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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5
    악셀 호네트 정의의 타자
    냉커피
  2. 2010/03/14
    정의의 타자-사회적 병리현상 정리-
    냉커피

악셀 호네트 정의의 타자

정의의 타자

하버마스와 탈근대의 윤리적 도전

 

 

탈근대의 문제제기

1. 동일성이념에 반대-인간의 자유확대

2. 단순한 질서파괴에 반대-윤리적 무관심에 반대

대안-형이상학 비판을 인도할 규범적 정치적 지향 필요

 

 

탈근대론의 윤리

특수한 것, 이질적인 것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념이 출발점.

그러한 윤리는 비동일자를 적절히 다루어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충족함

문제점

1. 특수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2. 도덕적 보호의 종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다양한 대답

1. 사회적 평등 실현의 확대

2. 윤리적 민감성의 증대

3. 사람들 사이의 비대칭적 의무

 

호네트는 3번관점이 칸트 전통을 잇는 근대 도덕이론들에 대해 참된 도전을 의미하는 탈근대윤리의 형식이 될수 있다고 봄.

정의의 타자=인간적 배려

 

 

호네트의 이론전개

1. 리요타르의 윤리학은 담론윤리에 포섭됨을 보여주면서 비판

2.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 기대는 스테판 케이 화이트의 연구제시. 하지만 이 관점도 담론윤리틀안에 재생산 가능

3.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저작에 기대어 제시한 윤리적 반성이 대안. 데리다의 반성은 구체적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관련해 평등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고 긴장관계에 있는 관점을 보여줌.

 

 

1. 리요타르

칸트를 겨냥한 상쟁과 탈근대적 지식이라는 저작.

형이상학의 종말-보편적 이성의 종말=마르크스주의의 거대서사 종말

이성의 우위는 역사철학이 이성에 해방적힘을 부여한다는 상황에 이성이 기생함으로 타당성 확보

 

언어이론을 통한 비판

모든 담론은 독자적 증명논리를 가지는데 그것은 서로간에 불의를 행사하고 있음.

언어체계안에 인간주체 재도입

예: 한 말놀이가 다른 말놀이로 번역되지 않음으로 생기는 불의

1. 노동자의 언어가 경제적 효율성의 언어에 종속

2. 나치 수용소 생존자가 형식법 담론안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음.

 

리요타르 도덕철학의 핵심

특정종류의 담론이 우위를 보이는 상황을 극복하자

1. 무시와 소외를 겪는 말놀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고발적 윤리학.-결실맺기 어려움

2. 소외된 말놀이의 사회적 의사소통을 개방하자

 

1번은 아도르노식의 자기포기적 한계 때문에 피해야 하는 관점

2번은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에 포함되어 버림.

 

 

하버마스의 윤리학

칸트의 절차주의적 도덕윤리의 계승(정언명법은 고립된 당사자 상정)+인간의 언어적 상호주관성 고려

행위주체가 요구하는 실천적 규범의 보편타당성 여부는 행위주체들간의 공론장에서의 절차적 소통을 통해 확보됨-평등한 의사소통기회의 확보가 전제

 

리요타르의 논의는 억압된 말놀이의 해방이 가능하기 위해 절차적 규범이라는 담론윤리에 포섭됨을 확인할 수 있음.

 

 

 

민감한 도덕적 감수성에 대한 고찰

 

탈근대윤리학 정초를 위해 화이트는 타자의 고유성에 대한 무시를 문제삼는다. 그의 반성의 출발점은 칸트전통의 도덕적 보편주의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

근대의 윤리적 사유는 실천적 결과가 없는 행위는 도덕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있음.

비판-칸트는 실상 행위의 도덕적 질을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의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에 대한 책임개념으로 논박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

 

화이트의 논의는 근대철학의 사태를 고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

화이트 사상의 논거는 아도르노, 니체, 하이데거에서 발견

근대 도덕이론은 행위에 고정됨으로써 잠재적으로 타자의 고유성을 추방한다.

하이데거-초연한 내맡김 Gelassenheit

아도르노-모방적 반응 mimetische Reaktion

화이트에 의하면 두 개념 모두 행위를 억제하고 대립자의 고유성에 주의력을 향상시키는 태도를 가르킴

타자와 그러한 태도를 취함으로 타자를 도덕적 의무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인격이 지닌 모든 차이를 고려하면서 타자를 인식하게 됨.

개별적 특수성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화이트가 제시하는 방안-덕론의 가공=배려

 

덕론의 역할

1. 타자에 대한 민감성의 증대

2. 평등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으로서의 민감성

로티와 유사한 발상. 로티는 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규범적 개선의 제도화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불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가능-미학적 감수성의 찬양

로티가 예술가의 감수성만을 신뢰한 반면 화이트는 그런 능력을 개별주체의 인륜적 능력으로 뿌리내리고 싶어함.

하지만 이러한 화이트의 윤리학은 칸트의 상호주관성 도덕이론과 보완관계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상호주관적 논증의 주고받기와 아주 유사

하버마스와 화이트는 모두 개별 개인의 고유성을 규범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기회는 단지 우리가 행위의 문제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직접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도덕적 판단을 내릴경우에만 가능함.

 

즉 화이트는 새로운 도덕원칙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평등의 이념을 민감성을 가지고 적용해야 한다는 관점

이러한 윤리학은 덕이라는 관점이 하나의 행동방식으로 규범적으로 높게 평가된다는 점

그렇다면 완전히 중립적이고자 하는 담론윤리와 얼마나 결합이 가능한가하는 문제 발생

이러한 역지사지의 관점은 인지적인 것인가 정서적인 것인가

정서적이라고 한다면 하버마스의 비판이 가해진다. 도덕담론은 우연적 정서적 결속에 의존하고 타당성에 근거한 진리추구라는 기능을 상실함.

 

 

또 다른 쟁점

도덕적 담론이 일정한 행동유형에 의존하는 것은 경험적 방법인가 규범적 방법인가

1.경험적 방법-하버마스

도덕적 논증에 참여하게된 의사소통행위는 역사적 학습과정의결과이다

2.규범적 방법-하버마스 비판=부정합적

그러한 속성은 경험에 의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속성

 

어쨌든 화이트의 윤리학은 하이데거에 기대어 윤리적 민감성의 증대라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담론윤리에서는 도덕적 담론에 참여하기 위한 인격적 전제라고 내세울수 있는 의사소통 덕목의 중심요소이다.

 

 

 

데리다의 방법론

리요타르가 사회내의 갈등을 윤리적으로 의식화하려는 것이든, 화이트가 개별적 인격의 개인적 특수성을 강조한 것이든 이 모두는 하버마스가 칸트의 의도를 상호주관성이론적 전제위에 발전시킨 도덕이론의 발상을 못벗어남

왜냐하면 모든 주체가 자신의 개별성을 강제없이 표현할수 있다는 보편적 이념이 전제되어야만 상호적 이해도달의 장애나 타자의 특수성에 대한 정서적 개방을 이야기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평을 데리다는 넘어선다.

 

데리다는 개인적 특수성을 정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대체하려고 하지 않음.

오히려 평등이념에 생산적 대립의 관계를 가지는 관점만이 타자의 차이를 인지하게 해줌.

긴장관계의 필요-엄청난 윤리학적 부담

데리다 윤리학의 전개를 위한 예시

우정의 정치=우정안에서는 대칭적 의무가 없는 비대칭적 책임원칙이 지배

 

우정의 이중적 역할

1. 비대칭적 의무를 수용하라고 호소할수있는 존재

2. 보편적으로 도덕적으로 존중해야할 존재

=긴장관계의 공존

 

하지만 왜 이러한 관계가 도덕적 경험영역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지 드러나지 않음.

데리다는 근대법의 형식으로 설명을 시도함.

근대법이 구체적 경우에 적용되면서 다루는 반성을 주목

정당한 관점을 구현하는 두 가지 책임원칙이 충돌하는 속성을 우정의 정치와 공유한다고 봄

 

 

데리다의 논증

1. 근대법의 규범적 출발점-법적 주체의 자유를 행사하기위해 평등을 보장한다는 이념에 따라 이해갈등을 규제해야함

문제-매 경우 무엇이 어떤 관점에서 평등해야 하고 또 무엇이 불평등해야 하는지 해명요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해석상의 문제 등장=법적용은 개방적, 해석학적, 절차적 성격

 

2. 데리다는 법적용의 실천이 지향하는 것은 평등원칙이 아니라 구체적 타자의 무한성에 대한 정의의 이념이라고 본다.

 

우정과의 유사점은 정의는 무한하고 계산할 수 없고 모든 규칙에 반항적이고 대칭에 대해 낯설고 이질적이며 독특하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의 적용은 비교할 수 있고 명문화되어 있고 계산할 수 있고, 정리되어 쓰여진 부호화된 조항들의 체계이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개별적 타자성의 정의가 확립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정의 비대칭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근대의 형식적 권리의 체계를 문제삼는 사회적 수준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그러한 사랑의 인정유형에 해당하는가?

여기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사유를 빌려온다.

 

레비나스는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존재영역에 앞서 실존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존재론과 윤리학의 관계를 거꾸로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레비나스 사유의 단계

1. 타자의 얼굴을 통해 무제약적 배려를 경험-무한성에 대한 세계내적 경험

2. 중립적 관찰자의 관점-수많은 배려의무들 사이에서 어떻게 공정하게 처신할지의 판단의 심급이 필요=보편화된 제3자=칸트적 정의와 유사

평등과 배려의 관계에서 상위의 심급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긴장관계를 경험한다.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법과 자비라는 두 개의 긴장관계로 본 관점을 평등과 배려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여기서 차이는 레비나스는 법과 자비의 지속적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데리다는 평등과 비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도덕적 지향의 원천이라고 본다.

데리다는 두 개의 도덕적 관점이 폭력적이고 해소될 수 없으며, 그러나 또한 동시에 생산적이기도 한 갈등관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결론

하버마스 역시도 평등과 배려라는 관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길리건의 비판에 의해서

길리건은 칸트의 담론윤리가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의무를 무시한다고 보았다.

절차적으로 타당한 실천적 담론의 대칭성은 배려를 배후로 밀려나게 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도움주기나 이웃사랑이나 자발적 원조와 같은 도덕원칙들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와 연대라는 논문에서 연대라는 관점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다. 하버마스가 정의의 타자라고 규정한 이 원칙은 다른 인간의 실존적 운명에 대해 정서적 차원까지 포괄하는 관심이라는 특징을 배려와 공유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개별적 관심이 모든 인간존재에 똑같이,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특권이나 비대칭성도 없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배려와 구별된다. 즉 연대는 정의의 또다른 측면인데 왜냐면 연대관계에서 모든 주체는 평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의사소통적 삶의 형식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서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는 그것이 형성되는 동기나 경험이 불명료하다. 그러한 연대의식이 생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가치공동체를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연대를, 하나의 공동체가 생길 때 어떤식으로든 따라다니는 특수주의의 요소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평등과 달리 연대는 보편적 이념이 아니라 추상적-유토피아적인 것인데 그것은 공동체 성원들이 윤리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목표를 위해 통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또한 특수한 부담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추상성 때문에 연대는 일방적 배려와 도움주기의 형식으로 언제나 우리의 사회를 초월하는 요소를 형성하고 있는 배려를 대체하는 보편적 이념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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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타자-사회적 병리현상 정리-

호네트 정의의 타자

 

논문 1-사회적 병리현상[사회철학의 전통과 현상황]

 

사회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역할이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잘못된 사회적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에서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요구와 과제를 밝히면서 이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인접학문분야와의 연관성을 명확하게 할 것임.

1. 사회철학의 과제를 사회적 병리로 판단하는 사유전통의 윤곽을 밝힘.

출발점은 문명비판을 수행한 장 자크 루소.

2. 이러한 전통이 풍부해진 것은 경험적 연구를 주도하는 사회학의 등장.

사회학 이후 사회철학의 구상이 파시즘과스탈린주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탐구할 정도로 거대한 구상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논의

3. 결론적으로 역사적 고찰의 성과를 통해 사회철학의 이론적 요구와 특수한 문제가 무엇인지 대략의 윤곽을 그려냄

사회철학은 사회적 삶의 성공적 형태에 대한 척도를 논의하는 반성의 차원으로 이해됨.

 

 

1. 루소에서 니체로 - 사회철학적 문제제기의 등장

루소는 홉스가 관심을 가졌던 시민사회의 존속 조건보다는 시민사회가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원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들이 확장되면서 등장한 사기, 기만, 등의 행위에 기반한 생활방식 전체가 과연 인간이 좋은 성공적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제반조건을 포함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

루소의 사회철학의 탐구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자기실현을 강요하는 사회적 제약요소.

 

루소는 초기에 개인적 자유와 공적 덕의 상태에 따라 사회적 삶의 윤리적 수준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비판의 준거틀로 작동할 이상사회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루소는 인간이 자족성에 따라 살았던 선사시대를 이상사회로 바라보는 듯 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불평등의 조건의 원인뿐 아니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생활방식 전체에 대한 비판까지 확장해서 탐구를 한다.

루소는 비판적 진단의 척도로 활용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끌어낸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자기보존의 충동과 동점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정심이 있는 인간은 자기보존이라는 재생산적 필요기능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도덕적 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즉 루소의 동정심은 이전 폴리스의 인륜적 삶이 수행했던 역할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공적인 덕은 자연적 사태가되고 만다. 즉 루소는 시민사회의 병리를 진단하며 자신 그대로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루소가 말하는 자신 그대로의 의미는 자연상태에서의 극단적 고립상태이다. 즉 인간은 상호작용없이 독립된 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이 상태야말로 루소가 문명비판을 수행하는 윤리적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1. 루소는 자연적 생활방식으로부터의 이탈이 어떤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지 묘사한다.

2. 이 이탈이야말로 인간의 자기소외의 과정이다.

 

루소에 의하면 욕구의 확실성에 따른 삶이라는 자연적 존재방식이 붕괴하면서 인간은 규율된 상호관계에 자신을 맡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그의 행위방향을 외부로 이전케 하는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외부로 이전된 삶의 구조에 의해서 자기표현의 불안도 생기고 동정심과 같은 근원적 덕성도 약해진 것이다.

 

루소를 근대 사회철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수행한 사회진단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 방식과 이에 대한 대답의 방법적 형태이다. 루소는 당시의 삶을 인간의 근원적 형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소외라는 철학적 이념을 창조했다.

루소의 방법론의 의의는 이제 사회적 삶의 형식을 더 이상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의 측면에서만 탐구하지 않고 사회적 삶이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부과한 구조적 제약에 대해서도 탐구해야 할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루소가 자유의 상실과 덕성의 붕괴로 왜곡과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 분리의 결과라고 본데 비해 헤겔은 결코 주관적 자유의 상실이 그 원인이 아니었다.

헤겔은 루소와 정반대로 개인적 특수주의가 무절제하게 강화됨에 따른 파괴적 결과가 사회병리의 원인이었다. 헤겔이 진단한 사회병리는 사회적 개별화, 정치적 무관심, 경제적 빈곤화등이었다.

헤겔에게 있어 핵심문제는 시민들이 단지 법적 규율이라는 협소한 결합을 통해서만 서로 관계하는 사회적 영역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로서 헤겔

헤겔은 인륜적 총체성이 형성된 사회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적 사회를 이상향으로 본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획득되고 교환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인륜성은 파괴된다. 즉 시민사회의 등장은 역사적 분열의 결과인 것이다. 즉 이상적인 보편적 사회(개인적 삶과 공적 덕성이 서로 교차되는, 보편속에서 자신을 구성적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회)는 시민의 자유증가와 더불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루소와 헤겔의 차이

이 둘은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을 다르게 본다.

루소에게는 가능한 극단적 자족상태가 성공적 삶의 조건이라면 헤겔에게는 공동선에 기초한 인간 상호간의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적 병리는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에 대립되는 사회적 발전과정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비판적 사회진단은 노동을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사회적 조건을 자본주의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소외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이후 정치경제학에 심취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 진행법칙속의 구조적 모순이 입증될 때만 적합하게 비판될 수 있다는 통찰이 성장하면서 과학적 모델에 경도된다. 따라서 맑스는 사회적 소외의 논의가 인간의 속성에 대한 사변적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신념을 갖게되면서 자신의 철학적 목표를 과학적 프로그램으로 전환한다.

맑스는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소외를 과학으로 전화했던 것처럼, 물화를 좋은 삶에 대한 장애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기실현구조, 즉 인간의 욕구본성에 대한 실체적 가정에 대한 증명도 포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맑스의 새로운 비판모델이 인간의 자기실현 구조에서 전제한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이나 의도가 아니라 그것의 필수적 실현조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단일한 그리고 포괄적 위기의 문화적 증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관점에 도달한 것은 니체였다.

니체는 당시의 사회를 전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보았다. 허무주의는 완전무결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병리현상의 증상적 표출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사회적 현상에 관심없음. 니체는 장애를 예증하기 위해 사회적 현상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기만할 뿐. 이 장애의 기원이나 쟁점은 단지 인간의 문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

이러한 관점전환을 통해 니체는 역사주의나 관념론과 단절할 수 있는 역사적 고찰방식을 얻어냈다. 왜냐면 니체는 과거에 대한 문화적 해석체계에서 바로 현재의 병리적 현상에 토대를 마련한 지적 내용들을 끄집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만든 문화사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프로그램은 푸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가 보여주듯이 오늘날에도 사회철학적 시대진단을 위한 방법적 모델로 남아있다.

 

니체의 시도에서 처음부터 불분명한 것은 근대 문화비판의 정당한 평가척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 좋은 삶의 조건

 

루소-고립적 자기관계

헤겔-공동체에 살아있는 인륜성

마르크스-노동을 통한 대상화

니체-삶을 긍정하는 가치지평이 실행력있게 존재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것은 특별한 재능덕에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특권적 능력을 가진 협소한 범위의 개인들

니체가 밝힌 것은 좋은 삶의 윤리적 이상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루소, 헤겔, 맑스에게도 적용된다. 즉, 윤리적 보편주의의 배후에는 특수한 세계관을 선호하는 가치관이 숨겨져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2. 인간학과 역사철학 사이에서-사회학 등장이후의 사회철학

 

사회학자들의 문제의식-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사회적 가치구조는 지금까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목적과 관련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윤리적 구성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회학의 과제-윤리적 위기를 실제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

이것은 헤겔의 문제의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점은 내용적 규정에서 발생한다. 즉 현재의 윤리적 위기를 출현케 한 사회적 과정은 더 이상 원자화와 분열의 증대가 아니라 도덕적 방향 상실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1세대 사회학의 영향지점

니체-객관적 가치질서가 붕괴됨에 따라 주체들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설정할 수 있는 목적 역시 붕괴되고 말았는가?

마르크스-새로운 경제양식이 인격적 유대 대신에 목적합리적 사고에 따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가지 모델은 이후 혼융되면서 사회학적 시대진단을 지배했던 테제에 도달하기 위해 작은 사고의 진전이 필요하다. - 윤리적 방향상실. 즉 허무주의의 제도적 기원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관철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짐멜-인간관계의 물화지적

퇴니스-사회적 공동체 유대의 해체에 주목

베버-세계의 근본적 탈주술화에 관심

뒤르켐-유기적 연대 형태의 형성 탐구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사회화 과정은 새로운 경제질서의 정착이 사회적 생활세계의 도덕적 공동화를 초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회학자들의 시대규정이 갖는 이론적 문제는 헤겔이나 맑스보다 훨씬 분명한 문제지점이었다.

1. 사회철학이 사회학과 합체되면서 경험적 검증에 대한 압력이 등장하자마자 사회철학의 역사철학과의 연관성이 조명받게되었다. 그러나 목적론적 역사철학에서 소외진단이 갖는 가치평가적 의미는 역사철학의 서술적 의미 요소 뒤에서 은페된다.

그래서 여전히 병리현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신의 평가척도의 정당화를 논증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점에서 방법론적 장애에 부딪힌 사회학은 니체 문화진단의 연장선상에서 사회가 윤리적 임의성과 같은 허무주의에 놓이게 되었다고 가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될 경우 사회학은 자신의 가치평가 척도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화 가능성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철학은 자신의 근원적 탐구영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사회학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의 마련은 역시 철학적 틀 속에서 마련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입장은 크게 두가지이다.

1. 철학적 인간학-경험적 연구를 통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기되었던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

2. 역사철학적 사고유형에 대한 새로운 관심증대

 

대표적으로 루카치와 플래스너

헬무트 플래스너-공동체의 경계

사회적 병리현상은 자본주의적 산업화과정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촉발된 구조변동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조건과 화해불가능하다. 즉 공동체의 상호작용 유형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인간의 강제없는 자기실현을 가능케 하는 인간학적 전제는 훼손된다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

자본주의가 만든 근대의 병리가 공동체 형성의 사회적 기능을 파괴한다. 플래스너를 비판하면서 루카치는 맑스와 베버를 조합해 자본주의사회에서 물화는 직접적 현실이며 이는 이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 조건을 남김없이 파괴한다는 것이다.

 

루카치나 플래스너는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규정 척도를 설정함에 있어 모든 규범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윤리적 상대주의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플래스너는 경험과학연구를 통해 인간의 탈중심적 입장을 자신의 근거로 세우려 했고 루카치는 역사유물론을 객관적 필연성에 대한 예언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후의 사회학적 연구도 인간학과 역사철학이라는 두 가지 준거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플래스너와 같은 단독적 사상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간의 자기실현의 장애로서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의 일면적 합리화 압력을 분석의 사회적 준거점으로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후 등장한 파시즘도 그 배경을 형성한 원천은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연구라 할 지라도 사회철학적 방법론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계몽의 변증법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연구 역시 인간학과 역사철학의 근거 중의 하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전체주의의 압력,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압박속에서 진보에 대한 역사철학적 희망은 사라져갔고 문화비판적 회의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회철학의 분석과제가 전체주의의 형성을 전권적 주제로 만든 변화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전체주의적 상황의 원인을 찾기 위한 근거는 문명화 과정 전체의 잘못된 발전결과로 이해될 때만 적절히 해명될 수 있었다. 루소가 잘못된 문명발전의 시원을 인간간의 교류에서 찾았다면 아도르노는 노동에서 찾았다. 즉 마르크스의 인간노동의 긍정성을 전면부정하면서 노동은 단지 도구적 지배에 기여하는 요소로만 파악된다. 즉 주체는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형성하며, 역으로 노동활동을 통해 자연세계는 단지 인간의 목적달성을 위한 조작영역으로 축소된다. 최초의 도구적 지배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장할 알게 되었지만, 이제 이러한 행위는 단계적으로 자신의 본능적 삶을 훈육하고, 자신의 감각적 능력을 빈곤화시키고, 사회적 지배관계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루소에게서 타락과정의 끝이 위신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통제되지 않은 투쟁이라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서는 이는 결국 현대사회의 총체적 폭력지배로 흐른다.

 

 

도구적 이성의 발전논리에 대한 두 가지 단점

1. 기술적 합리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모든 작용요소들이 전체주의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공백으로 남는다.

2. 전체주의적 지배는 인류의 초기 역사로까지 소급되는 합리화과정의 정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지배의 문명적 특수위치는 근본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현실 자체가 아니라 문명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병리현상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에 의하자면 법적 자유의 확장이나, 정치적 결정의 민주화, 개인적 행위영역의 개방과 같은 진보들은 더 이상 전면에 등장할 수 없다.

 

비판의 준거를 헤겔과 같이 역사적 이상론에서 찾는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아도르노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체주의적 폭력지배의 등장이 바로 근대사회 내부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던 사회적 병리의 결과로 규정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근거마련을 위해 경험적 증거들을 제시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학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강화하는 대신 항상 고대 폴리스에 대한 이상적 서술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렌트의 역사철학적 입장을 제거하면 그녀의 사회철학적 진단을 뒷받침하는 인간학적 주장이 드러난다. 즉 인간주체는 그 본성상 공적 영역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인간주체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실존적 문제들과 위험성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심리적 안정성과 자기의식의 척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자유와 공적 실천은 인간에게 서로 얽혀있는 것이므로 정치적 공공성이라는 사회적 영역의 존재만이 인간에게 성공적 삶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이런 테제로부터 도출된 아렌트의 사회적 이상은 이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지배체제를 사회적 병리로 규정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우선 근대 산업사회에세 세계소외Weltentfremdung라는 일반적 경향이 지배하고 있음이 주장되고, 두 번째 단계로 이러한 소외의 특수한 형성과 완성이 전체주의적 지배체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근대적 세계소외의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회적 행동방식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은 독일에서 비타 악티바Vita activa 라는 제목을 단 연구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테제에 의하면 발전하는 산업화조건아래서 생산과 노동의 기술적 활동이 강한 사회지배력을 획득하면서 공적 협의나 의사소통과 같이 자유를 신장하는 실천들이 배제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보편적 소외.

그녀의 저작인 전체주의 연구에서 나오듯이 개인들은 공적 공간이 쇠약해지면서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부여 활동에서 단절되고, 홀로 고립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면서 단지 전체주의적 운동 속에서만 자기 이익의 적절한 형식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조직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위기감과 책임감을 형성하기 위해 모든 공격성을 외부로 향햐게 하고 외부의 적에 집중하게 만드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발전을 통해서만 안정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순환과정이 등장한다. 즉 전체주의 운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점차적으로 대량학살 행위로 변형시킴으로써만 자신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분석은 이성비판 요구에 있어 약소하고 심리학적 차별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근대적 대중매체의 영향 방식과 관련해서는 소박성마저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등장을 사회적 병리현상의 맥락속에서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아렌트의 주장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설명력을 갖는다.

즉 기술적 활동의 확장을 통해 자유를 보장하는 행위영역이 제한된다는 것이나, 이를 통해 동시에 정치적 공공성의 붕괴가 동반된다는 것이나,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계가 아렌트에게서는 발견되며 이는 실제 역사과정에 대한 큰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3. 사회적 병리현상 진단에 대한 근거설정 방식들-사회철학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60-70년대 아렌트에 영향받아 하버마스, 테일러, 카스토리아디스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철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어분석철학의 발전으로 인해 철학적 진술의 근거지움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을 통해 사회철학내에서도 방법론적 정당화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 종합을 통해 오늘날 사회철학의 근거설정을 둘러싼 문제가 어디 있는지가 가늠될 필요가 있었다.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소급되는 정치철학의 전통과 단절했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좋은 삶과 정의로운 삶을 어떻게 동시에 보장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편적 동의가 가능한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겠는가가 홉스가 다룬 유일한 문제이다. 이렇게 문제를 제한함으로써 칸트는 이후 정치철학에서 도덕철학의 정립을 위해 도덕과 윤리를 분리한다. 즉 사회적 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만이 철학에 의해 대답될 수 있으며, 좋은 삶의 조건에 관한 문제들은 거의 일반적 규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학의 틀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윤리적 문제가 사회적 공동생활에서 간단히 제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루소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루소는 사회적 생활조직을 과연 그것이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또 그조건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고찰하려고 했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상태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 비판적 지향은 그 이전에 발전한 형식적 윤리관점과 연관되어 있듯이 이제 사회철학은 시작부터 직간접적으로 어떤 개념과 결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자기실현조건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가정들이 존재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적 삶의 병리에 대해 적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상성의 표상이 필요.

다양한 해석들이 행하고 있는 이상적 상태의 특성이 아니라 그 목적을 준거틀로 끌어들이면 일종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비판개념은 간단히 말해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한다는 특징을 지닌 사회적 조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실현의 가능조건에 적합한 사회적 정상성에 대한 윤리적 표상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이러한 윤리적 배경개념이 형식적인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자체가 아니라 그 사회적 전제들만이 규범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정상적 사회적 관계의 척도를 획득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의 준거틀은 개인적 주체의 사회생활 조건이다. 공동체주의이든 개인주의이든 사회철학의 비판적 척도가 되는 좋음에 대한 형식적 개념은 개인의 행복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회적 삶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각 사회철학적 시도들이 겨냥하는 이상적 상태는 개인주의적이거나 공동체주의 둘 중에 하나로 귀결된다. 나머지 차이는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구체적 조건을 무엇으로 보느냐이다. 사회적 삶에서 개인의 성공적 삶의 조건이 공동체적 인륜성인지, 개인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공공성인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인지, 자연과의 미메시스적 관계인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사회철학이 정상적 사회적 삶에 대한 보편적 척도에 의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학을 통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철학의 존속여부는 형식적 윤리학의 정당화 가능성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점에서 사회철학의 미래는 과연 인간의 삶의 필수적 조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설득력있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사회철학이 필요로 하는 윤리적 판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안은 윤리를 절차화하는 시도이다. 하버마스는 윤리적 문제를 실천적 담론의 과제로 보려는 사고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나 가능했던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즉 정상적 혹은 이상적으로 간주되어야 할 사회적 삶은 사회구성원이 민주적으로 조직된 의사형성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발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안의 단점은 사회철학의 해석권한이 남김없이 해당구성원들에게 넘겨지고 만다는 것이다.-사회철학이 할일이 엄서..

 

두 번째 대안, 이러한 사회철학의 무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사회이론 자체가 비판적 경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갖게되며, 이 경계를 넘어서 체제의 명령이 사회적 생활세계로 침투할 때 이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정상과 병리의 구별을 정당화시키는 논거는 인간의 담론행위를 사회적 재생산의 필수 전제로 증명하려고 하는 보편화용론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약한 의미의 그리고 단지 형식적 의미의 인간학에 기원한다.

 

세 번째 대안, 사회철학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푸코와 일치한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장애를 진단하고 설명할 수 있는 평가척도는 역사적으로 제한된 타당성만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척도는 단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자아의 근원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적으로 상대화된 근거를 윤리학의 토대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문화적 자기이해가 기원하는 윤리적 가치를 해석학적으로 되돌아 보는 것은 어떤 사회적 발전과정이 병리로 이해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철학은 장차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와 이에 상응하는 삶의 이상에 근거하여 사회적 장애를 논의할 수 있는 반성적 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성공여부는 약하고 형식적인 의미의 인간학적 요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당화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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