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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MBC 50일 파업, 그 후 20년 ... 무슨 일이 일어났나?

1992년 9월 MBC 50일 파업, 그 후 20년 ... 무슨 일이 일어났나?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45호
2012년 9월 <이달의 역사> 기고글

 

 

노동자들의 파업이 대중의 일상을 파고드는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방송사의 파업이 아닌가 싶다. 2012년 들어 무려 6개월간 <무한도전>을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계속되어 온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가 공영방송의 제작 자율성 침해로 심화되면서 상반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언론사들의 대규모 파업에는 MBC, KBS, YTN, 연합뉴스, 국민일보의 5개 언론사가 참여하였는데, 그러한 흐름을 주도한 것이 MBC 노조의 파업이었다. 그리고 이번 파업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20년 전 MBC 노동조합의 50일 파업투쟁을 떠올렸다.


1992년 9월 MBC 파업은 여러 면에서 20년이 지난 올해 파업투쟁과 닮아 있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 정부와 여당의 방송 장악을 위한 시도에 맞선 파업이었다는 점, 다수의 해고, 징계가 발생하였다는 점, 노동자들의 파업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1992년 당시 파업의 결과로 최창봉 사장이 물러나고 제작 3국장 추천제와 관련한 노동조합의 요구안 또한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된 것에 비해 2012년 파업의 결과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2012년 9월 현재 KBS 김인규 사장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MBC 김재철 사장도 현재 방송문화진흥회에 해임안이 제출된 상태이지만, 정부-여당측 이사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임안 처리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1992년 MBC 파업의 배경에는 1990년 초 3당 합당 이후 본격화된 정부와 여당의 방송장악 시도가 있었다. 1990년 6월부터 MBC 사측은 공정방송협의회 개최를 거부했고, 방송제작에 대한 개입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처남인 손주환이 공보처 장관에 취임하면서 최창봉 사장을 통한 통제가 시도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로 농촌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우려를 담은 <PD수첩>의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편이 예고편까지 방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창봉 사장의 지시로 결방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담당 PD들과 노동조합 간부들이 사장실을 방문해 항의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문제삼아 안성일 노조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을 해고하였다.


더구나 1992년 4월부터 시작된 MBC 임금단체협상에서는 사측이 지난 1988-89년 투쟁의 결과로 단협에 명기된 보도-편성-기술국장 등 제작 3국장 3배수 추천제를 백지화 하겠다고 선언하여 파업투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노동조합 길들이기를 통해 선거보도를 장악하겠다는 정권과 사측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에 1992년 9월 2일 MBC 노동조합은 해고자 2인의 복직, 제작 3국장에 대한 3배수 추천제 재협상, 회사측의 일방적 임금인상 철회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결의하였다. 곧이어 조합원 500여명이 파업 출정식을 갖고 본관 로비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였으며, 19개 중 11개 지방방송이 연대파업에 돌입하였다. 1990년 5월에 공영방송 최초로 방송 민주화를 내건 파업투쟁을 진행한 바 있던 KBS 노동조합도 연대파업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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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9월 파업투쟁 당시 농성중인 조합원들 (출처: MBC 노동조합)


파업의 핵심 요구였던 제작 3국장 추천제를 둘러싸고 서울 지방노동위원회는 사장 임명제라는 안을 들고 직권중재에 들어갔으나 노동조합은 이를 거부하였다. 머지않아 MBC 사측은 이완기 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을 비롯한 15명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방송문화진흥회는 노조의 직장복귀 촉구 결의문을 발표했고, 정부는 공권력 투입 방침을 시사했다. 손주환 공보처장관도 MBC 파업을 '불법파업'으로 규정하는 성명을 냈다. 당시 투쟁이 진행중이었던 한국중공업, 현대미포조선에 대한 탄압 일변도의 정부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대응이었다.


파업 31일차였던 10월 2일에는 공권력이 투입되어 농성중이던 조합원들이 전원 연행되며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MBC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파업을 계속하였다. 이에 사측은 PD수첩을 비롯한 14개 프로그램을 잠정 폐지하는 대응을 통해 파업 장기화를 시사하였으나,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연대와 지지가 정부와 사측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범국민대책위원회의 지원이 계속되었고, 언론노련 또한 ‘문화방송 파업 지지 및 공정방송쟁취를 위한 전국언론인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노협은 MBC 파업을 지지하는 전국 노조 대표자 결의대회를 소집하였다.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던 것은 KBS 노동조합이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동조파업 찬반투표를 가결시켰던 일이었다. 결국 파업 50일차인 10월 21일 MBC 최창봉 사장과 노동조합 비상대책위원회 측이 협상을 통해 합의에 이르며 파업이 마무리되었다. 기존 단협의 3국장 추천제는 삭제되었지만, 단협상의 공정방송협의회 관련 조항에 3국장 보직변경 의결권을 명시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도록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후 사회적인 압력 속에서 최창봉 사장이 퇴진하였다.


이로부터 지난 2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2년 7월 8일 언론노조 KBS본부는 95일간의 파업을 마무리지었고, 열흘 뒤에는 언론노조 MBC본부도 파업을 잠정 중단하고 170일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그러나 핵심 요구였던 KBS의 김인규 사장 퇴진과 MBC의 김재철 사장 퇴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더구나 파업 종결 후에도 양대 공영방송 사측은 파업 지도부와 참여자들에게 징계를 남발하고 있다. 더구나 KBS 이사회와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에 친정권 이사들이 선임되면서 그나마의 파업 성과마저 흔들리고 있다.


지난 20년간 변치 않은 것은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와 공영방송 사측의 제작 자율성 침해의 양상만이 아니다. 언론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한 노동운동의 연대와 대중적인 지지가 변함없음에도 오늘날의 공영방송 공공성 투쟁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에는 언론노조운동의 쇄신이 지체된 것 또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방송사의 ‘핵심’을 이루며 상대적으로 내부노동시장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기자와 PD들이 언론노조운동의 중심을 이루면서 기업별 노조운동 관행을 넘어서는 데 한계를 보였고, 더욱 확대되어만 가는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1992년 9월의 파업투쟁을 되돌아보면 외주보다는 자체제작 중심의 방송제작 관행, 공중파 중심의 방송시장에서 상대적 비중이 컸던 공영방송의 지위라는 환경은 물론 기술직까지도 폭넓게 파업에 참여하였다는 점이 파업투쟁의 영향력을 강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방송제작 외주화와 방송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포함한 방송산업 차원의 노동자 내적 연대 강화 없이는 이번 파업 성과의 완성을 위한 투쟁은 물론 다시금 찾아올 방송 공정성 확보 투쟁에서 더욱 수세를 면치 못할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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