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0/05/09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09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1)
    냉커피
  2. 2010/05/09
    판단력 비판(칸트랑 완전 무관.....ㅋ)
    냉커피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4장 우울증과 행동에서 일부 발췌

 

 

결여는 상실과 다르다.

 

결여는 원래부터 없던 거고, 상실은 있던 것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자는 자기 증상의 원인이 결여가 아니라 상실이라고 착각한다.

우울증자의 욕망의 대상은 공허한 결여에 불과할 뿐 그 자체는 실존하지 않는 순전한 왜상적 실체에 불과하다.

 

 

조르조 아감벤은 우울증과 애도를 대비시키면서 우울증이 어째서 애도작업의 실패, 즉 대상이라는 실재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이기도 한지 강조해 왔다.

“대상의 상실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한발 앞서 애도하고자 한다는 점에 우울증의 역설적인 성격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울증의 책략이다. 즉 우리가 이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애초부터 상실된 상태였던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는 어떤 대상을 마치 그것이 이미 상실된 것인양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자는 애도 작업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그와 정반대의 형식으로, 즉 아직 대상이 상실되지도 않았을 때조차 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애도를 표하는 거짓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하게 된다.

 

 

집시에 대한 오래된 인종차별적 농담

비가 오면 집시들은 즐거워한다. 비가 그치면 언제나 태양이 비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날이 좋으면 그들은 슬퍼한다. 햇살이 비친 다음에는 언젠가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이렇다. 애도하는 자는 대상의 상실을 상징으로 만듦으로서 그것을 ‘두 번째로 죽인다.’ 이에 반해 우울증자는 단순히 그 대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인 것이 아니라, 대상이 상실되기도 전에(이미 상실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그 또한]대상을 두 번 죽이는 자라고 해야 한다.

 

우울증자는 상실한 대상에 고착되어 있어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없는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그러나 그 대상을 욕망하게끔 만들었던 원인이 철회되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해 버린 주체이다.

 

지젝은 글은 가끔 당혹스럽고 대체로 재미있고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젝의 글은 현란한 수사구로 무장되어 있지만 결론이 없어.

 

난 결론을 내지 않아서 지젝이 좋다. 내지 못하는게 아니라 결론을 유보하고,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논의를 더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거

같아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판단력 비판(칸트랑 완전 무관.....ㅋ)

 

나는 무슨무슨 주의자야----난 이런 사람이야---넌 이래--- 라고 단정하는 것의 의미. 그 정체,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정말 자신이 그러하다고 스스로 믿고 싶은걸까? 아니면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 오지마. 그냥 날 .....주의자 정도로만 인식해줘. 벽을 치는걸까?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무지한데서 오는 당혹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걸까. 마치 검은 안경을 끼고 있으면 검은색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보려고 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이 교차하는 매직미러앞에 서면 내가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는 난쟁이가 되기도 하고 키다리가 되기도 한다.

 

다양한 선배들이 서로 옷을 사주겠다고 난리들이다. 하지만 난 그 옷이 어떤 옷인지 보다는 옷을 선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다. 결국 내가 고른 옷, 아니 내가 고른 선배는 맑스라는 브랜드의 옷을 사온 ‘말쑥하고 점잖으며 지적인 듯 보이는 사람’이다. 난 어려서부터 쭈욱 그 옷만 입게 되었다.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 선택에 대한 무지와 오류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 선배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하지만 내 키는 커가는데 반해 그 옷은 늘어나지가 않는다.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선배가 사준 옷을 내가 감사히 잘 입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작아져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든 아니면 늘려 입던 것두 아님 집에 고이 간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옷에 익숙해진 '나'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선배에 대한 거절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당췌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우리는 이차원적 인간이 아니다. 4차원적인 좌표평면위에서 우리의 연속성이 이루어진다.

 

 

‘수많은 종속변수를 다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전제하에서 말하자면.....그 모델은 이러이러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경제모델에서 이러한 도식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비웃으면서 난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다 고려하지 못하니까 그것은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과학이 아니라 제안에 불과한거 아냐? 사회적 담론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에 불과한거 아니냐고?

 

 

경제모델만 그러할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선형적 인과성만으로 우리의 행위와 선택을 설명하려는 것은 오히려 무지한 것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계기들과 환경들, 관계들이 뒤섞인 진흙탕속에서 우리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러한 다양한 종속변수들은 모조리 외면되고 제일 그럴듯한 한 가지 인과성만이 그 이유로 포장된다. 바로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오해는 태어나고 자기기만 또한 시작된다.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이 말을 누구한테 듣던 내 반응은 과연 동일할까? 물론 아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객관적으로 내용만을 보는게 아니라 ‘누가’ ‘어떤 맥락에서’ ‘왜’ 그 내용을 말하는지도 함께 고려한다는 것이다.

 

 

 

시퀀스1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가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한다.(애정어린 목소리리로)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내 대답: 휴우...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관성이라는 걸 선택하는 순간 수 많은 가능성과 수 많은 동지들을 적으로 돌릴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상황상황에 대처하도록 절 이끌고 있네요. 맥락이라는 녀석을 받아들인 후부터는 경계라는 걸 만들기가 참 어렵네요.

 

 

 

시퀀스2

내가 재수없어하는 말많은 선배놈을 만났다. 그 넘이 술쳐먹고 나한테 씨부린다.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내 대답: 너나 잘해 게쉑히야....

 

 

결론....

판단할 때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자. 일단 컨텐츠를 먼저 엄밀하게 살피고 그에 대한 1차 판단을 내린후에 맥락과 발화수행자를 살피자. 그러면 좀 더 공정한 판단이 가능할 거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