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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가 알까 겁나는 하다만 스피노자 정리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존재론: 실체, 속성, 양태

통념에 의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데카르트가 코기토의 확실성에서 모든 학문적 진리의 토대를 발견한데 비해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절대자에 대한 지적직관으로부터 출발하는 독단적인 절대자의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개인의 자유나 주체성의 여지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스피노자의 철학은 절대자의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수동적 조건과 가상적 인식에서 비롯된 자유의지의 환상 및 목적론적 편견과 이와 긴밀히 결부된 유태교-기독교의 창조론 신학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인식과 존재역량의 원천이자 해방과 지복의 원천인 신에 도달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목표이다.

스피노자 존재론의 최대쟁점은 유일한 실체만이 실존함을 보이려는 데, 즉 다시 말해 어떻게 ‘자신의 유(類) 안에서 무한한’ 속성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을 구성할 수 있는가를 보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때 스피노자의 신은 기독교적 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연화된 신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신 존재 증명은 전통적 의미의 신 부재 증명이기도 하다.

 

개념의 쇄신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먼저 실체와 속성, 양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간단하게 스피노자의 실체는 신이기도 하며 자연이기도 하다.

실체는 무언가를 무한히 산출하는 능산적 자연인 동시에 그렇게 산출된 소산적 자연이기도 하다. 능산적 자연으로서 실체는 순수한 힘, 역량, 에너지이다.

 

속성은 이 순수한 힘이 표현되고 전개되는 차원, 혹은 그것이 파악되는 관점에 해당한다.

 

양태는 이 속성의 차원에서 산출되는 개별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 있어 우리가 마주치는 특수한 사물은 모두 양태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혁신성은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드러난다. 그의 철학에서 실체는 자기안에 있고 자기를 통해 인식되는 것, 즉 그 개념이 다른 사물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통해 인식된다는 구절이다. 데카르트 철학을 비롯한 전통 철학에서 실체는 존재론적 자립성은 있지만 개념적 자립성은 지니지 못하므로 항상 어떤 술어나 속성들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개념적 자립성을 자신의 실체개념에 포함시킴으로서 전통철학에서의 실체는 실체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스피노자 실체개념의 특성

1.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한하다. 유한한 것은 자기안에 있지 않으며 자기를 통해 인식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2.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산출될 수 없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과 공통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이 유한자를 창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함축한다. 또한 실체가 개념적 자립성을 가짐으로써 초월적이고 파악불가능한 실체라는 관념은 배제된다. 자기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실체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가능성의 원천일 뿐 아니라 인식가능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실체의 개념적 자립성을 통해 실체 전체는 합리적 인식가능성을 획득한다.

 

실체개념의 변화는 속성 및 양태개념의 변화를 가져온다.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의 특징은 그것이 실체가 소유하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속성은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 즉 다만 지성과 관련해 속성이라 불린다는 점만이 다를 뿐,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실체와 동일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한히 많은 속성들은 각기 유일한 실체의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면서 이 실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 동일한 실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는 스피노자 존재론의 핵심적인 쟁점이다.

 

양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전 철학에서 양태는 비본질적이고 우연적 성질이있으나 스피노자에서 유한양태는 개별적인 사물들을 의미한다. 무한양태는 유한양태들의 본질 전체(이는 신의 속성들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직접적 무한양태의 경우로, 연장속성에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 사유속성에는 무한한 지성이 있다. )이거나 유한양태들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칙들(이는 매개적 무한양태의 경우로, 연장에는 우주전체의 모습이 있다.)을 의미한다.

 

신의 구성 또는 역량의 존재론

이러한 개념을 기초로 윤리학 1부에서 스피노자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유일한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함을 보이고자 한다. 유일한 신 존재의 증명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어떻게 그 자체로 무한한 속성들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량(potentia)개념이 핵심 역할을 떠맡는다. 자연 전체의 궁극적인 존재원인과 설명근거를 제시하는 이 논증과정은 전통적인 창조주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인 동시에 실체다원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논증은 2단계로 이루어진다.

1. 실체가 무한함을 증명한다.

2.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이 필연적으로 실존하며, 이 실체는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번 논증은 동일한 속성을 지닌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동일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같은 유(類)간의 동일성, 보편성의 획득은 어떻게 설명되는지 몰것으,,,), 그리고 이 실체는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논증의 핵심은 자연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가진 둘 이상의 실체들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체들은 속성의 차이나 변용의 차이로 구분되는데, 그 본성상 변용에 선행하는 실체들은 속성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동일한 속성을 가진 다수의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의 반론= a와 b라는 속성을 갖는 A와, b와c라는 속성을 갖는 B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스피노자의 이 정리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반론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임을 간과한 반론이다.

2번논증에서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산출될 수 없으므로 자기 원인적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 논증은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 이상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실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이제 각자 자신의 유(類)안에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 어떻게 동일한,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구성하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논증과정은 간단하고 압축적이지만 그 함의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 논증의 기본전제는 ‘각각의 사물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가질수록 자신에 속하는 더 많은 속성들을 가진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서 실체는 하나 이상의 주요속성을 갖지 못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실재성의 증대와 속성들의 증대를 결부시킴으로서 논의의 방향을 바꾸어놓는다. 즉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이상,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서의 신이 가장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따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무한히 많은 각각의 속성이 동일한 실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모순이 아니며, 가장 자명하다는 점이 증명된다.

그리고 이어서 이 실체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사실은 네 가지 증명을 통해 입증된다.

이 네가지 증명의 핵심은 역량에 의한 논변이다.

두 번째 증명-근거율의 원칙/ 실존과 비실존의 원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모든 것은 근원적으로 실존의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증명에서 역량의 논변이 제시되는데,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은 역량이 없다는 것이고, 역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역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실재적인 존재,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가장 많은 역량을 지닌 존재자, 절대적인 역량을 지닌 존재자이며, 따라서 이 존재자가 실존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역량과 권능은 존재론에서 인간학, 정치철학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개념이다.

전통철학에서 역량은 잠재력이나 가능태로 이해되기 때문에 신의 의지를 통해 비로소 실재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과 역량을 동일시하고 나아가 모든 사물의 현행적 본질을 역량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역량은 더 이상 현실태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현행적인 힘이 된다.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태적인 능력을 권능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의지는 독립적인 능력으로 존재하지 않고, 역량은 모든 사물의 본성에 내재적인 실존의 충동이기 때문에, 권능이라는 개념은 항상 가상과 수동성, 나아가 예속의 상태와 결부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은 기독교 철학 및 신학의 창조론에서 중심적인 신의 자유의지와 가능태로서의 권능개념을 비판할 수 있는 개념적 지주이다. 나아가 역량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간학에서 코나투스 및 욕망 개념과 이어져 인간의 능동성의 기초를 확보하며, 그의 정치철학에서 자연권개념을 재정립할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또는 인과성의 쇄신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는 이 정리로부터 신의 역량에 의한 자연의 생산, 다시 말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인관관계가 논의된다. 여기서 인과관계는 스피노자에 의하자면 ‘신은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여기서의 구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오히려 두 측면에서 고찰한 하나의 인과관계이다.

신이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것은 ‘신은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임을 뜻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자기원인의 정의로 시작한다. 이는 원인의 일차적 의미가 전통적 의미의 작용인이 아니라 자기원인으로서의 내재적 원인임을 함축한다. 나아가 자기 원인은 ‘신 자신만의’ 인과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신안에 존재하므로 자기원인은 모든 사물안에서 활동하는 원인이다. 모든 사물 안에서 일어나는 신의 인과적 활동은 모든 사물의 본질과 실존의 근거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존재와 활동 일체에서 항상 신의 내재적 인과활동을 전제한다.

이러한 인과론의 중요성

1. 내재적 인과론을 통해 스피노자 철학의 반 유출론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헤겔은 스피노자 철학을 유출론적 체계로 특징지었다. 헤겔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체계는 절대자로부터 속성, 양태의 순서로 실재서이 점점 줄어드는 쇠퇴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유출론적 체계는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외재성을 전제한다. 스피노자에게서 능산적 자연은 항상 소산적 자연의 내부에서 작용하므로 이런 비판은 전제 자체에서부터 성립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런 내재적 인과관계는 왜 무한자가 유한자를 산출하는가의 문제도 허용하지 않는다.

2. 내재적 인과관계는 중요한 윤리적 함축을 갖는다. 신이 모든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필연의 법칙에 구속함으로써 사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이 사물들의 능동성의 근거가 된다. 그 정의상 강제나 구속은 외재적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은 무한한 존재자이기에 일체의 외재성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강제하거나 제약하지 않는다. 신은 오히려 유한한 사물의 ‘자기’, 즉 능동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유한한 사물은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하는 존재자이므로 절대적 자기,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존재자일 수는 없으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덕분에 원초적인 능동성을 부여받는다. 이를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정치적, 윤리적 노력에 달려 있다.

 

평행론과 인식의 종류

평행론의 함의

속성들의 독립성-속성과 속성 사이의 상호작용 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

속성들의 자율성- 속성들 각각이 무한하다는 것, 따라서 속성들은 실체에 속하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의 동등성- 특정한 속성, 예컨대 사유속성이 연장속성에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

 

이처럼 속성들이 독립성, 자율성, 동등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다양성이 성립한다. 반대로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저에서 존재론적 통일성이 성립한다.

이렇듯 무한한 속성들이 각기 동등하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실체를 표현한다는 존재론적 사실로부터 평행론이 전개된다. 즉 속성들 각자는 서로 인과관계를 맺거나 상호작용하지는 않지만 동일하게 실체를 표현한다. 이러한 동일성으로부터 속성들 사이의 삼중적 차원의 평행성이 존재하게 된다. 먼저 각각의 속성들에 따라 실체에 의해 생산되는 양태들 사이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예컨대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그러하다. 그리고 각각의 양태들의 질서와 연관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속성에 따라 생산된 각각의 평행한 양태들이 동일한 사태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존재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실체를 표현하는 속성들은 무한히 많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에 따라 생산된 우리 인간은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평행론적 원칙에 따라

1.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들은 그 자체의 실재성을 지니며 자율성을 유지한다. 즉, 관념들은 표상적인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형상적 실재성을 지닌다. 이는 무엇보다 적합성 개념을 새로운 진리기준으로 도입하는 결과를 낳는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을 대상과의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적 특징들을 지니는 관념으로 정의한다. 이때의 내적 특징은 관념과 대상의 일치라는 외적 특징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관념 그 자체의 본성에 준거하는 적합성 개념은 관념과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관념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를 인식론의 핵심문제로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관점에서 스피노자는 관념의 내적 원인을 파악하여 그로부터 가능한 모든 결과들을 도출해내는데서 지성의 역량을 발견한다.

다음으로 평행론은 인간의 두 측면을 이루는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즉 양자는 각기 자율적으로 인간이라는 통일체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인식의 종류

신체의 부분들에 대한 완전한 지각은 이 부분들 자체가 아니라 외부 물체가 신체를 변용시키는 방식들을 반영해야 하며 외부 물체의 지각역시 그 물체 자체의 본성이 아니라 이 물체가 우리의 신체를 매개로 드러나는 방식들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정신이 자신의 신체나 자기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은 부적합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자기의식의 명증성에 기초한 근대 관념론 철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부적합한 인식의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인식론적 문제이자 동시에 실천적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서 부자유와 예속은 항상 부적합한 가상적 인식과 결부되고, 역으로 자유와 해방은 항상 적합한 인식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식의 종류 이론으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이론의 의의

1.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2. 인식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해명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인식의 세 종류

1종인식- 상상 혹은 가상작용-표상과 간접경험등-오류의 원인

2종인식- 공통개념에 기초하므로 적합한 인식을 제공함. 공통개념의 특징은 이것이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여러 종류가 있고 모든 사물에 공통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항상 참이지만 정보상으로는 그만큼 빈약하다. 하지만 부적합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최초의 관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극히 유용한 개념이다.

3종인식-신적 인식/직관적 인식-신의 한 속성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감. 이 인식은 인간의 해방과 지복의 근원.

 

 

예속에서 해방으로

코나투스

스피노자 존재론에서 내재적 인과성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내재적 관계를 정립시키고 유한자가 능동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데 신의 이러한 내재적 활동은 유한자 안에서 코나투스로 표현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유한한 사물들의 현행적 본질이라 정의한다. 즉, 각각의 사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만큼 자신의 존재속에서 스스로의 보존을 추구한다. 여기서 자기스스로 할 수 있는만큼이라는 규정이 중요하다. 이는 정진 어떤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도출되며, 그 본성에서 어떤 결과과 도출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스피노자의 인과론의 근본원칙과 연결되어 있다.

윤리학1부에서 양태는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한다고 규정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불일치는 유한양태들이 전적인 수동성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재적 원인인 신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유한양태들은 원초적 역량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과 실존의 불일치 때문에 유한양태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타동적 관계를 자신의 실존조건으로 지니게 된다. 이러한 실존 조건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물들로부터 제약과 이와의 갈등을 함축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구속적이다. 다시 말해 유한양태들을 수동성의 조건에 얽매이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제약과 수동성은 유항양태들이 기본적으로 지닌 긍정적 역량의 여지를 협소화하기 때문에, 존재보존의 추구인 코나투스에 반하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유한양태의 존재 보존의 추구는 정의상 ‘수동적인 자기보존’에 그칠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실존조건을 구속하고 수동화하는 경향에 맞서 원초적인 실존역량을 확대하고 능동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인간의 실존조건은 항상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므로 능동화의 노력은 수동적 의미의 자기이익에 대한 추구일 수 없다. 그것은 자기이익의 성경 변화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성적 개조의 노력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은 근대 초기 부르주아의 소유적 개인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속적 실존조건의 이성적 개조에 토대를 제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욕망과 정서

코나투스의 인간학적 표현은 충동 또는 욕망이다.

‘코나투스가 정신과 신체에 함께 관계할 때 충동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이러한 충동은 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을 증진하는 것들을 낳는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욕망은 충동에 대한 의식이 포함된 충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본질을 욕망으로 정의한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 즉 인간은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인과관계속에서 존재하며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정서이론에서는 변용과 정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용-일차적으로 신 또는 신의 속성들의 변용, 즉 양태들 자체/ 스피노자는 물체와 물체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 또한 변용이라 부른다.

정서-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진 혹은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들인 동시에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서는 정신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체나 신체 일부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은 실존의 힘을 긍정하게 되는 혼란스러운 관념

 

변용이 외부 물체나 인간 신체의 한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인데 비해, 정서는 변용되는 사물의 존재역량의 증대 혹은 감소와 사물의 작용의 변화, 즉 이행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본질이 코나투스의 인간학적 표현인 욕망에 있는 이상 당연히 정신이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대 혹은 증진하는 것을 가능한한 상상하려고 한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수동적인 실존적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이 코나투스를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역량을 증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상과 예속

인간해방을 위해서는 먼저 가상과 상상의 예속상태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스피노자 정서이론에서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가령 우리가 자신과 동일시하던 인물이 어떤 대상을 미워하거나 좋아하면 우리도 그 대상을 미워하거나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정서들의 모방이라 부른 것이다.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가상에서 비롯하므로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선과 악에 대한 비판

스피노자에게서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이를 의식하는 한에서는 기쁨과 슬픔의 정서일 뿐이다. 이는 도덕적 가치를 쾌감과 불쾌감이라는 심리적 상태로 환원시키려는 주장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

1. 선과 악은 실제로는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선과 악이라는 범주를 이 정서들로부터 독립시켜서 거꾸로 존재의 증대와 감소의 원인으로 만들어서 선과 악을 코나투스의 초월적 목적으로 승격시키려는 목적론적 가상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추구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이를 선이라고 판단한다.

2. 선과 악은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성이 있다. 이는 특히 우리가 목표로 삼을 만한 인간 본성의 전범을 세우려 할 때 유용하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선을 그것이 우리가 인간 본성의 전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수단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악은 우리가 이 전범에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스피노자가 수동적 정서를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고 선과 악을 재규정한 데서 알수 있듯이, 가상과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주요전략은 수동성과 가상의 조건 자체 속에서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연적으로 생겨난 존재역량의 증대 기회를 보존 확장하려는 노력과 비록 가상적이고 부적합한 관념이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의 전범을 설정하고 이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은 능동성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5장 정치철학

종교와 정치의 분리

자유로운 학문과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신학-따라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반드시 필요[신학정치론]

방법론

1.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을 제안/우리의 이해관계로 성서를 해석해서는 안됨.

2. 성서에 씌어진 그대로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최고의 도구인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이성이 철학의 시녀라는 중세의 원칙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정치체제론

신학정치론-정치에 대한 종교의 간섭을 비판하면서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한다.

정치론-한층 현실주의적인 자연권 이론의 관점에서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탐구한다.

 

바람직한 국가체제

스피노자는 혁명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형태의 국가이든 기존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치명적 실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을 모두 인정하고, 여러 제도와 조직들을 제안하면서 각각의 체제내에서 최상의 형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절대군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스피노자는 군주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제도의 설립에 대해 언급한다.

1. 의회의 설립-군주정내부에는 귀족정의 요소가 숨어있다. 이러한 요소는 군주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영향을 주므로 의회를 통해 개선되어야 한다.

2. 국가의 전 영토는 군주가 소유해야 한다. 군주는 세를 받으면서 영토를 임대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땅을 소유하는 계급이 없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교역과 상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어느정도 국민들간의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3. 의용군제도의 옹호. 오직 필요할 때만 싸우는 의용군은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보호책이다.

 

이렇듯, 스피노자는 군주정을 어렵게 허용하는 반면 귀족정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귀족정의 장점

1. 귀족정은 다수의 통치체제이므로 정부가 충분한 권력을 가질 수 있고 국민의 의견수렴도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의회는 불필요하다.

2. 최고 통치자가 사망하더라도 최고통치권을 가진 의회는 유지된다. 따라서 격변을 겪지 않는다.

3. 군주정의 군주는 그 자신의 재능이나 주변여건에 따라 절대적이기도 하고 미력하기도 하지만 의회의 권력은 불변이다.

4. 군주정의 법은 군주의 선포된 의지이지만 군주의 모든 의지가 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귀족정에서는 선포된 의회의 의지는 모든 경우에 필연적으로 법이 된다.

통치권의 조직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귀족정은 군주정과 다르다. 스피노자는 군주정에서 용병제와 사유재산을 부정했지만 귀족정에서는 이를 인정한다. 귀족정은 이미 절대권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군주정에 내포된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즉 싸워서 지켜야 할 자신들의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귀족정에서 국민들이 돈을 받지 않고 군인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군주정에서는 의용군이 귀족정에서는 용병제가 적절하다. 사유재산권의 인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국민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재산 소유권마저 없다면 정부에 완전히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서도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한다. 즉 사유재산의 인정은 정부를 지지하도록 국민들을 자극한데 필요하다.

 

민주정에 대한 논의-귀족정과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민주정은 의회의 구성방식에서 귀족정과 다르다. 민주정은 독립적이고 정직하게 사는 모든 시민이 최고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될 자격을 지니며, 국가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어린이와 금치산자, 여성과 하인은 시민의 자격이 배제된다. 여성은 남편에게 하인은 주인에게 종속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지적으로, 물리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이 그 바탕이 된다. 스피노자의 민주정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죽는다. 뷁

단지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민주정이 정부의 가장 자연적인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최상의 국가형태라고만 언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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