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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슬라보이 지젝을 미워하는가

주체에 대한 짤막한 단상

 

코기토......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주체가 무지막지한 폭력성(동일성의 원리)때문에 서서히 추방되어 가면서 탈중심적 주체가 은근슬쩍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하지만 주관성의 우위만 주장하는 데카르트적 주체나 객관성만 주장하는 탈구조주의적 주체나 만족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데카르트적 주체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은 허위라는 생각에 도달했지만, 그런 결론은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이를 볼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하며, 가장 강력한 회의주의자의 가설조차 이 진리를 흔들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는 이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가 갖고 있는 철학의 제 1원리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68:53-54)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 라고 데카르트가 말할 때의 나는 개인, 즉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나'이다.

내가 사유에 속하는게 아니라 사유가 내게 속한다. 달리 말해, 코기토의 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이러한 추론 속에서 도출되는 개인은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하며, 제 자신에 대해 완전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자기 인식을 방해할 수 없는 자기 투명성(주관의 엄밀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나는 주변환경=객관세계에 영향을 받는 복종적이고 억압적인 객체가 아니라 주변환경을 내 방식으로 사유하며 지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고립된 섬으로, 자기 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의지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이제 객관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주체 모형의 파괴력은 현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한 가지 예만 살펴보더라도 동일성 철학이 가진 위험성을 잘 드러낸다.

가령, 최근까지도 여자는 정념과 감정에 지배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스스로의 주인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남성에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지 않은가..................

 

데카르트적 주체 철학의 전복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폴란드의 철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밝혀냄으로서 중심적 위치의 인간을 태양계의 주변부로 밀어내었다.

(물론 데카르트보다 코페르니쿠스가 앞선 시대의 사람이기는 하다.)

영국의 자연학자인 다윈은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적자생존설을 거쳐 진화론을 확립함으로써

인간이 동물과 분리되어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연의 지배를 받는 원숭이의 일종임을 주장했다.

또한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영역을 밝혀냄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삶 중 상당부분이 통제 불가능한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채워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연구성과들은 코기토를 붕괴시켜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주체를 찾으려는 노력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사뿐하게 예측이 가능할 터.......

이제 그 루트를 살펴보자.

 

탈구조주의적 주체

이제 주체는 자기 통제력을 가진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담론들이 엇갈리며 일으키는 효과이자 담론들이 발화하는

통로일 뿐이다.

주체의 의미는 탈중심화되어 있거나 주체의 외부, 즉 무의식적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적 담론 속에 있다. 주체는 이런 외부 담론들에

의해 강제 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제 자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주체는 지배이데올로기와 당대의 역사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탈구조주의'에서 주체는 보통 주체화로 환원된다. 즉, 주체는 근본적으로 비주체적인 과정의 효과로 인식된다. 주체는 언제나 전주체적인

과정들('글쓰기'의 과정, '욕망'의 과정)에 의해 포획 혹은 횡단된다. 여기서 강조점은 역사적 과정의 '주체' '행위자' '대역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살고' '경험하는' 개인들의 서로 다른 양태들이다. (sublime object of ideology 174p by 지젝)

 

하지만 이러한 모델은 객관 세계가 주관 세계를 너무나 깊숙히 침범하여 아무런 주체성도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완성된 주체라면,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개별성의 영역을 보존하는 동시에, 우리가 거쳐해야 할 장소로서 어떤 비개별성의 토대 위에 발을

딛고 있음으로써 둘 간의 생산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제 지젝이 코기토를 어떻게 읽어내면서 탈구조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지 살펴보자.

 

지젝은 완결된 코기토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코기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즉 방법적 회의라는 '방법'을 받아들인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즉 자연적 존재에서 문화적, 즉 주체적 존재로 형성되는 계기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연적 존재에서 주체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헤겔은 이 간극-사이존재-를 절반은 자연에 속해있고, 절반은 자연을 노예화하려는 '흑인negroes'상태로 명명했다.

지젝은 이 간극을 메울수 있는, 혹은 연결할 수 있는 매개로서 데카르트적 회의를 받아들인다.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을 세계와 단절시킨다. -명석판명한 명제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지젝은 바로 여기, 이 전면적인 철회의 제스처에서 자연에서 문화로 가는 감춰진 이행을 발견했다. 지젝에 의하면 이런 제스처는 광기의

일종 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씩 부정해가다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텅빈 공허한 상태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텅 빈 부정의 상태, 여기야말로

주체가 태동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즉 주체는 공백인 것이다.

 

지젝에 의하자면, 구조의 영향을 받는 객관적 존재에서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관적 존재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공백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백상태를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체가 데카르트처럼 회의를 일삼게 만드는 바로 그 동력은 무엇일까?

지젝은 그러한 과정이 헤겔의 생각처럼 변증법적 진화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광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라는 상징계에 주목하는 지젝의 사유를 엿볼수 있다.

만약 사물(대상)과 그것이 재현되는 표상(말, 언어)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다면, 그 둘은 동일화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체성의

여지는 사라지게 된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말은 애초에 우리가 사물을 살해(푸코를 참고하시라)한 한에서만, 말과 그것이 재현하는 사물 사이의 간극을 창출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간극, 자연과 그것에 함입된 존재들 사이의 간극이 주체이다. 

달리 말해 주체는 지젝의 용어로, 자연과 문화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사라지는 매개자'이다. 

 

다시한번 지젝의 도식을 정리해 보자. 

 

주관과 객관의 간극 = 실재와 상징의 간극 = 대상과 대상을 재현하는 말과의 간극

 

이 도식은 만고 내 생각이다. 아직 지젝의 사유를 다 모르니까 이렇게 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암튼 이런거 같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지젝이 간극을 메우는 동인으로 상정한 광기의 정체이다.

 

그 광기라는 것은 모든 개인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과정인가??

 

그리고 그 간극을 느낀 모든 존재는 '자신의 철회'라는 부정의 방법으로 그 간극을 해소하고자 하는가?

 

안나 프로이트의 학풍을 이은 미국의 자아심리학은 그 간극을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간극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주체의 지위를 자아의

지위로 격하시킴으로서 주관적 존재에 대한 열망을 지우고 구조적 개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식으로 개인의 안녕을 꾀하지 않는가?

 

만약 지젝의 사유가 단순히 논리적이기만 하다면, 그래서 현실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곤난하다.

 

매우 곤난하다.

 

만약 지젝이 말한 '광기'의 추동 동력이 현실적 토대, 즉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인 조건하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면,

인간적 조건(혹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상황)하에서는 주체성의 형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사회는 필연적으로 등장불가능

하다고 한다면, 그런 목적론은 한물 간거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인간의 해방은 그 논리적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 여기까지해서 이만 의문을 접고 지젝의 사유를 계속 쫓아가보도록 하자.

 

 

 주체의 계보학에서 지젝이 참조한 중요 철학자중 한 사람이 바로 셸링이다.

(요술 공주 셰리의 조상일지도 모른다 ㅡ,.ㅡ)

지젝이 보기에 셸링은 철학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기능한다.

셸링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비가시적 연결고리로서, 이전의 관념철학이 지닌 형식에다가 이후 프로이트, 니체, 맑스가 제기한

유물론적 내용을 도입한다.

 

지젝은 셸링의 [세계시대]라는 저서의 두 번째 초안 분석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알다시피 신의 탄생에 대한 구절을 성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면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셸링은 태초이전의 상태, 카오스적 상태를 입증한다.

 

이러한 카오스적-정신병적 상태의 우주, 맹목적 충동의 반복과 불규칙적 맥동의 상태야말로 현실의 궁극적 기반, 모든 것의

토대이다. 어떤 것도 이 '무nothing'을 앞서지 않는다.

 

신god은 이러한 혼돈(자유)의 상태의 일부였다. 

신은 아직 개별존재가 아니라 비존재의 상태를 즐기는 순수한 무nothing였다. 

 

여기가 중요한 지점이다. 

신의 존재는 근원적 토대, 즉 현실의 근거 중 일부이지 아직 스스로 독립된 본체가 아니다. 

신이 독립성을 쟁취하려면 그 자신을 토대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철학의 제1원리, 곧 '존재의 확고한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시도한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주장대로 신이 자기 존재의 토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한정된 내용을 파괴하는 것, 

세계로부터 철회하는것, 

그 자신에게서 토대를 축출하는 것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행위를 신성한 광기의 한 형식, 헤겔이 말한 '세계의 밤'의 광기와 유사한 것으로 설명한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먼저 광기의 위험을 겪어야 한다. 

카오스의 상태에서 신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사라지는 매개자', 즉 이 밤의 광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젝의 중요한 모티프인 '주체'가 형성되는 방식이, 상실, 자신의 철회, 자신의 토대 혹은 본질 자체의

축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의 주체는 언제나 자신의 상실을 회복하려고 하는 향수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주체가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주체 외부에 남아있어야한다. 

달리 말해, 주체는 주체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외재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앞서 살펴본 주관적 주체와 객관적 주체 모델처럼 주체가 대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연루되어 있다. 

주체는 자기 외부의 대상이다. 

 

주체는 지젝이 라캉을 따라 표현한 외밀함이라는 용어로 함축되어 표현될 수 있다. 

외밀함ex-timacy은 외재적인과 내밀함을 합성한 말이다. 

 

이 외밀함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주체의 존재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우리의 안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안구만은 볼 수 없다. 안구를 보기 위해서는 안구를 투사해주는 거을을 보아야 한다. 

 

주체의 위치가 바로 여기이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으며, 오직 현실의 '거울'속에서만 비치는, 현실에 비치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거울은 무엇인가...

정답은 언어이다. 

 

정확히 말은 어떻게 반복적인 맥동의 긴장을 해소시키며, 수축과 팽창의 적대를 중재하는가? 말은 정확히 대립물, 즉 팽창의 모습을 

한 수축이다. 다시 말해서, 말은 하는 가운데 주체는 자기 존재를 외부에 수축시킨다. 주체는 외재적 기호속에서 자기 존재의 중핵을

응고시킨다. (언어적)기호속에서 나는, 말하자면 내 외부에서 내 자신을 발견한다. 즉 나는 나 자신의 바깥, 나를 대리 표상하는

기표속에서 나의 단일성을 정립한다.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 셸링과 제 문제에 대한 에세이 The Indi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1996))

 

이렇듯 내가 나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는 더이상 자기동일적이지 않다. 

나를 표상하는 기표는 단지 나의 대리 표상일뿐 실제의 나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온전히 주체가 되고자한다면, 나는 이런 회복불가능한 상실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nothing이 아니라 something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실, 즉 철회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외재화되는 장소는 말word 태초를 언명한 말씀이다.

지젝은 카오스에서 말의 언명으로의 이행을, 실재계에서 상징계의 이행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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