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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6장 자동화에 대한 대논쟁

6장 자동화에 대한 대논쟁 151페이지부터

 

1963년 3월 프린스턴 대학의 첨단 학문연구소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소장인 오펜하이머 J.Robert Oppenheimer가 이끄는

저명한 과학자, 경제학자, 학술원 회원등은 미래 미국 경제의 자동화에 대한 경고와 이 주제에 대해 대통령에게 국가적인 토론을

요구하는 공개적인 편지를 뉴욕타임즈에 발표하였다. 자동화 혁명, 병기 혁명, 인권 혁명 등 사회에서 발생하는 세 가지 새로운 혁명

적인 변화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온 이름인 삼중혁명에 관한 임시위원회 Ad Hoc Committee에서 새로운 자동화 기술은 수입과

일의 관계에 기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논의되었다. 앞서의 저자들은 역사 이래 현재까지 [경제적 자원은 생산에 얼마나 공헌했느냐에 따른 기준으로 항상 분배되었다.]라고 지적하였다. 현재 이러한 역사적 관계는 컴퓨터에 기반한 신기술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새로운 생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원리는 산업화시대나 농경 시대와는 다르다. 컴퓨터와 자동 조절 장치의 결합에 의해 자동화 혁명이 발생되어 왔는데, 이는 점차 인간의 노동력을 적게 필요로 하는 거의 무한한 생산 능력을 가진 시스템을 낳는다.]라고 그들은 경고하였다.

 

위원회는 또한 자동화에 의해 쫓겨나는 노동자의 수는 기하급수접으로 증가할 것임을 경고하며, 그 자리를 새로운 컴퓨터 혁명에 의해 기계가 대체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대통령과 의회는 새로운 노동절약 기술때문에 유휴인력이 된 많은 이들에게 기금을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권리의 문제로서의 적정한 수입을 모든 시민에게 보장할 것을 촉구하였다.

 

임시위원회의 경고는 백악관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1963년 7월 케네디 대통령은 자동화에 관한 국가위원회의 설립을 요청하였다.

6개월후,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자동화, 기술, 경제적 진보에 관한 위원회의 창설을 제안하였다. 그 해 봄, 의회에서

공청회가 개최되었고 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신자유주의 축적체제가 가속화되면서 통제불능인 폭주기관차라는 이름을 단 자본주의는 또 다시 공황이라는 블랙홀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통해 촉발된 금융 위기는 전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엄청난 경제적 충격을 던졌고, 그 뒤를 이어 아이슬란드 구제

금융, 그리스 위기등을 통해 점점 더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생산력의 엄청난 발전,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한 무한한 발전은 왜 장미빛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맑스의 예언처럼 또 공황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댈까?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비뚤어진 사회를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사회로 올바르게 되돌리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미 60년대에 미국학자들이 제기했던 것처럼(더 일찍이 맑스가 언급했으며,) 이제 중요한 문제는 생산 패러다임이 아니라 분배 패러다임

즉, 소비 패러다임이며 이를 위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 고대 폴리스 사회에서는 인간의 주요한 행위는 정치행위였으며, 생산은 노예들이 담당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듯이 노동은

힘들고 더러운 것이었으며 회피되어야 하는것이었다. 정작 노동이 신성한 것이며, 인간 삶의 근원적 행위라는 사고는 칼뱅의 프로테스탄

티즘에 의해 시작되었다. 즉, 행위에 대한 의미는 초역사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옳게 보았듯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맑스는 일찍이 그룬트리세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소외된 노동'의 탈소외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 가능성은 현재들어 더이상

가능성에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의 노예가 담당한 노동을 이제는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있을만큼의 과학혁명이 충분히 진행되어 있는 상태이다.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불리우는 워렌 버핏은 자신의 기부에 대해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지가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맺음임을 선언했다. 자신이 이러한 부를 축적한 것은, 자신이 하필이면 자본주의 사회, 그것도 고도의 발전을 이룩한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여러 제반 상황이나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므로 자신이 사회에 환원

하는 것은 '도적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맺음이라는 것이다.

 

구체적 노동을 추상노동으로 환원하는 가치법칙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독해되어야 한다. 생산에 기여한만큼(더 정확히는 노동에 기여한 시간만큼이라는 모호한 방식으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소비할 수 있도록 구매력을 담보해주는 '권리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위기는 구매력의 상실임을 기억하자.)

 

하필이면 그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그 시대에 타고났다는 우연성에 의해서 삶의 질이 달라지는 무인과성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부의 세습 또한 전혀 인과성이 없는 불합리이다.)

 

이제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이 논의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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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슬라보이 지젝을 미워하는가2-토니 마이어스 지음

이번에는 지젝이 주체형성의 열쇠로 지목한 광기, 즉 사라지는 매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82-83페쥐)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는 지젝이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에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개념이다.

 

지젝은 이 개념을 미국의 유명한 포스트 맑스주의 학자인(이견이 있겠으나 아닥!!) 프레드릭 제임슨의 [사라지는 매개자: 혹은 스토리텔러로서의

막스 베버]에서 빌려왔다.

 

여기서 제임슨은 막스 베버의 맑스주의 비판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다들 알다시피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서 자본주의가 발생했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즉 이 논의는 (맑스식으로 본다면) 상부구조인 종교가

토대에 해당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만들었다는 논리이다. 즉 맑스의 구도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 구도를 다시 맑스주의적 해석하려고 한다. 즉 맑스주의와 일치하는 변증법적 운동속에서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발생했음을 설명하려고 한다.

 

제임슨은 부정을 부정하도록 추동하는 변증법적 매개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이해한다. 즉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제라는 두 매개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에 불과하며 이 연결고리는 변증법적 이행이 완결된 그 지점에서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칼뱅이 주도한 프로테스탄티즘이 출현하기 전만 해도 종교는 경제와 분리된 영역이었다. 즉 성서적 해석에 의해 노동의 신성함이 강조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부의 증대를 위해 경주하는 것은 죄악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삭개오가 배척당하는 것도 그의 직업이 세리, 즉 세금을 거두는 관리였기 때문이며,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이 추악하게 묘사되는 것도 그의 직업이 러쉬 앤 캐쉬, 즉 고리대금업자였기 때문이다.

즉 헌금은 신앙의 상징이지 돈이 아니어야 했으며, 교황청이 돈을 밝히는 것은 결코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서는 안되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칼뱅이 주창한 프로테스탄티즘은 보편 종교로서 부의 축적과 근면성실한 노동을 자기 내부로 끌어안음으로서 자본주의가 출현할 조건

을 창출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에 빚지고 탄생한 자본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영역에서 종교를 내쫓아 버렸다.

 

제임슨의 분석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서로 배타적인 두 항(즉, 봉건제와 자본제) 사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였다.

하지만 촉매는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 분해되어 사라지는 그러한 매개이다.

 

지젝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사라지는' 매개이다.

지젝이 보기에, 사라지는 매개자는 내용과 형식의 비대칭성으로 발생한다.

 

즉 형식-하나의 체제-은 자기 내부의 약동하는 동인들(홈패인 공간을 벗어나 탈주하려는 자유로운 동학들)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탈주자들이 차고 넘치게 될 경우 형식은 내용에 의해 자신을 잃고만다. 마치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는 괴물처럼.......

 

맑스의 혁명분석에서 형식은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지체된다. 즉, 내용의 논리가 형식의 한계지점까지 작동하여 자기 껍질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형식을 드러낼때까지, 내용은 현존하는 형식의 자장 속에서 변한다.

 

지젝이 제임슨의 논의를 통해 얻어낸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1-봉건제에서 배태된 프로테스탄티즘

2.-프로테스탄티즘에서 배태된 자본제

 

1과 2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1은 내용적 변화이며 2는 형식상 변화이다. 

 

이런 과정속에서 지젝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 즉 변증법의 세번째 계기를 마련한다. 첫 번째 부정은 낡은 형식안에서 그 형식의 이름으로 나타

나는 내용의 변화이다. 두 번째 부정은 형식 자체의 소멸이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것은 강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대립물이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종교적 태도의 보편화가 최종적으로는 사적인 묵상의 문제로 치부되는 결과를 낳는다. 즉, 봉건제의

부정으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의해 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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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슬라보이 지젝을 미워하는가

주체에 대한 짤막한 단상

 

코기토......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주체가 무지막지한 폭력성(동일성의 원리)때문에 서서히 추방되어 가면서 탈중심적 주체가 은근슬쩍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하지만 주관성의 우위만 주장하는 데카르트적 주체나 객관성만 주장하는 탈구조주의적 주체나 만족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데카르트적 주체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은 허위라는 생각에 도달했지만, 그런 결론은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이를 볼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하며, 가장 강력한 회의주의자의 가설조차 이 진리를 흔들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는 이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가 갖고 있는 철학의 제 1원리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68:53-54)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 라고 데카르트가 말할 때의 나는 개인, 즉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나'이다.

내가 사유에 속하는게 아니라 사유가 내게 속한다. 달리 말해, 코기토의 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이러한 추론 속에서 도출되는 개인은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하며, 제 자신에 대해 완전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자기 인식을 방해할 수 없는 자기 투명성(주관의 엄밀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나는 주변환경=객관세계에 영향을 받는 복종적이고 억압적인 객체가 아니라 주변환경을 내 방식으로 사유하며 지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고립된 섬으로, 자기 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의지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이제 객관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주체 모형의 파괴력은 현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한 가지 예만 살펴보더라도 동일성 철학이 가진 위험성을 잘 드러낸다.

가령, 최근까지도 여자는 정념과 감정에 지배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스스로의 주인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남성에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지 않은가..................

 

데카르트적 주체 철학의 전복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폴란드의 철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밝혀냄으로서 중심적 위치의 인간을 태양계의 주변부로 밀어내었다.

(물론 데카르트보다 코페르니쿠스가 앞선 시대의 사람이기는 하다.)

영국의 자연학자인 다윈은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적자생존설을 거쳐 진화론을 확립함으로써

인간이 동물과 분리되어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연의 지배를 받는 원숭이의 일종임을 주장했다.

또한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영역을 밝혀냄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삶 중 상당부분이 통제 불가능한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채워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연구성과들은 코기토를 붕괴시켜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주체를 찾으려는 노력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사뿐하게 예측이 가능할 터.......

이제 그 루트를 살펴보자.

 

탈구조주의적 주체

이제 주체는 자기 통제력을 가진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담론들이 엇갈리며 일으키는 효과이자 담론들이 발화하는

통로일 뿐이다.

주체의 의미는 탈중심화되어 있거나 주체의 외부, 즉 무의식적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적 담론 속에 있다. 주체는 이런 외부 담론들에

의해 강제 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제 자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주체는 지배이데올로기와 당대의 역사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탈구조주의'에서 주체는 보통 주체화로 환원된다. 즉, 주체는 근본적으로 비주체적인 과정의 효과로 인식된다. 주체는 언제나 전주체적인

과정들('글쓰기'의 과정, '욕망'의 과정)에 의해 포획 혹은 횡단된다. 여기서 강조점은 역사적 과정의 '주체' '행위자' '대역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살고' '경험하는' 개인들의 서로 다른 양태들이다. (sublime object of ideology 174p by 지젝)

 

하지만 이러한 모델은 객관 세계가 주관 세계를 너무나 깊숙히 침범하여 아무런 주체성도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완성된 주체라면,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개별성의 영역을 보존하는 동시에, 우리가 거쳐해야 할 장소로서 어떤 비개별성의 토대 위에 발을

딛고 있음으로써 둘 간의 생산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제 지젝이 코기토를 어떻게 읽어내면서 탈구조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지 살펴보자.

 

지젝은 완결된 코기토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코기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즉 방법적 회의라는 '방법'을 받아들인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즉 자연적 존재에서 문화적, 즉 주체적 존재로 형성되는 계기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연적 존재에서 주체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헤겔은 이 간극-사이존재-를 절반은 자연에 속해있고, 절반은 자연을 노예화하려는 '흑인negroes'상태로 명명했다.

지젝은 이 간극을 메울수 있는, 혹은 연결할 수 있는 매개로서 데카르트적 회의를 받아들인다.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을 세계와 단절시킨다. -명석판명한 명제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지젝은 바로 여기, 이 전면적인 철회의 제스처에서 자연에서 문화로 가는 감춰진 이행을 발견했다. 지젝에 의하면 이런 제스처는 광기의

일종 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씩 부정해가다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텅빈 공허한 상태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텅 빈 부정의 상태, 여기야말로

주체가 태동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즉 주체는 공백인 것이다.

 

지젝에 의하자면, 구조의 영향을 받는 객관적 존재에서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관적 존재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공백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백상태를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체가 데카르트처럼 회의를 일삼게 만드는 바로 그 동력은 무엇일까?

지젝은 그러한 과정이 헤겔의 생각처럼 변증법적 진화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광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라는 상징계에 주목하는 지젝의 사유를 엿볼수 있다.

만약 사물(대상)과 그것이 재현되는 표상(말, 언어)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다면, 그 둘은 동일화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체성의

여지는 사라지게 된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말은 애초에 우리가 사물을 살해(푸코를 참고하시라)한 한에서만, 말과 그것이 재현하는 사물 사이의 간극을 창출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간극, 자연과 그것에 함입된 존재들 사이의 간극이 주체이다. 

달리 말해 주체는 지젝의 용어로, 자연과 문화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사라지는 매개자'이다. 

 

다시한번 지젝의 도식을 정리해 보자. 

 

주관과 객관의 간극 = 실재와 상징의 간극 = 대상과 대상을 재현하는 말과의 간극

 

이 도식은 만고 내 생각이다. 아직 지젝의 사유를 다 모르니까 이렇게 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암튼 이런거 같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지젝이 간극을 메우는 동인으로 상정한 광기의 정체이다.

 

그 광기라는 것은 모든 개인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과정인가??

 

그리고 그 간극을 느낀 모든 존재는 '자신의 철회'라는 부정의 방법으로 그 간극을 해소하고자 하는가?

 

안나 프로이트의 학풍을 이은 미국의 자아심리학은 그 간극을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간극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주체의 지위를 자아의

지위로 격하시킴으로서 주관적 존재에 대한 열망을 지우고 구조적 개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식으로 개인의 안녕을 꾀하지 않는가?

 

만약 지젝의 사유가 단순히 논리적이기만 하다면, 그래서 현실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곤난하다.

 

매우 곤난하다.

 

만약 지젝이 말한 '광기'의 추동 동력이 현실적 토대, 즉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인 조건하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면,

인간적 조건(혹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상황)하에서는 주체성의 형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사회는 필연적으로 등장불가능

하다고 한다면, 그런 목적론은 한물 간거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인간의 해방은 그 논리적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 여기까지해서 이만 의문을 접고 지젝의 사유를 계속 쫓아가보도록 하자.

 

 

 주체의 계보학에서 지젝이 참조한 중요 철학자중 한 사람이 바로 셸링이다.

(요술 공주 셰리의 조상일지도 모른다 ㅡ,.ㅡ)

지젝이 보기에 셸링은 철학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기능한다.

셸링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비가시적 연결고리로서, 이전의 관념철학이 지닌 형식에다가 이후 프로이트, 니체, 맑스가 제기한

유물론적 내용을 도입한다.

 

지젝은 셸링의 [세계시대]라는 저서의 두 번째 초안 분석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알다시피 신의 탄생에 대한 구절을 성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면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셸링은 태초이전의 상태, 카오스적 상태를 입증한다.

 

이러한 카오스적-정신병적 상태의 우주, 맹목적 충동의 반복과 불규칙적 맥동의 상태야말로 현실의 궁극적 기반, 모든 것의

토대이다. 어떤 것도 이 '무nothing'을 앞서지 않는다.

 

신god은 이러한 혼돈(자유)의 상태의 일부였다. 

신은 아직 개별존재가 아니라 비존재의 상태를 즐기는 순수한 무nothing였다. 

 

여기가 중요한 지점이다. 

신의 존재는 근원적 토대, 즉 현실의 근거 중 일부이지 아직 스스로 독립된 본체가 아니다. 

신이 독립성을 쟁취하려면 그 자신을 토대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철학의 제1원리, 곧 '존재의 확고한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시도한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주장대로 신이 자기 존재의 토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한정된 내용을 파괴하는 것, 

세계로부터 철회하는것, 

그 자신에게서 토대를 축출하는 것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행위를 신성한 광기의 한 형식, 헤겔이 말한 '세계의 밤'의 광기와 유사한 것으로 설명한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먼저 광기의 위험을 겪어야 한다. 

카오스의 상태에서 신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사라지는 매개자', 즉 이 밤의 광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젝의 중요한 모티프인 '주체'가 형성되는 방식이, 상실, 자신의 철회, 자신의 토대 혹은 본질 자체의

축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의 주체는 언제나 자신의 상실을 회복하려고 하는 향수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주체가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주체 외부에 남아있어야한다. 

달리 말해, 주체는 주체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외재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앞서 살펴본 주관적 주체와 객관적 주체 모델처럼 주체가 대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연루되어 있다. 

주체는 자기 외부의 대상이다. 

 

주체는 지젝이 라캉을 따라 표현한 외밀함이라는 용어로 함축되어 표현될 수 있다. 

외밀함ex-timacy은 외재적인과 내밀함을 합성한 말이다. 

 

이 외밀함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주체의 존재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우리의 안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안구만은 볼 수 없다. 안구를 보기 위해서는 안구를 투사해주는 거을을 보아야 한다. 

 

주체의 위치가 바로 여기이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으며, 오직 현실의 '거울'속에서만 비치는, 현실에 비치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거울은 무엇인가...

정답은 언어이다. 

 

정확히 말은 어떻게 반복적인 맥동의 긴장을 해소시키며, 수축과 팽창의 적대를 중재하는가? 말은 정확히 대립물, 즉 팽창의 모습을 

한 수축이다. 다시 말해서, 말은 하는 가운데 주체는 자기 존재를 외부에 수축시킨다. 주체는 외재적 기호속에서 자기 존재의 중핵을

응고시킨다. (언어적)기호속에서 나는, 말하자면 내 외부에서 내 자신을 발견한다. 즉 나는 나 자신의 바깥, 나를 대리 표상하는

기표속에서 나의 단일성을 정립한다.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 셸링과 제 문제에 대한 에세이 The Indi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1996))

 

이렇듯 내가 나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는 더이상 자기동일적이지 않다. 

나를 표상하는 기표는 단지 나의 대리 표상일뿐 실제의 나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온전히 주체가 되고자한다면, 나는 이런 회복불가능한 상실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nothing이 아니라 something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실, 즉 철회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외재화되는 장소는 말word 태초를 언명한 말씀이다.

지젝은 카오스에서 말의 언명으로의 이행을, 실재계에서 상징계의 이행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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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환유

 

은유와 환유의 차이를 알고 싶다면, 주류 영화들이 섹스 행위를 표현하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영화속의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직접 보지 않고 암시만 받고 싶다면, 유리창으로 흘러내리는 두 줄기 빗물이 합쳐지는 은유적인 장면을

 

떠올리거나 방바닥에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환유적인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즉, 은유는 속성상의 유사성을 지시하며, 환유는 어떤 사태 전체를 그 사태의 일부분으로 대신 지시한다.

 

야콥슨에 따르면, 소설은 환유의 원리, 즉 단어들이 결합하여 문장을 이루는 수평축에 의존하며 시는 하나의 단어가 유사성에 의해 다른 단어로

 

대체되는 수직축에 의존하여 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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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4장 우울증과 행동에서 일부 발췌

 

 

결여는 상실과 다르다.

 

결여는 원래부터 없던 거고, 상실은 있던 것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자는 자기 증상의 원인이 결여가 아니라 상실이라고 착각한다.

우울증자의 욕망의 대상은 공허한 결여에 불과할 뿐 그 자체는 실존하지 않는 순전한 왜상적 실체에 불과하다.

 

 

조르조 아감벤은 우울증과 애도를 대비시키면서 우울증이 어째서 애도작업의 실패, 즉 대상이라는 실재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이기도 한지 강조해 왔다.

“대상의 상실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한발 앞서 애도하고자 한다는 점에 우울증의 역설적인 성격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울증의 책략이다. 즉 우리가 이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애초부터 상실된 상태였던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는 어떤 대상을 마치 그것이 이미 상실된 것인양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자는 애도 작업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그와 정반대의 형식으로, 즉 아직 대상이 상실되지도 않았을 때조차 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애도를 표하는 거짓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하게 된다.

 

 

집시에 대한 오래된 인종차별적 농담

비가 오면 집시들은 즐거워한다. 비가 그치면 언제나 태양이 비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날이 좋으면 그들은 슬퍼한다. 햇살이 비친 다음에는 언젠가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이렇다. 애도하는 자는 대상의 상실을 상징으로 만듦으로서 그것을 ‘두 번째로 죽인다.’ 이에 반해 우울증자는 단순히 그 대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인 것이 아니라, 대상이 상실되기도 전에(이미 상실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그 또한]대상을 두 번 죽이는 자라고 해야 한다.

 

우울증자는 상실한 대상에 고착되어 있어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없는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그러나 그 대상을 욕망하게끔 만들었던 원인이 철회되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해 버린 주체이다.

 

지젝은 글은 가끔 당혹스럽고 대체로 재미있고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젝의 글은 현란한 수사구로 무장되어 있지만 결론이 없어.

 

난 결론을 내지 않아서 지젝이 좋다. 내지 못하는게 아니라 결론을 유보하고,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논의를 더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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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넘어선 자본 읽기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일부 발췌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생산과정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그래서 이 양자의 비율을 자본의 구성이라고 부른다. 자본의 구성을 표시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소재적 측면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량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

☆가치의 측면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가치 구성

☆기술적 구성을 가치량으로 표시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유기적 구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가변자본에 비해 불변자본의 비율이 더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자에 비해 기계의 비중이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은 정보혁명시대에는 불변자본의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자본이 축적되고 생산성이 상승하면서 이처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일반적 법칙이다. 이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축적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과잉인(즉 자본의 평균적인 자기증식욕에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노동인구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자기 스스로 축적하면서 지속적으로 과잉인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잉인구는 자본이 손쉽게 구할수 있는 노동인구가 된다. 즉 노동력에 대한 추가적 수요에 대비한 일종의 산업예비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과잉인구의 존재양상을 그 처지와 조건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유동적 과잉인구-산업부분에서 고용되었다가 해고되어 다시 고용되기를 기다리는 노동자

2. 잠재적 과잉인구-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라 도시로 나와 노동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자본주의 초기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과잉인구

3. 정체적 과잉인구- 불규칙하고 불완전한 고용, 임시 고용, 가내노동이나 날품팔이 노동등과 같이 현역노동자와 산업예비군에 동시에 속하는 하층민들

4. 과잉인구의 최저 침전층으로 부랑자나 극빈민, 고아, 불구자등 대부분 고용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상대적 과잉인구의 창출

 

여기서 맑스는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을 경제학적 법칙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구학적 법칙이라고 해야할 기이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법칙의 전제조건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축적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비상품화하는 방식으로 상품화하며, 노동을 탈가치화하는 방식으로만 노동을 가치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의 권력이란 노동하지 않는 삶을 죽음이란 극한값을 향해 수렴하게 하며 작동하는 권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에 스스로를 판매함으로써만 생산수단을 이용할수 있는, 반대로 그렇지 못하다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그런 조건 위에서만 작동한다.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조건과 동일한 이런 조건은 그대 서구의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창출된 것이다.

 

 

 

 

실업화의 압력

 

김수행 자본론 1권 873p

실업자들의 압력은 취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따라서 일정한 정도까지는 노동의 공급을 노동자의 공급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 및 공급의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ㅎ나다.

 

 

 

김수행 자본론 1권 881p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및 활력에 알맞도록 유지한다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도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자본론 1권 653p

자본주의적 착취의 욕구를 항상 충족시켜주기 위해 비참한 상태에 묶어두고 있는 산업예비군이라는 괴물은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개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즉 부분적으로만 발달한 개인[그는 다만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의 담지자일 뿐이다]은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그에게는 각종의 사회적 기능은 그가 차례차례로 행하는 각종의 활동방식에 불과하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노동하는 동물 homo faber

 

자본의 요구, 노동자의 욕망

 

 

자본론1권 883p

맑스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말을 인용한다

노예제에서는 사람들을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근면하게 하는 폭력적 방법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에 노동(즉,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무상노동)을 강요당한다.

노동의 판매는 인간의 자유의사다. 왜냐면 내가 아니어도 자본을 위해 충성할 ‘과잉인구’가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강제적 압제는 개인의 실존적 선택으로 그 양태를 변모시킨다. 자본의 요구는 노동자의 욕망이 되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노동자들간의 적대

 

사르트르- 지옥이란 바로 타인들이다.

 

 

정보혁명이후의 자본의 착취

새로운 양상의 결합노동을 만들어내고 있음.

가령 소비활동을 통해 대중의 감각과 취향을 착취하는 것은, 소비와 결부된 욕망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와 결부된 활동의 창조성이 크면 클수록 유리하다.

예)휴대폰을 쓰는 구세대와 아이폰을 쓰는 신세대

따라서 자본은 대중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확장되는 것을 이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일정한 한계안에 가두고 통제해야 하는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생산이 공장의 범위를 넘어 전사회적 범위로 확장되는 것, 생산이 노동없이 가능하게 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이제 노동없이 살수 있게 되었음을, 노동한다는 생각없이 진행되는 일상 자체가 생산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노동이다.!!!

 

 

 

S.Aronowitz 아르노비츠 = 과거에 생산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팽창은 좀더 많은 일자리의 증가와 임금의 상승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전지구적 고도기술경제에서는 노동자는 이른바 경제적 재구조화에 의해, 그리고 레이저, 로봇, 수치제어기계, 전자통신장비 및 워드프로세서 등과 같은 컴퓨터화된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post work, 42p)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

대다수 산업국가의 노동력이 75%이상이 단순반복작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런 작업은 자동기계나 로봇,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하면서 레온티예프(W.Leontief)의 말을 인용한다. “보다 정교한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해 마치 농경시대에 말의 역할이 트랙터에 의해 감소되고 제거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로서 인간의 역할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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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일부 발췌

 자신의 오빠를 예를 갖춰 매장하는 것이야말로 안티고네에게는 최고로 중요한 문제였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세속적 욕구는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포기한 것들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기는 안티고네는 숭고함의 정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물학적 생을 넘어서 존엄성 자체마저도(안티고네에게는 있었으나 여기서는 가질수 없는) 희생을 강요당할 때가 그러하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배반으로 모든 것이 무가치해져버린 인간은 세속적 쾌락조차 즐길수 없게 된다. 152p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행위가 이후 사태에서 반역으로 매도되고 그로 인해 자신은 제거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불가피한 타협을 실행한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공헌이자 안티고네를 넘어서는 비극인 것이다.

 

 

엘리엇의 시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Gathedral]

“모반의 최고형식, 그릇된 이유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것, -네가 올바른 일을 할때조차, 너는 그 반대의 것을 노리고, 그러니까 네 바탕의 사악함이라는 진정한 본성을 감추기 위해 그 일을 한다. ”

 

 

니콜라스 말브랑슈

나는 주관적으로 덕이 많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신의 시선아래서 나의 객관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는 결코 보장할 수 없다. 나의 구원을 결정할 하나님의 은총내리심은 전적으로 객관적인 법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물리적 자연법칙에 비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스탈린주의하의 공개재판도 이와 유사한 객관화의 또다른 판본이다.

나는 주관적으로 결백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의 은총의 손길을 받지 못한다면 내가 쌓은 모든 윤리적 고결함은 공산주의적 대의에 반하는 프티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의 그것에 지나지 않을것이므로 나는 주관적 결백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객관적인 죄인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전체주의의 참된 비극이 숨어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가 공산주의적 대의에 대한 냉혹하고 자기말소적인 헌신에 있으며 이것이 사람들을 괴물스런 윤리적 자동기계로 변모시켜 인간의 공통적 감정과 정서적 동감을 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정은 그런주장과 정반대이다.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 태도가 충분히 순수하지 못했다는데 있으며 그들이 도착적인 의무의 경제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나도 잘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의무인 것을.....’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

이는 윤리적 엄격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어이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반드시 해야하므로! Du kannst, denn du sollst!'

이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문장으로 귀결된다.

의무를 수행하는데 변명거리가 되어주는 의무의 참조근거는 위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제거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선생의 체벌-나라고 애들 패는게 좋은 줄 아쇼? 그게 내 의무인걸 어쩌겠소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자신의 큰 타자의 의지를 위한 순수한 도구로 자리매김하려는 도착적 태도 바로 그것이다.

그 일은 내책임이 아니오. 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책임으로부터 면죄되어야 하오.

책임은 내가 지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마음껏 고통을 가할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칸트 윤리학이 금지하는게 바로 이 것이다. 주체가 단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을, 즉 객관적인 필연성을 실현했을 뿐이라면 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은 객관적 필연성을 주관적으로 추측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 그에게 부과된 것으로부터 쾌락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는 유죄다.

 

 

레닌의 위대성

멘셰비키가 역사의 발전법칙이라는 실증적 논리가 만사를 포괄하는 근본적토대라고 여기며 객관적 법칙을 신봉한데 반해, 볼세비키는 ‘큰 타자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카치가 찰나포착이라 불렀던 기예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요구를 순화해 체제에 포섭하기 전에 그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예이다. 루카치 주장의 요점은 행동을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들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립적인 객관적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 판사 슈레버의 편집증에 대한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보통 광기(주체가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다고 편집증적으로 믿고 있는 음모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이미 일종의 회복의 시도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완전한 정신적 와해 이후에 나타나는 편집증적 구성은 주체가 자신의 세계에 모종의 질서를 재구축하려는 즉 인식적 지도그리기를 가능케 하는 어떤 준거의 틀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지적한 바 있듯이, 현실사회주의는 그것의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지배에 효과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적어도 지난 몇십년간 자본주의의 대변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게끔 만들었던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듯, 오늘날의 모든 공산진영은 그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해방된 영토이다.

 

 

 

203페이지부터

지젝의 노동에 대한 관점이 드러남

의미의 장 그 자체의 좌표를 변경시키는 개입, 즉 라캉이 누빔점이라 부른 것의 한 사례로서 노동의 개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노동(물질적이고 산업적인 생산)은 공동체와 연대성의 특권적 지점으로서의 노동인 것이다. 이러한 이상에서는 노동은 단지 그 자체로 만족을 가져다주는, 생산을 위한 집단적 노력에의 참여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적인 문제들까지도 소속된 노동 집합체 안에서 토론될 때 비로소 올바른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노동을 제의화된 공동체적 행동으로 보는 전근대적 일의 개념이나 과거의 산업적 생산방식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찬양과는 혼동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의 이상에서 생산 집단은 자신들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근대적 개인들의 집합체이지, 제의화된 고대적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각 방식속에서는 섹스가 아니라 노동 자체(상징적 행위들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육체노동)가 대중들의 눈앞에서 가려져 있어야 할 외설적 추잡함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노동과정을 지하나 어두운 동굴속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전통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혹은 브라질의 부품조립라인에 이르는 제3세계의 노동현장에서 땀흘리는 무수한 익명의 노동자들이 ‘비가시성’영역으로 가려져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구에서는 사라지는 노동계급이라는 헛소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서나 쉽사리 노동의 자취들을 찾아볼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이 노동을 죄와 등치시킨다는 점이며, 고된 일로서의 노동은 원래부터 대중들의 눈앞에서 감춰져야만 할 추잡스럽고 죄스런 행동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209페이지

이러한 조건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라는 맑스의 용어를 되살려 보자. 생산력의 변화가 우리의 사회적 존재 전체, 즉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우리의 실천과 경험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맑스는 생산과정의 혁명적 변화들을 곧잘 정치적 혁명과 대비시키곤 했다.

해체주의적 흐름들(생산에서 상징적 행위로의 이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즉 상징적 교환에의 참여와는 대립되는 것인 물질적 생산에로 초점을 되돌려 놓는일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적 재배치라는 과제를 앉고 있다.

 

정치적 전체주의란 아도르노가 주장했듯이 도구적 이성의 원리, 즉 기술에 의한 자연착취의 원리들이 사회로까지 확장되었을 때 사람을 신인류로 변형되어야 할 원자재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전체주의의 뿌리가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정치적 테러, 즉 전체주의가 정확히 말해 물질적 생산의 영역이 그 자율성을 부정당하고 정치논리에 종속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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