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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영화들

몇 편은 극장에서, 대부분은 비디오룸에서 봤다.

 

<추방자> 캄보디아 디아스포라

<올드 마린보이> 북에서 온 아버지

<드림박스> 동물들.

<라이프 이미테이션> 게임과 현실의 교차, 양성애자. 연애의 고통

<로드쇼> 동행취재, 사진을 찍는 나의 자리, 나의 관점

<태양의 도시> 폐광도시. 아이들의 성장

<아킴을 위하여> 흑인 청소년들

<당신들의 천국> 난민, 학교, 극+다큐

<침묵과의 조우> 일본, 고독사

<베트남 장미의 일기> film footage, 여자 배우

<어느날 갑자기> 아이슬란드 살인사건

<아비쿠스> 후프드림즈 감독. 인종차별

<가족사진> 필리핀, 이주 노동

<24번가> 도시개발, 불법 점유, 천막 철거

<생활보호 받는 락커> 젊은 시절 반전 락커, 마약 소지, 카마가사키 겨울투쟁 마지막 공연

<바르팍> 네팔 대지진, 전통적 춤과 노래,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바르팍

<멀리있는 집> 2개의 여권, 중화민국과 타이완, 벨기에 도피유학

<내일이 아니면 언제> 내전때문에 이주. 두고온 집에 소 가지러 가기

<접속>아빠

<여자답게 사워라> 주짓수

<보이후드> 양궁소년들

<남자 화장> 글렘 록

<버블 패밀리> 부동산 개발, 중산층

그리고 

<성찬식>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기를 참 잘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내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를 만들기 전의 나는 

<성찬식>의 안나 자메츠카감독처럼

자폐성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극영화처럼 정교하게 현실의 조각을 모으던 사람이었다.

생애 두 번째 영화 <친구>를 보고서

어떤 감독이 "촬영은 누가 했어요?"라고 물어서

내가 했다니 깜짝 놀랐다.

원하는 화면을 담기 위한 감독으로서의 욕망이 극대화되었던 시절.

그 영화를 끝으로 나는 집안일을 하느라 들지 못한 카메라를

삼각대에 얹어두거나 

일하다가 서둘러 몇 컷찍고 다시 집안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영상언어고 뭐고 스타일이고 뭐고

다 망가진 채 16년을 보내고나니

이제 카메라 드는 일도 무섭다.

 

<성찬식>을 보는데

나는 내내 내가 두고온 현장이 그리웠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내 삶만이 유일한 현장이 되어버린 지금

집에선 좀 쉬고

현장에서는 열심히 촬영하는 그런 감독이 되고 싶었다.

 

돌아가야지, 어떻게든.

일단 내년에는 교육을 좀 줄이고

생활을 좀 구획하며 살아가야겠다.

들어오는 교육 다 받지 말자.

 

이제 10월, 숨막힌다.

올 한 해, 돈을 벌기 위해서 들어오는 일은 뭐든 다 했다.

가장 압권은 영화제 가이드와 '노동의 종말과 기본소득'에 대한 강의.

나는 나도 잘 모르는 강의를 맡고서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다.

4차산업혁명과 제레미 리프킨을 읽고

예전에 녹색당에서 받았던 자료들을 뒤적였다.

 

내일도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을 강의해야한다.

어제밤부터 공부를 하는데 머리가 잘 안돌아가고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 이런 짓은 그만 해야겠어.

 

추석 전에 8, 9월에 진행했던 일들의 댓가,

그러니까 강사료, 원고료, 활동비 등등이 한 번에 들어와서 

갑자기 통장에 천만원이 생겼다.

늘 쪼들리는 남편에게 7백만원을 보내고

잠깐 흐뭇한 후

나는 아팠다.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으면서

아이들의 걱정스런 포옹과 뽀뽀를 받으면서

생각했다.

전력질주한 한 달 반 동안의

내 몸값, 내 기력 값이 천만원이라면 

너무 싸잖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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