 선배네 자취방에서 자기로 했다. 추울까봐 보자기에 싼 이불을 들고, 이불이 무거워서 택시를 타고 고대 정문에서 내려 정대후문까지 걸어갔었다. 어둠 속 시계탑은 무척 인상적이었음.

근데 시험날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음.
언니도 나도.
그래서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내가 시험을 봐야할 서관입구는
사람 한 명만 들어갈 길만 남겨두고
사람들로 벽이 만들어져있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 오솔길을 뛰어들어감.

바로 얼마 후 면접이었다.(바로 다음날이었나...)
면접보러 가야하는데
엄마가 세탁소에서 옷을 찾아오라 했다.
옷 찾고 학교에 갔는데
시험을 봤던 계단식 강의실에 갔더니
1번부터 스무명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내 수험번호는 22번이었는데
결시가 있어서 나까지가 스무명.
깜짝 놀라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면접보러 갔다고....ㅜㅜ
다행히 진행하는 사람이 데려다줘서
면접은 무사히 보았음.

입학식은 언니랑 함께 갔는데 
언니는
같은 대학 같은 단과대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언니는
길치였다.

게다가 그 해에는 특별히
고대 녹지캠퍼스에서 입학식을 했기 때문에
해마다 운동장 입학식만 봐왔던 언니는
엄청 헤매더니
(따라다니는 나도 헤맬 수밖에)
물어물어 겨우 녹지캠퍼스로 올라가고 있는데
이미 입학식을 끝낸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음.

어쨌든 시험에 늦고
면접에 늦은 덕분에
우리 과 동기들에게 
나는 깊은 인상을 남김.
헐레벌떡은
그때부터
내 인생의 키워드가 된 듯.

4.
수학여행 다녀온 한별이가
"엄마, 수학여행 자료집 보고
창밖 풍경 한 번 봤더니
제주에 도착해있었어"
라고 어제 말해줌.
곧 도착하겠지.

내 가방아
내 물건들아
제발 잘 있으렴.

내 다이어리.
내 자동차 열쇠.
내 립크림.
얼마 전에 새로 산 에어쿠션.
내 한약.
내 가위.
내 이어폰.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암튼 모두들 지금 이 비행기를 
같이 타고 있기를.
부탁해요 여러분...

5.
내 옆의 중년부부는 참 다정해보임.
내 옆에 남편, 그 옆 창가에 아내.
둘이서 제주도에 언제 갔었는지
기억을 더듬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수다.
아저씨 손톱에 기름때가 까맣다.

무료 서비스말고
카트가 왔는데
아주머니는 주스를 마시고 싶다.
주스는 원래 3천원에 두 개인데
행사기간이라 세개라고 함.
그런데 3천원은 없고
만원을 내고 사고 싶지만
승무원들에게는 또 잔돈이 없다.

신용카드로 구매가능하다고 하자
아저씨가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는데
"손님, 체크카드 아니고 신용카드 맞습니까?
체크카드는 안됩니다"
하니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결국 쇼핑을 포기한다.
물이라도 드시겠습니까?
하고 물 한 잔을 받아 마시는데 
나도 물 한 잔 달라고 해서 마셨다.

가방에 돈 있는데.
돈 많이 담아왔는데.
지폐들아... 너희도 잘 있어야한다.

하은이가 면세점에서 사라고한
초컬릿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김포에서는 시간이 없어 쇼핑은 실패했고
제주에서는 부디 그 초컬릿을  살 수 있기를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앨리스? 에이스? 
뭐였을까....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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