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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영화 파주는 불편한 영화이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요구하는 듯 하다.

중식(이선균)과 은모(서우)....

이야기의 축을 책임지는 두 주인공의 시선중 어느 것을 쫓아야 할 지 모르겠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해 허우적대는 중식이나 언니와 형부, 권력자인 나이트 클럽 사장같은 인간 군상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은모나.......

 

둘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둘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욕망이지 이루어지는 순간 더 이상 욕망이 아닌 것이다.

 

누구의 시선을 먼저 따라가 볼까....

음 중식의 시선을 먼저 따라가 보도록 하자...

 

중식은 운동권이다...하지만 그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모호하다..

수배를 받아 수감중인 선배의 집에서 선배의 와이프(중식이 사랑했으나 선배의 아내가 된)와 선배의 아기와 살고 있다.

중식은 시대적 마조히즘이 요구해서 만들어진 말그대로 '꿘'이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행복이 무엇인지 갈구할 틈도 없이...어느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은모는 중식에게 묻는다. 왜 이런짓을 하느냐고....

처음에는 멋져보였고 나중에는 하다보니 일이 자꾸 생긴다고 답한다....

여기에 중식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흔히 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안고가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는, 하지만 그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면서도 결국 되돌아가는.....

예수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있어야 행복해지는 걸까.....하지만 질 수 없음을 언제쯤 알게 될까??

 

선배아내와의 불륜을 벌이는 그 순간 방치된 아기는 끓는물을 뒤집어쓴채 화상을 입게되고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식은

파주에서 목회를 하는 선배의 집으로 다시금 도망친다....현실을 개혁하려는 운동권이지만 자신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해야하는

부조리의 연속....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

중식은 은모가 언니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될까봐 그 모든 죄의 굴레를 자신이 뒤집어 쓰려한다.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99마리 양이 평온할 때에야 비로소 한 마리 양에 대한 시선이 올곧게 투사될 수 있는거다...

 

철거촌 투쟁은 용산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옳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옳은 것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한다.

 

요즘 션과 정혜영이 나오는 공익광고가 있다.

누구나 해야된다고 생각하지만 하지 않고 있는 사랑의 실천,,,나눔의 연대......

용산참사에서도 사건의 본질은 호도된다.

철거민이라는 이익단체의 자기보전이라는 이기심이 불러일으킨 비극이라는 조중동식의 흑색선전....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안한 허구를 욕망한다.

불편한 진실속에 참가하는 순간 나도 불편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자괴감,,,,

중식의 포지션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지점.....중식이 파주에 있지 않았다면, 서울에 있었다면.....그는 철거촌 투쟁이 아닌 또 다른 투쟁속에

자신을 던져야 했을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지....의미도 알 수 없는 쳇바퀴굴리는 투쟁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작은 것이라도 내게 의미부여가 되고 나에게 삶의 충만함을 만끽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좋다....

 

작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여전히 흑백논리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운동을 하느냐.....운동을 접느냐.....

이러한 이분법의 자의적 해석.......바로 중식을 통해서 박감독은 이것을 지적하고 싶어하진 않았을까??

 

 

그러한 지점에서 보자면 은모는 훨씬 현명하고 훨씬 적나라한 고민속에 자신을 던져둔채 괴로워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언니, 그 언니와 결혼한 서울에서 온 대학생....

 

이런 비극적 현실 속에서 은모의 선택은 역시나 도피이다.

하지만 중식의 도피가 포장된, 즉 정의라는 외피를 뒤짚어 쓴 채 자신을 정당화하는 도피라면 은모의 도피는 자신을 있는대로 까발리며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는 인간적 도피이다.

 

은모에게 자신을 정당화할 외피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이트 클럽의 사장은 은모에게 또 하나의 오브제 a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상을 은모는 붙잡아야 할 지 버려야 할지 알지 못한다.

솔직히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하는 지점인 것이다.

 

은모는 왜 형부를 형부라 부르지 않았을까....

중식은 자신이 보호자의 포지션에 머무를때 은모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모가 자신을 형부라 부르는 순간 부모의 입장을 벗어나 수평적 관계의 회복으로 돌아선다..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는 이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관계로 전환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때 은모는 잡을수 없는 욕망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그 욕망을 집어 던지고 만다.

 

은모는 도피를 한다...그리고 되돌아온다. 그리고 또 도피한다...

왜??

 

영화는 은모의 귀환으로부터 시작해 은모의 도피로 막을 내린다.

우리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은모와 중식은 끝끝내 서로의 속내를 확인하지 못한다.

아니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군상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아마도 감독이 그러한 비약의 가능성을 암시했다면 파주는 그렇게 어려운 영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러한 호평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파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의 공간.....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인 공간....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 살고 있는걸까.....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으로부터 도피해야 하는가.....

 

이것이 파주가 우리에게 묻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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