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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1
    3월9일 경철수고 수업 정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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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3/05
    헤겔노동개념을 살포시 훔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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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2/24
    2월24일 수요일 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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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 경철수고 수업 정리

맑스는 초기작업인 경철수고에서 인간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꽤나 모호해보이는 입장들이 많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계급중심적 관점을 확고히 하는듯 하다...

특히 그룬트뤼세와 자본론에서 그러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요즘들어 맑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1. 경철초고의 인간주의적 관점을 주목하는 마르쿠제의 해석

2. 자본론 해석은 그동안 인식론적으로 잘못 읽혀져 왔으며, 이제 인간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알튀세...

3. 베이컨적, 프로메테우스적으로 읽혀온 맑스의 인간우월론적인 생산력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이 맑스를 생태적으로 해석하려는 관점...

 

이러한 문제의식을 종합해보니 맑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현대사회에 걸맞게 새롭게 정리되야할 필요성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먼저 소외된 상태의 극복이란 무엇인가?

정말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극복되면 기계적으로 인간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자기실현이 가능해질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찰이 함께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라캉이 지적한 대로 인간의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하며 상징계진입과 더불어 구조에 의해 형성되므로 영원히 타자의 욕망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자본주의가 극복된다하더라도 물적 토대에 의한 소외는 극복될지언정 진정한 소외의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들뢰즈의 욕망개념을 따른다면 욕망은 생성의 힘이고 서로들간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므로 욕망이야말로 무한한 생성의 힘이고

창조의 원천이 될 것이다.

들뢰즈의 사상은  욕망이 결핍에서 기인한다는 부정성을 극복하긴 했지만 규범적 토대를 마련하진 못한다...

사회적 억압을 철폐하고 홈패인 공간을 통해서 무한대의 욕망이 분출되는 것을 통해 모두의 욕망이 올곧게 실현됨을 지향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히틀러의 욕망, 만인에 대한 지배욕구에 대한 통제의 근거를 마련하기 힘들게 된다...

 

일단 여기서 욕망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더 많은 논거와 연구를 필요로하므로 일단 패스한다..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끝장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으니 출발점을

먼저 제한하기로 한다....

 

 

최근들어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간의 대결구조가 눈에 띄게 분명해지고 있다.

즉, 다시말하자면 해방의 동력을 어디서 찾느냐의 문제가 될터인데, 노동안에서의 해방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느냐의 문제 되시겠다.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지만 후기저작인 자본론에서는 노동의 부정성을 지적한다.

즉 노동을 하지 않을수록 인간의 자기실현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이다.

두번째 관점에 의하자면 고용노동의 종식이 향유의 노동으로 변환될 수 있느냐의 문제 되겠다..

 

이러저러한 해석의 문제를 분명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맑스 본연의 노동개념을 좀 더 정확히 봐야한다.

 

맑스는 헤겔의 추상적 노동개념을 극복하면서 유물론적 관점을 제안한다.

헤겔의 노동은 고립자인 정신의 자기전개과정 자체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고립자의 운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의 사유전개는 논리적일수는 있으나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하는 개념인 것이다.

마치 사회계약론자들이 상정하는 자연상태라는 개념이 실제하지 않지만 논리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맑스는 대상과 대상의 관계맺음이야말로 노동의 정체라고 해석한다.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라는 대상으로서 대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규정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에 의하면 노동은 다음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자기보존행위

2.자아실현행위

 

여기서 어떤 관점이 맑스의 관점인가로 논쟁하는 것은 맑스에 대한 오독일 수 있다.

두 가지의 노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실상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이 자아실현행위가 되는 것.

즉 자본주의 하에서 분리된 상태를 재결합시키는 것이야말로 맑스가 생각한 올바른 상태가 아니었을까/

 

다시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의 대결구도로 돌아와보자.

노동패러다임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주자는 에리히 프롬과 알렉스 캘리니코스등이 있고, 탈노동패러다임의 선두주자는

비루, 앙드레 고르, 안토니오 네그리등이 있다.

 

두 입장 모두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으로 노동시간단축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에 동의한다는 것이 그것이 문제해결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다.

 

나는 노동시간단축도 현실에서 필요한 단계이지만 더 나아가서 행위주체의 행위에 대한 통제권 귀속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나의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하게된다는 점, 나의 노동행위에 대한 결과가 나에게 귀속하지

않고 타자(일례로 자본가)에게 귀속한다는 점이다.

즉 노동의 소외는 행위주체의 행위지배권 상실인 것이다.

 

나는 사적소유의 철폐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말그대로 공동재산주의로 가게 될 경우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

다같이 못사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주장한 코뮨주의 1단계와 2단계는 사실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에 의한 분배와 노동성과에 의한 분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며(필요에 의한 분배), 동시에 노동의 결과에 대한 사회적 기여에 의해서

추가적 분배도 이루어져하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노동을 신성성과 부정성이라는 이분법적 틀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올바른 노동개념을 정립하는데 장애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국민경제학과 칼뱅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의 신성성이라는 관념아래서 노동자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노동을 부정성이라고만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만을 고집한다면 소외된 노동의 극복은 소외된 문화의 향유라는 새로운 문제를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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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노동개념을 살포시 훔쳐보기

헤겔의 노동개념을 간단히

 

 

 주노변증법에 나타난 노동개념의 해방성

노예의 자기의식이 해방되기 위한 두 가지 계기

①공포속에서 주인에 대한 봉사를 해야되것지....

②노동을 통한 교양Bildung-교양이라는 의미에 헤겔노동의 비밀이 숨어있어염...

⑴노예는 대상의 자립성 즉, 노예자신의 부정이라는 상태에 직면하고 그 이후에 대상 을 자신의 의도대로 변형, 가공하는 것을 익혀나간다.

⑵노예의식의 자립성 획득=노예의 노동은 대상세계의 가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예 자신의 의식을 풍부히 해서 자기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결국 자연으로부터 소외(공포)를 지양하고 또한 노동하는 자로서의 노예가 간직한 사유된 내면적 자아(자유)를 실현시킴으로서 노동하는 자를 미개한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강제 노동 속에서 노예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헤겔노동개념의 긍정적 요소를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맑스는 헤겔을 조낸 깐다....

비록 헤겔이 고대의 노동개념을 벗어나서 노동의 긍정성을 포착한 것은 고무될만한 점이지만 버뜨...but....여전히 헤겔은 추상적 정신노동을 벗어나지 못했고, 노동을 부의 원천으로 파악했으나 여전히 비참한 노동의 실상을 자연법칙으로 간주하는데 그친 국민경제학적 관점을 견지한다. 하지만 현실은 실상 그렇지 않은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헤겔은 주인이 강제하는 억압적 노동을 자기의식의 획득을 위한 해방의 외적 계기로만 위치지우고 계급적 적대상황에서 노동의 지속적 소외가 사실은 해방의 계기가 아니라 노동소외의 심화과정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만 것이다.

 

 법철학에서 헤겔 노동개념 쪼아보기

헤겔은 한 때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며 조낸 열광한다..보편적 자기의식의 고유한 통일로의 복귀라는둥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흥분하다가 시민사회의 모순을 직감하면서 역시 보수적 입장으로 회귀한다. 물론 자신의 체계상으로도 시민사회는 인정될 수 없기도 하다. 결국 시민사회는 관념론 체계에서 국가 아래의 단계로 격하되고 만다. 즉, 특수자의 보편자로의 고양이라는 자신의 체계완성을 위해 시민사회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바라본 시민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

①천민의 증대...원인은 천민의 게으름과 낭비란다....뷁....

②사회적 분업에 의한 보편적 재산의 분배방식인데...여기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자질이나 자본의 소유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해서 분배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천민의 발생은 필연적이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해외무역이나 식민지 정책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결국 여기서도 국가로 귀속되는 것이다....

그럼 해외무역해서 손해보는 나라는?? 식민지배 당하는 나라는?? 어쩔.....

 

헤겔을 까보자....

비판

1-주노변증법에 의하면 해방의 계기는 노예, 즉 천민에게 내재한대매??

2-정신현상학에서도 인간의 구체적 노동이 절대지라는 리바이어던에게 삼켜지더니 법철학에서도 역시 노동을 허구적 관념으로 보는 헤겔이 발견된다....

 

아부지 잘 계시냐??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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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뭐냐.....동이 아닌게 노동이냐??

어줍잖은 노동개념 정리 개시탄

 

 

고대 노예제 사회의 노동개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자면

포이에시스=자기외부에 목적을 두는 대타적인 노예의 제작행위-비천한 행위로 취급

프락시스=자기자체내에 목적을 두는 자기목적적인 주인의 인간적 행위(정치, 전쟁, 철학)

 

 

근대 부르워주아 경제학

헤겔에 의하자면

노동은 정신의 자기실현의 계기, 인간의 자기 산출행위- 적극적, 긍정적 노동개념 포착

 

 

맑수의 노동개념

인간이 생존을 위해 욕구에 의해서 자연대상을 가공해 내는 감각적 물질적 생산행위

 

-감각적sinlich, 대상적gegenstaendlich 인간이 감각적 대상적 타존재를 목적의식으로 가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인간 자신의 본질적 능력들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sinlich, gegenstaendlich 는 비대상적ungegenstaendlich와 대비되는 용어. 즉,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자연대상의 존재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미루어 짐작만 할 뿐....ㅡ,.ㅡ)

 

 

♂맑스의 소외된 노동

유적존재의 자유로운 유적활동으로서의 노동이 오히려 유적존재인 인간자신에게 부자연스럽고 강제된 활동으로, 자신을 대상에 실현시킴으로서 또한 동시에 자기 자신 스스로를 새롭게 산출해나가는 창조적 활동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자신을 대상속에 대상화Vergegenstand 할수록 인간자신에게는 탈대상화Entgegenstaendlichung로, 탈현실화Entwiklichung로 나타나는 이러한 노동의 양상을 소외된 노동Entfremde Arbeit, 혹은 외화된 노동entäuserte Arbeit이라고 명명한다.-MEW40권 경철수고515P)

CF. 외화된 노동의 u뒤에 있는 s는 원래 에스체트......뷁.....못찾것어서.....걍....

 

 

 

헤겔의 노동개념을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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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4일 수요일 스터디

스터디가 스터디 다워야 할터인데.....걱정이 크다.....맨날 딴 이바구만하다가.....술먹으러 가는 모임이 되고 있군하.....

본말전도.....뷁......

 

 

욕구, 생산과 분업

 

 

맑스는 사회주의에서의 욕구와 국민경제학 아래서 만들어지는 욕구가 다르다고 본다.

각각의 사람은 타인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데 이는 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해서이고...

-생산관계가 착취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나의 욕구 충족은 즉 타자의 희생이 전제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에서의 욕망은 정말 맑스가 예상한대로 자아실현의 욕구, 창조의 욕구, 그야말로 생산적인 욕구일 것인가......

 

라캉은 생존에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키는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구분한다.

그가 보기에 욕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언어체계인 상징계에 진입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타자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여기서 굳이 논거를 제시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모델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라캉의 사유에 대한 동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trend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라캉의 논의에서 드는 의문점은 타자의 욕망이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전이되는 순간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의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의 정체도 사실 명석판명하지 않고 애매하고 혼잡스러운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욕망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해답을 내리는 것은 사양......사실 잘 모르겠으니깐......패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맑스의 논의대로 사회주의체제라는 목가적 상태에서 욕망이 과연 타인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가에 대한

타당성의 확보가 아니라,  맑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라는 이윤이 지배하는 시스템에서는 나의 욕망의 실현은 타인의 희생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그 자체의 확인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사유체계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조급함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욕망을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한 지난한 단계의 실현을 가능케 하기 위한 충분조건으로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1단계일지도......

 

사유재산은 조야한 욕구를 인간적 욕구로 만들줄 모른다.

-왜겠니?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화폐의 지배를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가? 사람들의 생활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삶으로 바뀐지 오래가 아닌가......

 

국민경제학은 금욕적이지만 폭리를 취하는 구두쇠이자 동시에 금욕적인 그러나 생산하는 노예이다.....

 

국민경제학은 도덕적인 학문이다. 자기체념, 생활의 체념, 모든 인간적 욕구의 체념이 국민경제학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대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화폐는 할 수 있다. 화폐는 먹고 마실수 있으며 극장에 갈수 있고, 화폐는 예술, 학식, 역사적 진품, 정치권력을 알고 있으며, 화폐는 여행할 수 있으며 화폐는 그대가 모든 것을 갖게 할 수 있다.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다. 화폐는 진정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인 화폐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것도 창조하고 싶어하지 않고, 자기 자신 이외에 어떤 것도 구매하고 싶어하지 않거니와, 다른 모든 것은 결국 화폐의 종이기 때문이며 내가 주인을 갖고 있다면 나는 종을 가지게 되고 그의 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모든 열정과 모든 활동이 탐욕 속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멜더스는 사치를 장려하고 절약을 저주한다. 결국 절약하기 위해서

리카아도는 절약을 장려하고 사치를 저주한다. 결국 사치하기 위해서

 

 

 

 

쉽하.....알바갈 시간이군하.....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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