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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7/19
    윤리
    냉커피
  2. 2010/07/13
    카바레티스트 베르너 슈네이더의 패러디
    냉커피
  3. 2010/04/18
    혹사
    냉커피
  4. 2010/03/20
    경계도시2를 보고
    냉커피
  5. 2010/03/05
    이해하기
    냉커피
  6. 2010/02/15
    파주 (3)
    냉커피
  7. 2010/02/08
    의형제 관람기
    냉커피
  8. 1999/11/30
    이해하기
    냉커피

윤리

경제적 기반을 갖지 않은 코뮤니즘은 소박하고, 도덕적 기반을 갖지 않은 코뮤니즘은 맹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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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레티스트 베르너 슈네이더의 패러디

인간은 노동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권리', 곧 이익에 참여할 권리를, 사회적 생산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실업자 지원금'이라는 단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뻔뻔스러운 말이다. 그건 '자유 시간 활용에 대한 사례비'라고 불려야 한다.

 

자유시간을 노동하는 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능성들이 많이 있다. 인간 육체에서부터 출발해보자.

 

육체를 관리(면도, 이발, 화장)하는 것은 노동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괴롭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지 다림질하기, 신발 닦기, 얼룩제거도 그렇다.

 

꽃밭과 잔디를 관리하고 집을 단장하는 것도 노동을 필요로 하며, 또한 노동이다.

 

정보다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것도 노동이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하기 위해 악기를 배우는 것도 노동이다.

 

그 교육을 마칙고 나서 음악으로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도 노동이다.

 

의견을 형성하기 위한 토론과 대화도 노동이다.

 

 

 

슈네이더, [한 솔로이스트의 충고 Anmerkungen eines Soloisten], 1998

 

카바레티스트는 정치나 세태 풍자, 패러디를 행하는 대중 여흥 예술가를 뜻한다고 하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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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사

 

뭐라도 해야돼....

 

불안해...

 

그래서 가만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거야

 

너 말이야 !!!

 

바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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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를 보고

경계도시2를 보고

경계도시2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뒤에야 비로소 개봉이 되었다. 물론 다큐멘터리라는 특성상 500개가 넘는 테입을 편집하는 물리적 시간도 많이 필요했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3월18일 대학로에 있는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감독 홍형숙씨와의 대담시간이 상영이후에 주어졌다.

그렇게 힘든 영화를(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었다. 이는 다만 나만 느낀 것은 아닐거 같다.)만든 감독이라는 느낌이 안들정도로 홍감독은 평안해 보였고 동시에 강해보였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다큐영화를 만들지 못했으리라.

평론가 정성일씨는 경계도시1이 송두율교수에 관한 이야기라면 경계도시2는 송두율교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말하는 영화라고 평했다.

아마도 그렇기에 한국사회의 구성원인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리라.

 

내가 본 느낌은 이 영화는 대한민국 사회를 ‘관찰’한 영화이다.

관찰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홍감독이 한국 사회의 관용을 호소하긴 하나 감독역시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것이라는 거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도덕책을 읽어준다고 해서 윤리의식이 생기는건 아니듯이 관용을 호소한다고 해서 영화를 본 관객의 똘레랑스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감독도 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영화의 메시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우리를 관찰한 영화이다.

관찰이라는 관점을 통해 이 영화는 사회적 불의이자 사회적 병리를 고발한다. 만약 이 영화가 도덕책을 읽어주는 영화였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강한 가치관이 내재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이 영화는 그만큼 날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또 왠 개가 짖나부다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리차드 로티는 사회적으로 개인과 특수자를 인지하고 배려하는 능력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표현했다. 그 능력의 발휘를 통해 사회는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하지만 자신 속에 내재된 불의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그 불의를 제거할 동력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로티의 예술적 민감성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로티의 예술적 민감성이 발현된 이 영화가 사회적 불의를 고발한 것은 사실이나 그 불의를 점진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아도르노도 미메시스적 인식을 강조했지만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악마를 극복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던가....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분노하는 나 자신을 보고 움찔하고야 말았다. 난 송두율 교수가 2003년 당시 마녀사냥을 당할 때 무관심했으며, 이 영화를 보기전까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용산의 비극, 이주노동자의 비극, 사회적 소외계층의 현실적 비극,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의 비극, 아동학대의 비극,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비극.....

그 비극들을 겪을때 난 ‘아주 잠깐’ 분노했었다....‘잠깐’....

그런 내가 고작 이 영화한편을 매개로 이 사회에 분노하고 일침을 가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가 흔히 비판하는 수구꼴통이라는 이들과 빨갱이들.......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다수 국민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진흙탕물이 조금씩 나오는 물부족 동네가 있다. 대부분은 그냥 몸을 상하게 하는 진흙탕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만 할뿐 우물을 파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생각따윈 없다. 하지만 어떤 이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파다가 졸졸 나오던 진흙탕물마저 안나오게 만들었다. 그럴 경우 문제해결에 소극적이고 관심없는 이들은 우물을 파는 이들을 아마도 매장시켜버릴거다. 같이 판다면 새로운 우물을 뚫을수 있음에도.....

 

수구와 빨갱이는 적극적인 소수이고 중간자인 국민은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소수이다.

오류를 저지르는 이들은 적극적인 이들이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이들이 나쁜건가....소극적인 이들이 나쁜건가?

좀 더 나은 사회, 서로가 역지사지 할 수 있는 사회.

정말 그런 사회를 원한다면 모두가 치열해져야 할 것이다.

수구꼴통들이 사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까닭은 다수의 국민들이 우물을 파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수위에 군림할 수 있는거다. 자신의 시민권을 권리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 수많은 다수중에 나도 포함되지는 않는건지......

 

 

영화내내 송두율 교수는 많은 시간 침묵한다. (강요당한 침묵일 것이다.)대신 그의 부인인 정정희씨는 자신의 원칙을 절규하듯이 외친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위해 전술적 전향을 강조하는 시민운동 진영에게 정정희씨의 절규는 씨알도 안맥힌다.

“우리가 왜 전향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북에 편향적이지 않다. 남북의 평화를 위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문제는 북은 우리의 방북을 허용했지만 남은 우리의 방남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편향적인 친북인사라는 것인가?”

 

갈등의 해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가능한가?

파시즘은 우익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좌파들에게도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좌파라고 하는 시민사회계층은 송교수부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왜 당신들만 생각하고 운동진영 전체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건가? 당신들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곧 있을 총선의 패배에 큰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앞장서 남북화해모드시기를 이용해 초청한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를 절체정명의 위기는 대의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만다.

 

 

 

적극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니체가 주장한 것처럼 정말 능력있는 소수에 의해서나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변화를 위해 개인은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내가 있고 사회가 있는 것이지 사회가 있고 내가 있는게 아니다. 사회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우리의 관용은 어디서 어디까지의 경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그렇게도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625를 경험하지도 못한 이들이 625를 경험한 이들의 레드컴플렉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단순히 레드컴플렉스가 기득권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만 비판할 건가?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에 이용되는 어리석은 대중을 욕하기만 할건가?

물론 다수의 대중도 욕먹어 마땅하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앞에서 정치니 사회니 하는건 사치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이 극한까지 몰린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정치가 아닌가.

결국 먹고살만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게 아니라 먹고사는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참 역설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영화이다. 공동체와 개인의 딜레마....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는 들뢰즈가 이야기 한 것처럼 자유로운 탈주가 가능한 공동체가 결코 아니다. 자유로운 탈주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가능해야 하는 건지.....여러 차원에서 이 영화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이 영화를 보고 감정적으로 동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또는 애써 잊을려고 하는 부분을 감정적으로 건들고 있기는 하지만 감정으로만 접근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하나의 냄비만 끓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폭력적인 속성이 내재하고 있어 르네 지라르가 말한 것처럼 희생양을 필연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건가?

아니라면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자본주의의 합리주의가 우리에게 이런 속성을 심어주고 있는건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적 토론의 장이 개방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절차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는 당위에 그치고 만다.

 

이 영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경계를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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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을 오시엔에서 봤다......

 

음.....영화 도중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해리포터가 꿈을 통해서 볼드모트의 범행을 예견하게 된다.

 

실제로 그 꿈은 현실로 발생하고 이를 통해 해리포터가 볼드모트와 정신적으로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덤블도어 할배는

내리게 된다..

 

아마 아직 볼드모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볼드모트가 해리와 연결되는 것을 알고 역으로 해리를 조종하기 전에

거기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마법을 배우라는 명령을 덤블도어 할배는 내리게 되는거....

 

근데 하필 그 마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해리를 조낸 싫어하는 스네이프 교수....

스네이프는 영웅취급당하는 해리 아빠를 조낸 싫어하고 그래서 해리도 싫어한다...

 

물론 친절하게 가르칠리가 없지....

 

너무 빡세게 가르쳐서 화가난 해리....

 

스네이프가 정신침입마법을 걸려고 하는 순간 빡돌아서 역마법을 걸어버린다...

 

이를 통해 스네이프의 기억을 훔쳐보게 된 해리.....

 

스네이프는 학창시절 왕따당했고, 왕따를 시키는 주범은 해리 아빠였다....

 

해리가 본 기억에 의하면 스네이프는 심성이 무척 여리고 고운 불쌍한 학생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에반해 해리아빠는 내가봐도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스네이프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자 여기서...우리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인정하면서 산다는 것....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주는것.....

 

서로간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몰것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중받고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다....

 

하지만 그런 보편성 아래서 침해당하는 개인의 입장도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이 지녀야 하는 보편적 인권의 존중을  지킬 경우 내 삶이 파괴될지도 모를 경우......그 좌절감과 저항감....

 

어제 산부인과를 보니....다운증후군 아이를 낳는 장면이 나왔다...

노산을 하게 된 산모였다...노산이다 보니 기대도 엄청 크고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온갖검사는 다해본다...

기형아 검사를 해보니 저위험군으로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의사가 한 마디 한다...

 

저위험군으로 나와도 기형아가 나올 확률이 20%정도 되니깐 검사를 해보자고.....

산모는 90만원이라는 검사비용도 아깝고 검사 자체의 위험성도 있어서.....

검사를 제끼자고 한다....

 

근데 하필이면 극히 낮은 확률이 로또처럼 당첨되버린다...

 

다운증후군 애가 태어나 버렸다....

 

보통의 경우 낙태가 불법이긴 하지만 다운증후군일 경우 낙태를 한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건 살인이니깐....다운증후군 애라도 낳아서 키우라고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럼 니가 한 번 키워보고 그렇게 말하라고 할수 있것다....

 

 

모든 인간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없고, 수많은 경험의 파편들을 종합해서 자아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내가 볼때는 당췌 이해할 수 없는 미친짓이지만......그 사람에게는 필연적일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있을수도 있는거쥐.....

 

날아라 펭귄이라는 영화를 보면 최주봉아들래미가 술도 입에 못대면서 심지어 채식주의자인 배우를 연기한다....

그가 채식주의가 된 이유는 어느날 밤 사온 조개가 입을 열고 닫으며 살아보겠다고 용을 쓰는걸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낱 음식으로만 생각했던 조개도 자기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그리도 애를 쓴다는 거였다....

 

그 후로 그는 채식을 고집한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회사 회식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술도 못먹고 고기도 못먹고.....

 

분위기나 망치는 스뤠기..........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그가 홧김에 술을 막퍼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병원에 실려가고 나서야.....

회사 동료들은 술을 정말 못먹는,, 먹으면 죽을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걸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을 이해할 때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접하지 못하면 서로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이해받고 싶지 이해하기는 싫은법......

 

역시 나하나부터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법이다....

 

타인에게 치명적 피해나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를 빼곤 무조건 이해해야 될 듯하다....

 

늘 그럴수도 있지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그래 오늘부터 도를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보자군하......

 

하......어렵다......

 

몸살때문에 죽을거 같아서.....노약자석에 앉았다.....

근데 건강한 할배가 왔다.....

 

비켜줘야돼???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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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영화 파주는 불편한 영화이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요구하는 듯 하다.

중식(이선균)과 은모(서우)....

이야기의 축을 책임지는 두 주인공의 시선중 어느 것을 쫓아야 할 지 모르겠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해 허우적대는 중식이나 언니와 형부, 권력자인 나이트 클럽 사장같은 인간 군상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은모나.......

 

둘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둘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욕망이지 이루어지는 순간 더 이상 욕망이 아닌 것이다.

 

누구의 시선을 먼저 따라가 볼까....

음 중식의 시선을 먼저 따라가 보도록 하자...

 

중식은 운동권이다...하지만 그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모호하다..

수배를 받아 수감중인 선배의 집에서 선배의 와이프(중식이 사랑했으나 선배의 아내가 된)와 선배의 아기와 살고 있다.

중식은 시대적 마조히즘이 요구해서 만들어진 말그대로 '꿘'이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행복이 무엇인지 갈구할 틈도 없이...어느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은모는 중식에게 묻는다. 왜 이런짓을 하느냐고....

처음에는 멋져보였고 나중에는 하다보니 일이 자꾸 생긴다고 답한다....

여기에 중식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흔히 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안고가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는, 하지만 그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면서도 결국 되돌아가는.....

예수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있어야 행복해지는 걸까.....하지만 질 수 없음을 언제쯤 알게 될까??

 

선배아내와의 불륜을 벌이는 그 순간 방치된 아기는 끓는물을 뒤집어쓴채 화상을 입게되고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식은

파주에서 목회를 하는 선배의 집으로 다시금 도망친다....현실을 개혁하려는 운동권이지만 자신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해야하는

부조리의 연속....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

중식은 은모가 언니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될까봐 그 모든 죄의 굴레를 자신이 뒤집어 쓰려한다.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99마리 양이 평온할 때에야 비로소 한 마리 양에 대한 시선이 올곧게 투사될 수 있는거다...

 

철거촌 투쟁은 용산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옳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옳은 것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한다.

 

요즘 션과 정혜영이 나오는 공익광고가 있다.

누구나 해야된다고 생각하지만 하지 않고 있는 사랑의 실천,,,나눔의 연대......

용산참사에서도 사건의 본질은 호도된다.

철거민이라는 이익단체의 자기보전이라는 이기심이 불러일으킨 비극이라는 조중동식의 흑색선전....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안한 허구를 욕망한다.

불편한 진실속에 참가하는 순간 나도 불편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자괴감,,,,

중식의 포지션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지점.....중식이 파주에 있지 않았다면, 서울에 있었다면.....그는 철거촌 투쟁이 아닌 또 다른 투쟁속에

자신을 던져야 했을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지....의미도 알 수 없는 쳇바퀴굴리는 투쟁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작은 것이라도 내게 의미부여가 되고 나에게 삶의 충만함을 만끽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좋다....

 

작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여전히 흑백논리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운동을 하느냐.....운동을 접느냐.....

이러한 이분법의 자의적 해석.......바로 중식을 통해서 박감독은 이것을 지적하고 싶어하진 않았을까??

 

 

그러한 지점에서 보자면 은모는 훨씬 현명하고 훨씬 적나라한 고민속에 자신을 던져둔채 괴로워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언니, 그 언니와 결혼한 서울에서 온 대학생....

 

이런 비극적 현실 속에서 은모의 선택은 역시나 도피이다.

하지만 중식의 도피가 포장된, 즉 정의라는 외피를 뒤짚어 쓴 채 자신을 정당화하는 도피라면 은모의 도피는 자신을 있는대로 까발리며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는 인간적 도피이다.

 

은모에게 자신을 정당화할 외피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이트 클럽의 사장은 은모에게 또 하나의 오브제 a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상을 은모는 붙잡아야 할 지 버려야 할지 알지 못한다.

솔직히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하는 지점인 것이다.

 

은모는 왜 형부를 형부라 부르지 않았을까....

중식은 자신이 보호자의 포지션에 머무를때 은모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모가 자신을 형부라 부르는 순간 부모의 입장을 벗어나 수평적 관계의 회복으로 돌아선다..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는 이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관계로 전환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때 은모는 잡을수 없는 욕망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그 욕망을 집어 던지고 만다.

 

은모는 도피를 한다...그리고 되돌아온다. 그리고 또 도피한다...

왜??

 

영화는 은모의 귀환으로부터 시작해 은모의 도피로 막을 내린다.

우리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은모와 중식은 끝끝내 서로의 속내를 확인하지 못한다.

아니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군상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아마도 감독이 그러한 비약의 가능성을 암시했다면 파주는 그렇게 어려운 영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러한 호평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파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의 공간.....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인 공간....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 살고 있는걸까.....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으로부터 도피해야 하는가.....

 

이것이 파주가 우리에게 묻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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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 관람기

영화는 영화다라는 영화로 나의 말초적 폭력성을 한껏 자극시켜주신 장훈 감독께서 제2탄을 발표하셨다....

 

어차피 웰메이드 상업영화를 표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의미부여는 그닥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다....걍 나한테 재미나고 즐거우면 장땡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고에 젖어서 그럴수도 있고, 문화적으로 말초적인 폭력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장되었을 수도 있고 원래 타고나길 그랬을 수도 있고....애니웨이......난 액션영화 매냐인지라......

영화는 영화다라는 영화도 무쟈게 재밌게 본터이고....그래서 의형제에 대한 기대도 꽤나 컸다.......

 

2월 7일 주일저녁 8시.....(예매를 당일오전에 시도한지라 그 전 영화는 모두 매진이었다......)

드디어 나의 문화적 폭의 확대와 삶의 질 고양을 위한 또 한차례의 인생햄볶아살기 프로젝트가 발동되었다

 

반칙왕부터 시작된 강호형에 대한 나의 애정지수는 이미 치솟을 대로 치솟아 있었고....전우치전에서 드뎌 나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된 동원이에 대한 애정도 한껏 물올라 있는지라 주인공만으로도 이미 행복이 뻐근하게 몰려와있는 터다.......

 

사실 사전정보가 전혀없이 본 터라 감동적인 가족 로망스면 어떡하나 하는 기우도 약간 있었으나(물론 감동의 파노라마를 싫어하는 것은 물론 아니나 그보다 액숀을 좀 더 좋아하는 터라.....)그 기우는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승엽이 횽이 홈런을 때려버린 것처럼 날아가버렸다.....

 

국정원 출신의 한규와 간첩출신의 지원......

그 둘의 계산적인 동거......

살을 섞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알아가는 그들.....

상대방을 위해 날 희생할수도 있다는 희생정신의 무럭무럭 싹틈......

 

흠....재밌다.....하지만 여기서 끝내지는 말자.....

말그대로 '웰메이드' 상업영화이기 때문에 나에게 충분히 의미부여할 거리들은 많이 있다....

 

이 드라마는 최근 친북인명사전에 찬란하게 이름을 드높인 찬욱이 형님의 JSA공동경비구역이나 제규형의 태극기 휘날리며와는 그 궤를 달리하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분단의 비극이 빚어내는 사람들간의 관계가 핵심은 분명 아닌거 같다....

 

그럼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

 

슬픈 것은 이거다.....둘 중에 하나가 자기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면.....그들의 불편한 동거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거라는 거다.....그들의 우연한 만남자체가 이미 조직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였기에 가능한 거였다는 거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수 있으나 필연적으로 오해한다....

이해의 진동폭이 넓어지긴 위해서는 너와 나의 공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한규와 송지원은 우연적 상황에 의해서 공감의 폭을 넓힐수 있었고 그러하였기에 그들간의

인간애를 발현할수 있었던 게다......

 

여기서 질문하나.....

인간과 인간은 우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츄에이션에 의해서 구성되는 존재인가......

인간과 인간은 필연에 의해서 시츄에이션에 구애받지 않고 신념대로 행동하는 존재인가....

 

물론 그 답은 아무도 내릴수 없고 오랜 기간의 역사속에서도 검증받지 않은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합의가 필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모두가 나를 이해해주고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그렇게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크다.....ㅅㅂ....

 

내가 베푼 따뜻한 손길을 위협적인 당수로 받아들여버리면 이건 뭐.....답이 없는거다.....

 

전세계 사람들과 그렇다고 일일이 공감할 상황에 처해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빼밀리들하고만 이빠이 공감하면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단 내가 나를 잘 모르겠는데.....어찌 남을 이해하겠는가.....

 

환경에 구애받으나 환경을 극복할 능력도 있는 인간들......그 군상들.......

지긋지긋하기에 그 애증을 버릴수 없는 존재들의 삶......

 

내가 햄볶으려면 내 가족도 햄볶아야 되고 내 친구들도 햄볶아야 되고 친구의 친구도 햄볶아야 되고 내 주면사람들 직장동료들하고도 햄볶아야 되고.....그럴려면 모두가 햄볶아야 되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사회는 살기좋은 누구나 인간답게 살수 있는 그런사회가 되어야 하는거다...

일단 필요충분조건이 전제되어야 그 다음에 감정과 감정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 수 있는거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살기좋은 사회를 오늘도 꿈꾼다....

 

결론 : 의형제는 재미있다........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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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을 오시엔에서 봤다......

 

음.....영화 도중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해리포터가 꿈을 통해서 볼드모트의 범행을 예견하게 된다.

 

실제로 그 꿈은 현실로 발생하고 이를 통해 해리포터가 볼드모트와 정신적으로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덤블도어 할배는

내리게 된다..

 

아마 아직 볼드모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볼드모트가 해리와 연결되는 것을 알고 역으로 해리를 조종하기 전에

거기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마법을 배우라는 명령을 덤블도어 할배는 내리게 되는거....

 

근데 하필 그 마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해리를 조낸 싫어하는 스네이프 교수....

스네이프는 영웅취급당하는 해리 아빠를 조낸 싫어하고 그래서 해리도 싫어한다...

 

물론 친절하게 가르칠리가 없지....

 

너무 빡세게 가르쳐서 화가난 해리....

 

스네이프가 정신침입마법을 걸려고 하는 순간 빡돌아서 역마법을 걸어버린다...

 

이를 통해 스네이프의 기억을 훔쳐보게 된 해리.....

 

스네이프는 학창시절 왕따당했고, 왕따를 시키는 주범은 해리 아빠였다....

 

해리가 본 기억에 의하면 스네이프는 심성이 무척 여리고 고운 불쌍한 학생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에반해 해리아빠는 내가봐도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스네이프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자 여기서...우리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인정하면서 산다는 것....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주는것.....

 

서로간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몰것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중받고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다....

 

하지만 그런 보편성 아래서 침해당하는 개인의 입장도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이 지녀야 하는 보편적 인권의 존중을  지킬 경우 내 삶이 파괴될지도 모를 경우......그 좌절감과 저항감....

 

어제 산부인과를 보니....다운증후군 아이를 낳는 장면이 나왔다...

노산을 하게 된 산모였다...노산이다 보니 기대도 엄청 크고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온갖검사는 다해본다...

기형아 검사를 해보니 저위험군으로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의사가 한 마디 한다...

 

저위험군으로 나와도 기형아가 나올 확률이 20%정도 되니깐 검사를 해보자고.....

산모는 90만원이라는 검사비용도 아깝고 검사 자체의 위험성도 있어서.....

검사를 제끼자고 한다....

 

근데 하필이면 극히 낮은 확률이 로또처럼 당첨되버린다...

 

다운증후군 애가 태어나 버렸다....

 

보통의 경우 낙태가 불법이긴 하지만 다운증후군일 경우 낙태를 한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건 살인이니깐....다운증후군 애라도 낳아서 키우라고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럼 니가 한 번 키워보고 그렇게 말하라고 할수 있것다....

 

 

모든 인간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없고, 수많은 경험의 파편들을 종합해서 자아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내가 볼때는 당췌 이해할 수 없는 미친짓이지만......그 사람에게는 필연적일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있을수도 있는거쥐.....

 

날아라 펭귄이라는 영화를 보면 최주봉아들래미가 술도 입에 못대면서 심지어 채식주의자인 배우를 연기한다....

그가 채식주의가 된 이유는 어느날 밤 사온 조개가 입을 열고 닫으며 살아보겠다고 용을 쓰는걸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낱 음식으로만 생각했던 조개도 자기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그리도 애를 쓴다는 거였다....

 

그 후로 그는 채식을 고집한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회사 회식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술도 못먹고 고기도 못먹고.....

 

분위기나 망치는 스뤠기..........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그가 홧김에 술을 막퍼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병원에 실려가고 나서야.....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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