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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13
    기억에 관한 짧은 생각
    나르맹
  2. 2007/11/13
    삐아제이론과 교육의 개념
    나르맹
  3. 2007/11/13
    반듀라 사회학습이론 성찰일지
    나르맹
  4. 2007/11/04
    펌/UCC의 감동, 원더걸스를 넘어서자
    나르맹
  5. 2007/03/25
    제4장 교육의 역할 : 의사소통과 경험의 성장
    나르맹
  6. 2007/03/24
    제3장 평생학습 : 학습의 생명력
    나르맹
  7. 2007/03/24
    교사의 역할?
    나르맹
  8. 2007/03/24
    지금 나의 삶에서의 교육, 학습, 메타학습
    나르맹

기억에 관한 짧은 생각

* 정보처리이론에서 정의하는 학습 혹은 교육
“학습자 외부로부터 정보(자극)를 획득하여 저장하는 과정”(127쪽),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학습한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새로운 지식)이 관련이 있는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홈구멍에 채워지거나 관련을 짓게 됨으로써 새로이 변형된 쉐마(schema)를 갖는 경우를 의미한다”(133쪽), “쉐마의 재구성 과정”(134쪽)

* 학습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인 후에 더 나아가 교육을 “다양한 스키마를 갖게 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맥락상 타당한 것일까? 여기서의 스키마는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말 그대로 정보처리과정으로서의 기억에 한정된 느낌.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각은 사물들에 대한 내 가능적 행동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신경계가 발달할수록 뉴런들의 수와 조합가능성을 더욱 증가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더욱 넓아진다. 따라서 지각도 풍부(다양)해지는데 결국 ‘기억’은 단순히 암기력의 차원이 아니라 행동양식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정보처리이론은 학습자의 능동성, 인식과정에서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분명 행동주의와는 대립지점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론이 학습전략으로 적용되면서 결과적으로 단기/장기 기억력을 높이기 위한 단지 하나의 툴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기억을 몸을 구성하는 일종의 정체성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두뇌에서 일어나는 기억력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
요즘 내가 좋아하게 된 소설가 김연수가 다음처럼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의 현실은 “이제 불안을 갈구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내면적 안전보장의 시대. 다들 더 높이 오르려고 하기보다는 다만 전락하지 않으려는 시대”라고. 그렇다면 정녕 불안이라는 가치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어떤 스키마가 필요한 것인가, 우문을 던져본다. 그런데 한 개인의 가치관을 담아내기에는 정작 정보처리이론에서 말하는 스키마라는 개념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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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아제이론과 교육의 개념

Piaget 이론의 세 가지 중요한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식은 환경 내에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개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둘째, 지식의 발달은 이전의 인지구조로부터 새로운 인지구조를 건설하는 과정에 기초하며, 새로운 구조들은 환경에 지적능력이 적응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셋째, 인지발달에 영향을 주는 근본 요소는 물리적 환경, 사회적 환경, 성숙, 평형화이며 이 중 평형화는 학습자의 자기조절과 자기수정 과정이다(교재 159쪽 참고).

Piaget 이론에 근거하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모든 인간은 학습자가 된다. 여기서 유기체란 신경계를 가지고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 세계와 직면하여 자극을 수용하고 이에 따른 반응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때 종들의 진화 수준 혹은 우열성 여부는 신경계의 복잡성, 자극과 반응 사이의 텀 그리고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 양식의 다양성 등을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Piaget 이론에서 인간을 단순히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진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 이후로 서양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였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해지며 따라서 인간 학습에 대한 근본 가정 자체도 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학습 더 나아가 교육을 규정함에 있어 더 이상 보편타당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벗어나서, 개인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정체성들이 경합하는 과정으로 학습을 규정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극단으로 밀고 가면 지식의 선지자로서의 교사라는 전통적인 규정 역시 해체가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Piaget 이론에서 학습은 ‘정상적인’ 유기체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학습자의 자극을 촉진하는 존재가 꼭 교사로 한정될 필요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Piaget 이론이 교육을 고민하는 데 시사하는 바는 이성 중심, 지식 중심으로 학습을 규정짓는 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는 데 있다. 특히나 근대적 교과지식의 학습과 이로 인한 안목의 형성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는 교육철학․교육과정학자들의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생리학적 접근에서 출발하는 Piaget 이론을 바탕으로 도출될 수 있는 교육의 개념은 결국 ‘삶의 방식의 변화로서의 학습’이며 이는 현재적 삶과 괴리되어 추상화된 지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교과교육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에서는 단순히 Piaget 이론만을 충실하게 적용한다고 해서 뭇 사람들이 말하는 교육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지 발달의 과정이 동화․조절․평형화라는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되었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인지 발달의 과정을 추동하는 자극은 어떤 기준으로 교육적 정당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사(성인/정상인/국가)중심적 교육과정으로 인한 자극의 편파성을 문제삼는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 반대의 주장은 아이들을 말 그대로 ‘방목’해야 하는 것일까?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초적 쾌락에 대한 유혹은 연령․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학습의 저해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자극과 반응이 동시적인 유기체는 아메바인데 인간은 아메바가 되기에는 머리가 너무 커버린 존재들이지 않나. 자극과 반응 사이에 텀을 둘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반응 양식을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학습에 있어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나와 너, 나와 그것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합하는 과정 속에서 학습의 의미를 찾는다고 했을 때 인간(배우는자)의 자율성은 어느 누구도 군림하지 않는 의사소통의 관계에서 출발할 수 있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유의미한 자극을 주고받으며 양자 모두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교육적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구속하는 뜨거운(hot) 관계도 아니고, 쿨(cool)함이라는 명목 아래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행사하는 ‘방목’도 아닌 그 사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래서 관계를 고민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특히나 요즘 나에게는 더욱더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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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듀라 사회학습이론 성찰일지

 

Bandura의 사회학습이론은 한 개인의 행동의 층위를 개인과 환경으로 이론적 분리를 시도한 후 한 쪽에 강조점을 두는 ‘행동주의자’나 ‘인간중심주의자’들과는 달리 환경, 개인 내적 요인과 행동이 서로 맞물려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가정을 하였다. 이 이론에서 학습과정은 학습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일련의 인지적 과정이며 행동의 언어적․시각적 부호 획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교재 213-215쪽 中) 그리고 학습의 과정에서 관찰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발을 딛는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실체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 관계적 자아로 살아가게 된다. ‘나’라는 정체성은 결국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상대적인 측면을 띌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정 부분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함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좋아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물론 좋아하지 않더라고 상호간의 관계가 시작되면 밉든 곱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될 수밖에 없다. 마치 폭력을 휘두르는 공권력과 이에 동일하게 폭력으로 대응하게 되는 일부 시위대의 관계처럼.


관찰학습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일종의 자기효능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결코 아무나 관찰하고 아무나 모방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이 가는 대상, 더 나아가 나로 하여금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들게끔 하는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동일시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유의미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관찰 그리고 모방, 이 과정이 ‘학습’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그런데, 내가 요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무엇(누구)일까.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는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생각이 번뜩 스쳐간다.


한국에서 학교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어떤 모델을 관찰하고 모방하게 되는가. 바람직한 모델에 관한 논의가 곧 교육과정논의와 결부되는 것이라면, ‘자신을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존재로 묘사되는 이순신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회자되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긴 한 것 같다. 혹은 고액권 지폐의 인물에 ‘남편에 순종하고 자식들에게 인자한’ 신사임당이 선정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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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UCC의 감동, 원더걸스를 넘어서자

UCC의 감동, 원더걸스를 넘어서자

글쓴이 : 바리  

원더걸스의 ‘텔미’를 재연한 UCC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선유도 공원에 다녀왔다. 기분이 좋아 뛰어다니는 아이를 카메라로 찍었다. 사진과 동영상을 총동원하여 앞에서도 찍고 뒤에서도 여러 장 찍었다. 나뿐 아니라 공원 여기저기가 카메라를 찍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의자에 비스듬히 눕거나 연인과 포즈를 취한 ‘설정샷’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퍼진 풍경이다. 이렇게 찍힌 사진들은 오늘이나 내일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올라갈 것이다. 나도 짬이 되는대로 이번 외출에 대해 포스팅을 할 것이다. 특히 동영상은 내가 좋아하는 소재이다. 글보다 쉽고, 그림보다 생생하고, 무엇보다 소박한 연출자가 되어 찍어 올리는 재미가 있다. 이른바 UCC다.


따지고 보면 이 재미는 PC통신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PC통신 동호회에 처음 글을 올리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전까지 내가 만든 창작물은 모두 ‘과제’를 위한 것들이었다. 독후감, 그림일기, 백일장 …. 일기나 편지 같은 자발적 창작물은 아주 은밀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글을 발표한 것이다! 너무나 감격해서 내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는지 조회수를 확인하곤 했었다.


감격은 나의 것만이 아니었다. PC통신과 인터넷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오래도록 인류가 기다려 마지 않던 미디어라 할 만 했다. 공공 언론이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인쇄물 출판 자체가 철저하게 통제되었던 왕과 종교의 시대가 끝나가면서 ‘표현의 자유’가 선언된 것이 17세기였다. 그러나 4세기가 지나도록 표현의 자유는 형식적인 이름에 그쳐 있었다. 근대시민혁명 이후 부르주아가 언론과 출판 권력을 장악하였고 20세기 들어 대형 언론 기업이 등장하면서 언론 독점은 최고조에 달했다. 전세계 민중들의 비판이 거세지고 독립미디어에 대한 모색이 활발했던 그때, 컴퓨터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인터넷에 감동받다


애초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소소한 행정 서비스를 위해 사용되던 컴퓨터 네트워크에 민주주의 기획을 접목시킨 것은 대중 스스로였다. 1986년 프랑스 학생 운동가들은 미니텔을 사용하여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1993년에는 미국 산타모니카주의 활동가들이 지역 네트워크 PEN을 이용해 노숙인 편의시설의 확충을 요구하는 지역 주민과 노숙인의 주장(SWASHLOCK : Showers, WASHers, and LOCKers)을 시정부에 관철하는 데 성공하였다.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 농민혁명군 사빠띠스따가 인터넷에 신자유주의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국제연대를 호소한 것은 1996년이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시애틀 WTO 각료회의 반대 투쟁을 계기로 독립미디어센터(Indymedia center)가 설립되었다. 이무렵, 인터넷의, 인터넷에 의한 민주주의가 만개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가장 빛나는 성과는 대중 저널리즘의 등장이었다. 신문과 방송국을 넘어, 이제, 대중은 스스로 언론이 되었다. 이메일과 홈페이지,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 전세계를 상대로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직접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에 의한 인터넷 사용은 저널리즘 관행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언론인이며 저널리즘이 어디에서도 가능한” 형태로 저널리즘 관행을 확대[하였고] … [이러한] ‘대중적 글쓰기의 민주화’ … 과정은 의제설정과 의사결정자로서의 저널리즘 역할의 잠식을 가져오는 것 같다.
<얼터너티브 인터넷>
 
 

최근에는 특히 영상 매체의 발달로 다양한 대중 창작물이 쏟아지고 있다. 텍스트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던 커뮤니케이션은, 영상물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즐거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성의 논리보다는 감성의 논리로 제작하고 접근할 수 있는 이미지와 동영상을, 대중은 특히 사랑하였다. 원소스의 의미를 비틀어 손쉽고도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는 패러디 문화를 사랑하였다. 대중적으로 창작될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UCC는 과거 어느 때보다 위력적인 대중적인 표현 매체이다.


대중 저널리즘의 의미는 단순히 대중이 직접 발화한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대중 창작물에는 위계적인 언론 권력에서는 볼 수 없는 민주적 문화가 깃들어 있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제시한다. 팔십 노인부터 초등학생까지 갖가지 의견을 올리고 토론한다. 신문과 방송을 장악했던 권위적 편집진과 엘리트가 네트워크에는 없다.


지배적 언론 기업은 객관적 저널리즘을 표방하면서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체제를 공고히 다지는 데 힘을 쏟아 왔다. 이들이 주도해 온 언론 환경에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대중이 각자 자기 관점과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그 자체로 급진적인 것이었다. 2006년 8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폭격했을 때, 이제 우리에겐 CNN 뿐 아니라 블로그가 있었다. 레바논에 살고 있는 이들이 하루하루 올리는 경악과 공포에 찬 일상 이야기 속에서는, 절대 전쟁이 게임처럼 보이지 않는다.


1993년 웹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일반 대중이 월드와이드웹을 쓰게 된 이래로, 불과 십 여 년 만에 언론 환경이 일대 격변을 겪은 것이다.

2006년 7월 16일 레바논 폭격 당시 마젠 케르바즈의 블로그에 올라온 그림
“어떻게 하면 이 소리를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자본과 국가도 인상깊게 보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성은 사실상 시장성과 다른 말이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급진성으로부터 유래되었던지, 시장성이 확인된 순간 철저한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다. 반자본주의 코드조차 소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놀라운 능력은 체게바라 커피잔에서 만날 수 있다. 상품이 되는 순간, 정치성은 사라지고 가격만이 남는다.


인터넷에 대하여 자본이 관망하던 시기는 짧게 끝났다. 인터넷에는 충분히 막대한 자본이 투여되고 있고 그만큼 이윤을 낼 수 있는 구조로 재구조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대중이 일구어온 인터넷 점유는 자본의 재점유에 포섭되고 있다.


이때 기술은 정치적 과정을 위해서 선택되고 개발되고 사용되는 구성적 산물이다. 소위 ‘한국형 포털’의 득세를 보라. 한국형 포털은 분산형 월드와이드웹에서 놀랍도록 폐쇄적이다. 하이퍼텍스트를 넘나들며 서핑하는 네티즌을 자사의 사이트에 묶어놓기 위한 각종 기술과 인터페이스와 마케팅 기법이 동원되었고, 어느 정도 목표 달성에 성공한 듯 보인다. 한번 포털에 접속하면 메일, 카페, 블로그로부터 지식 검색, 뉴스 검색까지 원스탑으로 이루어지면서 네티즌의 클릭은 모두 광고수입의 원천이 된다.


서비스명

월 방문율

다음 한메일

68%

다음 카페

73.3%

싸이월드 미니홈피

69%

네이버 지식인

79.2%

네이버 블로그

84.5%

 

자료 : 코리안클릭 2007년 10월

우리나라 국민이 3회 이상 방문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나날이 줄어 지금은 15개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권력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1995년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설립한 후 인터넷을 규제하기 위해 이런저런 모색을 해온 국가 권력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7년 정보통신망법(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등에 관한 법률)과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통해 윤곽이 드러난 국가의 인터넷 규제 방향은 포털을 이용한 것이었다.


인터넷 실명제로 신원을 확인하고, 로그기록으로 각 이용자가 읽고 쓴 인터넷 활동을 추적한다. 이용자가 올린 글에 대해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사상 검증을 하고 명예훼손이라는 명분으로 기업 비판을 순화시킨다. 이 모든 것은 포털의 국가적 의무이고 따르지 않으면 처벌받거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포털에 가해지는 통제는 곧 대중에 대한 통제이다.


인터넷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인터넷 재구조화와 국가권력의 감시와 검열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터넷 이용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된다는 점에서 인터넷은 매스미디어에서보다 더욱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언론에 독자투고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까보일 필요는 없다. 물론 그보다 더한 편집 검열을 넘어야 하지만.)


특히 이들이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비판적인 발언들과, 초창기 인터넷에 넘쳐났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다. 심지어 선거 시기에도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인 후보자, 정당 비평이 단속되고 있다. 빛 좋은 ‘참여’가 인터넷에서는 개살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시장성 있는 정보에 대한 소비, 연예 오락 정보에 대한 열람과 재연은 권장되고 있다. 연예인의 활동, 사생활, 드라마와 영화, TV 오락프로그램에 대한 글, 이미지, 동영상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재일뿐더러 포털의 탑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포털의 탑에 노출된 연예 오락 정보는 대중의 호기심을 다시 자극하며 클릭을 유도한다.


연예 오락 정보의 만개


선거법의 규제로 위축된 네티즌의 UCC는 요즘 원더걸스라는 소녀그룹과 그들의 히트곡 <텔미>에서 꽃피고 있다. 텔미 뮤직비디오 원본 뿐 아니라 가요프로그램 출연 영상, 동료 연예인의 변주 영상도 크게 인기를 끌면서 이에 대한 감상과 화면 캡쳐가 블로그와 포털 갤러리에 넘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벤트로부터 시작된 듯한 텔미 댄스 따라하기 UCC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생, 남학생, 일반인 뿐 아니라 군인, 교통경찰이라는 특수 계층(?!) 네티즌까지 손수 제작한 댄스 UCC를 계속 올리고 있다.


텔미 UCC는 즐겁다. 나도 포털에 들어갔다가 학생들의 텔미 UCC를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수학여행 때 오랫동안 준비했던 장기자랑을 선보이듯, 그들은 친구들과 삼삼오오 호흡을 맞춰 춤을 추고, 그것을 찍고, 올리고, 댓글을 읽으면서 환호했을 것이다.


원더걸스 뿐만이 아니다. 포털에 들어갔다가 이쁘장한 연예인 사진이 뜨면 무의식 중에 클릭부터 하게 된다. 나와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연예인의 소식은 이웃사촌처럼 정답다. 특히 이용자가 직접 창작한 연예 오락 정보는 아마추어적이지만 매력적이다. 자발성이라는 명목으로 한번 걸러진 연예 오락 정보는 노골적인 장사치의 것보다 참신해 보이고, 지인에게서 듣는 입소문과 유사한 신뢰성을 갖는다. 포털은 떡볶이 가게 수다처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즐거우면 안 되는가?


하지만 정신없이 클릭하는 와중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연예 오락 정보는 철저한 상품이다. 네티즌의 소비는 설정된 것이다.


자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1970년대 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자본이 정보화 전략을 선택한 이유는, 시장을 확대하는 한편 비시장 영역을 전유하기 위해서였다. 금융의 세계화와 시장 개방을 위해 국제적인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추면서 동시에, 자본은 정보 상품을 발굴했다. 이를 위해 저작권이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유럽에서 18세기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저작권 체제는 1994년에 ‘세계무역기구의 무역관련 지적재산권 최종협약안’(WTO/TRIPs)이 성립되고, 이어서 1996년에는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저작권조약’과 ‘세계지적재산권기구 실연·음반조약'이 만들어지면서 마침내 전세계를 아우르는 국제협약으로 확립된다. 대중적인 소설, 음악, 영화 등 저작물에 대한 이용자의 향유와 개작이 저작권 체제 하에서 통제되기 시작했고 출판사, 음반사, 영화제작사 등 대형 저작인접권자들의 강력한 ‘불법복제 단속’으로 ‘저작권 괴담’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자본은 동시에 이 신흥 시장을 육성하고 소비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연예 오락 정보는 단순히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 문화 상품들과 저작물에 대한 소비로 반드시 연결된다. 소희를 좋아하면 소희가 노래하는 음반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소희가 등장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영화를 관람하고, 소희가 입은 옷을 입고 싶어진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저작권으로 어르고, 다른 쪽으로는 연예 오락 정보의 소비를 유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범람하는 연예 오락 정보 속에 모든 것이 연예 오락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즐거우면 장땡이다. 언젠가는 지나가는 유행가처럼 흘러가는 대중의 변덕을 붙잡기 위해 이미지로 어필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시장적 관계로 수렴된다. 정치조차도.


이미지만 남은 정치


현대는 이미지 정치의 시대이다. 여기에는 TV의 등장이 기여한 바가 크다. 멀리서만 바라보던 정치 엘리트와 대중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잘생기고 옷도 잘 입고 농담을 잘하는 정치인들이 유력인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정치과정의 이면은 추잡하기 이를 데 없다.


대중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정치는 정치인 개인의 외모, 캐릭터, 그리고 그 인물과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들의 집합이다. 정책과 이념, 그에 대한 토론보다, 정치인에 대한 시각적이고 극적인 사건이 부각된다. 노란 풍선과 청계천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대개 ‘설정’이다. 정치 정보가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락적으로 구성되고 정치인은 연예인화하고 있다. 대중은 정치 또한 다른 연예 정보처럼 소비하도록 조장되고 있다. 그 결과 *사모, **사랑과 같은 정치인 팬클럽의 경쟁이 게시판마다 넘쳐나고 있다. 팬덤 문화 속에서는 정치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 특정 정치인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만큼, 반대편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증오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텔레비전의 광범위한 보급과 더불어 이미 예상되었던 경향이지만,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정치도 즐거우면 좋은 것 아니냐고? 내가 보기엔 재앙이다.


문제는 정치 엘리트에 의한 정보 조작과 왜곡의 위험성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아테네와 같은 직접 민주 정치에서는 면대면으로 만나 토론하였다. 그러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전자적으로, 즉 비대면으로 참가하면, 이면에 있는 정치 관료들이 권력을 쥐고 정보를 조작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자신들의 정책의 집행에 대중을 이용하거나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가 대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중을 동원할 때 민주주의는 잠식된다.


또한 이는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가지고 있는 정치의 사사화(privatization) 경향을 강화한다. 정치의 사사화는 정치 활동이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현상을 칭한다. 정치의 시장화 현상으로 인해, 공공 정책은 공적인 기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경쟁하는 개인과 집단의 세력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게 된다. 연예 오락 정보처럼 다가오는 정치는 공공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 문제처럼 다루어진다.


지금 등장하고 있는 대선주자들의 UCC는, 원더걸스 UCC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미지로 대중을 현혹하고 어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니, 설정과 이미지 조작으로 가득 찬 정치는 결국 ‘부드러운 전제 정치’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원더걸스보다 흉악하다.


‘설정’에서 벗어나자


정치가 소비되는 경향은 포털로 인해 확대강화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블로그와 우리가 창작한 UCC가 설정된 의제들 안에 갇히고 있다. 포털의 매끈한 판매대 주변에서 맴맴 돌다보면, 어느덧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포털의 탑에 올라가는 정보들은 수많은 대중들에게 주목받고 비슷한 다른 정보들로 네트워킹되고 풍부해지겠지만 ‘탑’의 경계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시장에서 상품화될 수 없는 정보, 곧 이윤으로 연결되지 않는 정보는 갈수록 희소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과거 우리가 인터넷을 점유했듯이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약한 고리, 권력의 누수 지점을 다시 찾아내 점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강력한 고리는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정치적 조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정치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출근해서 일하는 일상은 자본의 생산 과정 그 자체이고, 퇴근해서 소비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상은 재생산 과정이다. 일상의 성찰은 이 모든 과정에 대한 성찰에 다름 아니다. 진솔한 이야기는 TV드라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창조가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의 매체는 아직 뺏기지 않았다. 글도 좋고, 그림도 좋고, UCC는 더욱 좋다. 패러디와 재연, 여전히 매우 좋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재치는 원더걸스 UCC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요즘 블로그들을 돌아보다 보면, 매우 소비중심적으로 구성된 일상을 만나게 된다. 많은 포스팅이 텔미와 태왕사신기, 그리고 맛집과 쇼핑으로 채워져 있다. UCC는 TV에서 방송된 인기 드라마나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캡춰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대중적 관심사라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그것들만은 아니지 않은가. 블로그조차도 판매대에 올라 낚시질을 할 필요는 없다.


좀더 성찰적이고 급진적이 되어 보자. 학교와 회사를 통해 체제적으로 억눌려져 온 이야기를 끌어내는 연습을 해보자. 나의 비탄, 나의 무력, 나의 분노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나를 소외시키는 사회 구조까지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 이외의 사람들로 관심을 넓히자. 성별, 장애, 성적 취향, 인종, 민족적 이유로 소외받는 이들, 무한경쟁의 시대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다른 정치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일을 멈추지 말자.


무엇보다, 의심해야 한다. 우리의 힘은, 주류매체에서 주도적으로 제시되는 견해와 가치를 의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포털을 벗어나자. 내 블로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도, 모든 사람의 블로그가 똑같은 공원에서 비슷비슷한 설정샷으로 채워지고 있다면, 우리는 탈출을 꿈꾸어야 한다. 실명제와 임시조치에 저항하길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재연하고 패러디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서도 안 된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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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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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교육의 역할 : 의사소통과 경험의 성장

인간의 학습과정에 대한 성찰, 그리고 경험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했던 지난 3장의 맥락을 이어받아 4장에서는 경험을 “자신이 환경을 선택하고 구성하며 자신과의 구조접속을 이루어 낸 결과”라고 정의한다(p92). 학습자는 환경과의 조응과정 속에서 객관적인 대상을 나와 환경의 ‘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만남’속에서 나의 삶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경험 안에서 자기와 환경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환경이 곧 자기의 일부이며, 그러한 자신이 곧 환경이 된다.

교육과정이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의사소통과정으로 정의된다면, 이 사이에서의 의사소통은 두 사람 모두를 변화시킨다(p98). 이런 맥락에서 사회조직이 교육적 효능을 잃어버리는 때는 오직 틀에 부은 듯이 고정된 방식으로 학습자와 환경이 조응하는 경우이다. 의사소통은 누군가 누구에게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서 서로의 경험이 공동소유가 될 때까지 경험에 참여하고 경험을 변화시킴으로써 관계를 소통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교육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양자의 생각의 구조가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서로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를 확인한 후, 서로 타협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거쳐 공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의사소통은 오로지 군대에서만 일어난다.

학습만을 놓고 보자면 이는 매우 사적인 과정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 행동의 어떤 부분도 완전하게 사적인 것은 없으며 그 의미는 사회적 맥락과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p104). “교육은 바로 사적인 과정으로서의 학습이 공적 과정과 연계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며, 개인의 사적 변화를 사회적 의미구조 안으로 인도함으로써 그가 사회적 맥락에서 숨쉬며 의미 있는 소통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가도록 지원하는 과정이다.”(p105) 이런 맥락에서 학교 교육과정의 핵심인 ‘교과’는, 총체적이면서 맥락적이며 또한 개인적이기도 한 아이들의 삶(학습)의 과정을 자신의 경험과 괴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편타당한 기준을 바탕으로 분절화되고 탈맥락화∙비일상화의 과정을 거친 ‘교과’라는 경험은 오히려 아이들의 학습력을 저해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평생교육은 교육과 학습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이전의 외재적 가치를 넘어서서 인간의 한 가지 중요한 삶의 방식(way of life)으로서의 의사소통적 학습이 제자리를 잡게 하는 삶의 기초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p109) 평생교육론 역시 교육을 보는 나름의 ‘색안경’이라고 했을 때, 평생교육이라는 색안경을 쓰게 되면 지금까지 교육을 독점하던 학교의 모습이 새롭게 보이게 된다. 지금껏 교육이라고 믿어왔던 행위들이 교육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새로운 ‘교육’을 구성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 새로운 ‘교육’을 구성하는 실천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안교육은 학교에서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욕구를 다시 자극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정희진의 표현처럼,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며, 새로운 교육과정을 고민하고 교육을 규정하는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되는 과정 역시 상처를 보듬어 안아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 ‘상처’를 나의 경험으로 통합할 수 있는 ‘학습력’을 갖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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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평생학습 : 학습의 생명력

 

이번에 읽은 제3장에서는 ‘학습’의 의미 그리고 평생교육학에서 다루는 ‘평생학습’의 의미규정에 대한 서술이 주요하게 다루어졌다. 학습 그리고 평생학습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개념정의들을 접하면서 나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짐과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이 풍족해짐을 느꼈다.(독서를 통한 ‘학습’!)

생물학이나 물리학 영역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학습’개념을 도출해 낸다든지, 사회과학 분야에서 ‘학습 심리학’이라는 영역을 통해서 넓은 차원의 학습개념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 반해, 여전히 기존의 교육학 연구에서는 ‘학습’을 학교 교실에 앉아서 하는 ‘공부’에 한정지어 왔다. 여타 학문 분야에 비하여 교육학은 상대적으로 ‘가르치는 방법과 제도’연구에 치중해 왔던 만큼 ‘배우는 행동’, 즉 학습자체에 대한 연구성과물을 충분하게 산출해 내는 데에 실패하였다.(p68)

언제 어디서건, 배우고자 하는 습성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해당한다.(p69) 학습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경험으로 축적하는 과정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학습은 감각과 인지과정을 통하여 자신만의 인지구조 혹은 스키마(scheme)를 만들어 내는 것, 즉 “익숙함의 확장”의 과정인 것이다. 한편, 학습의 개념은 다음처럼 서술될 수도 있다. “학습이란 주체가 환경을 경험 안에 내면화함으로써 나와 ‘관계 맺게’하는 과정이다.(p73)”

저자는 학습을 지적 호흡이라는 말로 비유를 하면서, 지식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강한 ‘학습 심폐력’으로서의 학습력이 요구된다고 말한다.(p71) 여기서 언급되는 학습력은 학습자가 ‘학습방법의 학습’을 습득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관계된다. 학습방법의 학습은 다시 자기주도 학습능력으로 이어지는데, 나는 이 개념망을 한번 더 확장하여서 학습력의 강화는 곧 자기 안의 가능성의 영역을 인식하고 이를 개척해나갈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하였다. 근대 교육은 계몽된 이성을 바탕으로 각 개인으로 하여금 주체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의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전도된 불구자’를 양산해 내었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 도구주의적 이성관은 자신의 삶과 괴리된 피상적인 학습으로 이어졌으며, 근대의 분절화된 교과들은 전체로서의 삶(자연)과 분리되어 자신의 영역밖에 모르는 ‘전문가’들의 출현을 불러왔다.

“학습은 끊임없는 자기변화와 사회변화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 주는 촉발기제이어야 한다.(p79)” 자신에게 주어지는 감각에 대한 자신만의 적응방식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 학습의 과정이라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극 자체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고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의 습성(habitus)이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혹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인간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학습을 통해 형성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결정(p80)”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가진 ‘반성적 능력’을 통하여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이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풍부하게 가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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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역할?

#1. 교사의 전문성은 ‘교과교육’에만 한정되어야 하는가?


교사의 전문성을 수업내용과 수업방법과 같은 구체적인 교과교육에 한정지어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에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교사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업무부담을 줄여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숱한 ‘다른’ 업무에 치이느라 정작 ‘중요한’ 교과교육에 힘을 쏟지 못하게 되는 것은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교사의 전문성은 교과교육영역에서 드러난다”라는 명제가 교사의 자율성을 오히려 침해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작년 여름 “국기 경례를 거부한” 이용석 교사가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경기도교육청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정직 3개월 조치를 받았던 사례나, 전교조 교사들의 연가투쟁에 대한 보수세력들의 반응(“교사는 자신의 주관적(‘정치적’) 견해에 따라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학생들을 위해 (중립적으로) 교과수업에 충실히 임해야 한다”)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교사의 역할과 전문성을 수업교과영역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

교육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가치편향적인 행위이며, 서로의 인격적 만남과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육활동이 한정된 수업과 교과라는 틀 안에 구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교사를 어떠한 존재로 볼 것인가?


모든 군인은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모든 여성이 여성(어머니)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듯이, 모든 교사는 교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보편적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자인 교사들만 유독 특수한 존재로 여기면서 교사의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 “교사는 성직자(스승)이다”라는 말이다.

교원평가제 도입을 반대하며 연가투쟁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표출한 교사들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함이었고, 반대쪽에서는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원평가제를 도입해야하고 연가투쟁을 한 교사들을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히 “진짜 교육”이 있고 동시에 “가짜 교육”이 있다는 것인데, 이 논란 역시 “교사상”에 대한 상반된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예전 군부독재정권에 의한 ‘반(反)중립적’ 교육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도출된 ‘교육의 중립성’이라는 테제는 여전히 유의미하지만, 한편 교육은 궁극적으로 ‘탈(脫)중립적이고 가치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현실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성과 중립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교육관을 구속받지 않고 실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율성과 이에 대한 지원이 아닐까? ‘진정한 교육’, ‘참교육’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교육의 질은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학생들의 판단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3. 변화하는 시대에 교사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근대적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던 학교교육은 시간이 흐를수록 동네북 신세가 되어만 가고 있다. 이념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금은 누구나 학교교육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지만, 학교 교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지는 어찌보면 아이러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후기 근대(post-modernism)는 거대한 명분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라 작은 행복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탈근대적 생산방식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이에 따라 아이들 역시 날이 갈수록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가는 상황에서 여전히 ‘집단적 사고’를 고수하고 ‘공부’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사는 아이들과 소통의 가능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미 탈근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을 근대적인, 실증적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교과들이 가르쳐지는 획일적인 학교에 붙들어 매려는 것은 아이들에게 행하는 어른들의 폭력이며,1) 이것이 곧 ‘공교육 붕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일 학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학교 교사들에 대한 역할기대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기성의 보편타당한 지식을 선험적으로 상정하고 이것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존재로서의 교사와 아직 미성숙하고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존재로서의 학생(청소년)을 상정하는 도식은 더 이상 매력이 없다. 입시에서의 성공, 더 나아가 인생에서의 성공이라는 획일적인 가치관으로 잠식된 학교현장에서 교사는 학생들 각자가 내면의 욕구와 꿈을 찾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어야 한다. 중립성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학생에 대한 쿨함(무관심)과 사랑이라는 명분 속에 행해지는 구속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교사는 학생들을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바라보고 기꺼이 그들과 삶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사의 사명이며, 전문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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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삶에서의 교육, 학습, 메타학습

 

여기까지 현재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쭉 훑어보았다. 한 5년쯤, 아니 10년 쯤 뒤에 내가 다시 교육생애사를 써본다면 여기서 어떠한 내용이 어떻게 추가될지 자뭇 궁금하다. 지금 이전의 나의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어떻게 달라질 지도 역시나 궁금하다.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가치관을 못마땅해 여기시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라신다. 생각해보면, 나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궁금해진다. 분명히 나는 ‘변화’하였는데 그 변화의 동인은 무엇인지 과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현재의 나(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조금씩 ‘변태’하고 있는 나)의 정체성에 이르도록 만든 외부의 자극이 어느 특정한 순간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환경과 접촉하면서 그것을 인식하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겪어왔지만, 특정한 시점에 나는 특정한 자극들을 예전과 다르게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 자극에 대해 좀 더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여기서 만일 한 인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과정들을 일컬어 ‘교육이 일어났다’라는 말로 표현을 한다면, 교육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 몸 안의 변화과정들에 대해서는 ‘학습’이라는 말로 지칭을 해보고자 한다.

사실 나의 외양은 계속해서 ‘변화’해왔지만, 내가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삶은 ‘변화’가 없는 삶이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과 관련해서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을 한정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점에서 ‘변화’가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나는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에게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해서 성찰적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서 환경과 조응하며 ‘변화’한다는 점에서 ‘교육’은 일정 부분 ‘사회화’ 혹은 ‘인식의 적응’이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단순히 인간의 변화가 곧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사람도 생존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감각을 인지하고 반응하면서 자신의 스키마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지금의 내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곧 내 스키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급격한 전환의 계기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독서의 경험일 수도 있고, 내 스스로의 성찰일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과 관련한 모든 자극과 변화들에 대해 ‘교육’ 또는 ‘학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여기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자극들을 예민하게 포착해내고 이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섬세한 언어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고민을 바탕으로 나는 ‘교육’을 “한 개인이 자신의 ‘학습’과정에 대한 메타 학습이 가능한 상태”라고 명명한다. 의식(인식)의 변화와 몸의 변화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데, 몸의 총체적인 변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나의 메타학습은 여전히 한정적일 것이며 행여 새로운 자극에 대한 학습과정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써 변화한 내 스키마는 내 몸과 괴리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머릿속 생각을 말로 글로 언어화하는 과정에서도 나의 학습은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저 푸른 나무이다.”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언어(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며 자신의 색안경의 질에 따라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관점은 상이해진다. 교육을 고민하는 것은 그래서 현재 내 삶을 성찰하는 언어를 고민하는 것이며, 이 과정은 늘 고통스럽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은 쉬운 언어라는 것은 ‘익숙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익숙하다는 것은 곧 내 학습과정에 대한 메타학습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씨의 말처럼 “안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 일”이지만 고통 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깨달음과 내 몸의 ‘변태’를 느끼는 순간의 희열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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