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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24
    (1)
    냉커피
  2. 2010/05/24
    예술의 위대함(1)
    냉커피
  3. 2010/05/17
    각종 발췌(1)
    냉커피
  4. 2010/05/09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1)
    냉커피
  5. 2010/05/09
    판단력 비판(칸트랑 완전 무관.....ㅋ)
    냉커피

영진위 심사에서 떨어진 이창동 감독의 시가 칸에서 상을 받았군여.....

 

영진위가 국제영화제에서 출품이 가능한 예술작품을 지원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마스터 영화제작 지원사업에서는 2번이나 기준미달로

 

탈락한 작품이 칸에서는 각본상을 받다니요....

 

언제쯤 칸도 우리나라 영진위만큼의 수준을 갖추게 될까요.....

 

우리 영진위가 수준미달로 탈락시킨 작품에 상을 주다니......쯧쯧.......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습군요..............

 

정말 시적인 상황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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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위대함

항상 시비만 가리는 것보다 가슴을 먼저 적시는게 훨씬 훌륭한거 같아요......

 

이성적 판단을 하는 나와 감성적 판단을 하는 나는 동일하니깐요.....

 

이성적으로 옳아도 감정적으로 그 사람이 싫어서 전면적으로 거부하기도 하자나요....

 

옳드 그르든.........그닥......

 

우리를 지배하는 심리적 저항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자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을 먼저 흔드는게 더 쉬운 방법인거 같애요.....

 

어제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영화든 드라마든 우리는 수동적으로 볼 수밖에 없잔아요....

 

그런식의 닥치고 즐감, 후 감상문 제출........좋네용....

 

대화할때는 잘 안되잖아용....

 

소통할 때도(사회적 소통도) 그러면 좋을텐데......

 

감성이 지배하는 영역을 짐짓 아닌척하면서 감정적 거부를 이성적 거부인양 논리적 거부인양 포장해버리자나요....

 

제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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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발췌

당신의 목표는 임금노동의 노예?

-로날트 블라쉬케의 라이너 로트의 조건없는 기본소득 비판에 대한 반비판 진보평론 39호 2009년 봄호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권리에 대한 국제조약 3부8조(1966)

누구도 강제노동 혹은 의무노동을 하도록 강제되어서는 안된다.

 

 

국제노동기구의 강제노동 혹은 의무노동에 대한 협정91930)

누군가에 의해 그 어떤 처벌위협으로 요구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에 맡겨지지 않은, 모든 노동 혹은 서비스는 강제노동 혹은 의무노동으로 간주된다.

 

 

임금노동은 소외되지 않고 자유로운 연합과 협력에 근거한 인간의 자기활동의 반대이다.

소외되지 않은 따라서 인간의 자기활동의 본질은 칼 맑스에 의하면, 자기활동의 자유로운 선택성, 활동의 목적에 대한 그리고 활동을 위해 필요한 수단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가능성이다. 더 나아가서 노동 저편의 활동들은 물질적 필연성과 외적 합목적성과 독립적으로 실행된다.

 

 

맑스의 경철수고에서 발췌

만약 그가 부자유스러운 활동으로서의 그 자신의 활동과 관계한다면, 그는 다른사람에 대한 굴종, 강제, 지배하에 있는, 예속의 활동으로서 그 자신의 활동과 관계하는 것이다......그가 그 자신의 활동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는 것처럼, 그는 낯선 자가 그 사람에게 본래적이지 않은 활동을 제 것으로 하도록 한다.

 

우리는 물론 사적소유의 운동의 결과로서의 국민경제학으로부터....외화된 노동 개념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 개념의 분석에서 만약 사적 소유가 외화된 노동의 원인으로, 근거로 나타난다면, 사적 소유가 오히려 외화된 노동의 결과라는 것이 드러난다. 마치 신들 역시 원래 인간의 이성오류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처럼 말이다. 후에 이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바뀐다.

 

 

 

따라서 소외된 노동과 이에 조응하는 종속관계들은 자본과 자본관계들에 대한 근본적 전제이다. 그것들은 맑스에 의하면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임금노동관계들, 자본관계들은 그들이 매일 그들의 행동을 통해 재생산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단순 소유로서 그리고 임금정치적이자 협정임금정치적 문제로서의 이러한 관계들의 ‘사물화’는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따라서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실제로적 해방적인 문제제기를 소실시킨다. 그리고 어떤 이들을 위해서는 최저임금으로 구체적인 임금노동조건들을 단순히 개선하고, 다른 이들(시장-예비군 지위에 있는 임금노동자들)을 위해서는 국가의 강제와 결합된 최저소득으로 빈곤-상태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접근은, 임금노동관계들/자본관계들 너머를 가리키지 못한다. - 그것은 사람들을 이 종속관계들에 고정시킨다. 종속적인 고용활동자를 위함 최저임금과 실업자를 위한 최저소득은 반자본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인간은 다름 아닌 대상적 세계의 가공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증명한다. 이 생산은 그의 활동적인 유적 생활이다. 이 생산에 의하여 자연은 인간의 작품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현실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 생활의 대상화이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의 생산의 대상을 빼앗음으로써 그의 유적 생활, 즉 그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빼앗고, 동물에 대한 그의 장점을 단점으로 변화시켜 그의 비유기적 몸, 즉 자연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경철수고 박종철 출판사 79페이지

 

 

 

맑스의 혁명적 사고-자본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방식을 드러냄으로서 역사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변증법을 보임

맑스의 한계-노동을 인간의 본질이자 역사의 본질로 보는 노동중심주의적 사고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근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

 

 

 

맑스의 네 가지 소외

1. 노동자는 낯선 물건과 관계를 맺듯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과 관계를 맺는다. 그 생산물은 노동자 위에 서 있으며, 독립된 힘으로 노동자와 대립한다.

2. 노동자는 생산이라는 활동 자체에서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는 그의 일을 그의 진짜 삶의 일부로 여기지 못함으로 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3.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조화로운 노력들이 배제된 노동에서 그의 유적 생명, 그의 사회적 본질을 박탈당한다.

4. 인간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의 소외로 인해, 맑스가 아래 인용문에서 쓰고 있듯, 노동은 역설적으로 존재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서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이 점은 틀림없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그것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움막집을 생산한다. 그것은 미를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불구를 생산한다. 그것은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인 노동으로 되던지며, 또 다른 일부를 기계로 만든다. 그것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정신박약과 백치병을 생산한다.

경철수고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75페이지

 

 

예컨대, 가정 내의 일과 같이 우리가 사적 영역에서 행하는 자활노동(work for oneself)은, 따라서, 임금노동과 동일시 될 수r 없다. 왜냐면, 자활노동은 자기 자신의 유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형성한 생활공동체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봉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은 사회의 필요의 영역에 종속되지 않을때에 한해, 사회적 관계의 시스템을 지탱하거나 재생산하기 위해 사회적 노동의 과정속으로 들어가지 않을때에 한해, 적실하고 내재적인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 사적 영역의 의미는 자신의 삶과 뜻을 사회의 목표에 종속시키지 않아도 되는, 서로 특별한 사람들로서 존재하는 개인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 『capitalism, socialism, ecology』53-54 chris turner(london verso1994)

 

 

경제적 이성에 의한 합리적 이유들 때문에 임노동wage work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서로를 위한 진정한 노동work을 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위한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 고르의 판단이다.

노동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정의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사람은 스미스였고, 그것이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가치의 원천이라고 말한 사람은 리카르도였다. 또 이러한 노동 개념을 확장하여 절대정신의 활동에까지 적용한 사람은 헤겔이었다. 맑스의 인간본질은 노동이라는 명제는 이러한 영향하에서 이루어졌다.

 

스미스는 노동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척도로서 간주한다. 그것은 부를 표상하는 여러 가지 척도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부를 비교하고 평가하게 해주는 단일한 척도이며, 주관적인 가치평가에 좌우되는 표상의 일종이 아니라 표상의 외부에 있는 객체적이고 불변적인 척도인 것이다. -국부론, 스미스, 김수행역, 상권 동아출판사1992 36쪽이하

 

 

 

리카르도는 여기서 좀더 심층으로 밀고 들어간다. 즉 노동은 가치를 측정하는 절대적 단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해주는 원천이다. 생산활동으로서 노동이 바로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가치는 부를 표상하고 표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생산물이 되었다. 노동은 척도에서 기원과 생산의 차원으로 그 위상을 바꾼다. 노동은 모든 가치의 기원이며 생산자라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 분석의 중심은 교환에서 생산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시장이나 교환을 다루는 유통이론에 앞서 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생산이론이 일차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스미스와의 이러한 차이는 보통 스미스의 지배노동가치설과 투하노동가치설이라는 말로 표시된다. 즉 리카르도는 스미스의 가치개념이 어떤 생산물이 시장엣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이라고 보는 것을 비판하면서, 어떤 생산물에 투하된 노동량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함으로서 상품간의 상대적 비교관계에서 가치 개념을 독립시켜 절대화한다.

리카르도-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정윤형 역 비봉출판사 1992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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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4장 우울증과 행동에서 일부 발췌

 

 

결여는 상실과 다르다.

 

결여는 원래부터 없던 거고, 상실은 있던 것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자는 자기 증상의 원인이 결여가 아니라 상실이라고 착각한다.

우울증자의 욕망의 대상은 공허한 결여에 불과할 뿐 그 자체는 실존하지 않는 순전한 왜상적 실체에 불과하다.

 

 

조르조 아감벤은 우울증과 애도를 대비시키면서 우울증이 어째서 애도작업의 실패, 즉 대상이라는 실재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이기도 한지 강조해 왔다.

“대상의 상실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한발 앞서 애도하고자 한다는 점에 우울증의 역설적인 성격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울증의 책략이다. 즉 우리가 이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애초부터 상실된 상태였던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는 어떤 대상을 마치 그것이 이미 상실된 것인양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자는 애도 작업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그와 정반대의 형식으로, 즉 아직 대상이 상실되지도 않았을 때조차 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애도를 표하는 거짓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하게 된다.

 

 

집시에 대한 오래된 인종차별적 농담

비가 오면 집시들은 즐거워한다. 비가 그치면 언제나 태양이 비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날이 좋으면 그들은 슬퍼한다. 햇살이 비친 다음에는 언젠가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이렇다. 애도하는 자는 대상의 상실을 상징으로 만듦으로서 그것을 ‘두 번째로 죽인다.’ 이에 반해 우울증자는 단순히 그 대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인 것이 아니라, 대상이 상실되기도 전에(이미 상실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그 또한]대상을 두 번 죽이는 자라고 해야 한다.

 

우울증자는 상실한 대상에 고착되어 있어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없는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그러나 그 대상을 욕망하게끔 만들었던 원인이 철회되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해 버린 주체이다.

 

지젝은 글은 가끔 당혹스럽고 대체로 재미있고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젝의 글은 현란한 수사구로 무장되어 있지만 결론이 없어.

 

난 결론을 내지 않아서 지젝이 좋다. 내지 못하는게 아니라 결론을 유보하고,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논의를 더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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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 비판(칸트랑 완전 무관.....ㅋ)

 

나는 무슨무슨 주의자야----난 이런 사람이야---넌 이래--- 라고 단정하는 것의 의미. 그 정체,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정말 자신이 그러하다고 스스로 믿고 싶은걸까? 아니면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 오지마. 그냥 날 .....주의자 정도로만 인식해줘. 벽을 치는걸까?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무지한데서 오는 당혹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걸까. 마치 검은 안경을 끼고 있으면 검은색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보려고 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이 교차하는 매직미러앞에 서면 내가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는 난쟁이가 되기도 하고 키다리가 되기도 한다.

 

다양한 선배들이 서로 옷을 사주겠다고 난리들이다. 하지만 난 그 옷이 어떤 옷인지 보다는 옷을 선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다. 결국 내가 고른 옷, 아니 내가 고른 선배는 맑스라는 브랜드의 옷을 사온 ‘말쑥하고 점잖으며 지적인 듯 보이는 사람’이다. 난 어려서부터 쭈욱 그 옷만 입게 되었다.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 선택에 대한 무지와 오류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 선배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하지만 내 키는 커가는데 반해 그 옷은 늘어나지가 않는다.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선배가 사준 옷을 내가 감사히 잘 입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작아져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든 아니면 늘려 입던 것두 아님 집에 고이 간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옷에 익숙해진 '나'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선배에 대한 거절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당췌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우리는 이차원적 인간이 아니다. 4차원적인 좌표평면위에서 우리의 연속성이 이루어진다.

 

 

‘수많은 종속변수를 다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전제하에서 말하자면.....그 모델은 이러이러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경제모델에서 이러한 도식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비웃으면서 난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다 고려하지 못하니까 그것은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과학이 아니라 제안에 불과한거 아냐? 사회적 담론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에 불과한거 아니냐고?

 

 

경제모델만 그러할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선형적 인과성만으로 우리의 행위와 선택을 설명하려는 것은 오히려 무지한 것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계기들과 환경들, 관계들이 뒤섞인 진흙탕속에서 우리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러한 다양한 종속변수들은 모조리 외면되고 제일 그럴듯한 한 가지 인과성만이 그 이유로 포장된다. 바로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오해는 태어나고 자기기만 또한 시작된다.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이 말을 누구한테 듣던 내 반응은 과연 동일할까? 물론 아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객관적으로 내용만을 보는게 아니라 ‘누가’ ‘어떤 맥락에서’ ‘왜’ 그 내용을 말하는지도 함께 고려한다는 것이다.

 

 

 

시퀀스1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가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한다.(애정어린 목소리리로)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내 대답: 휴우...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관성이라는 걸 선택하는 순간 수 많은 가능성과 수 많은 동지들을 적으로 돌릴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상황상황에 대처하도록 절 이끌고 있네요. 맥락이라는 녀석을 받아들인 후부터는 경계라는 걸 만들기가 참 어렵네요.

 

 

 

시퀀스2

내가 재수없어하는 말많은 선배놈을 만났다. 그 넘이 술쳐먹고 나한테 씨부린다.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내 대답: 너나 잘해 게쉑히야....

 

 

결론....

판단할 때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자. 일단 컨텐츠를 먼저 엄밀하게 살피고 그에 대한 1차 판단을 내린후에 맥락과 발화수행자를 살피자. 그러면 좀 더 공정한 판단이 가능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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